[그린경제/얼레빗 = 윤지영 기자]
100년 편지에 대하여.....
100년 편지는 대한민국임시정부 100년(2019년)을 맞아 쓰는 편지입니다. 내가 안중근의사에게 편지를 쓰거나 내가 김구가 되어 편지를 쓸 수 있습니다. 100년이라는 시간과 공간을 넘나드는 역사와 상상이 조우하고 회동하는 100년 편지는 편지이자 편지로 쓰는 칼럼입니다. 100년 편지는 2010년 4월 13일에 시작해서 2019년 4월 13일까지 계속됩니다. 독자 여러분도 100년 편지에 동참해보시지 않겠습니까? 앞으로 매주 화요일 100년 편지를 소개합니다. -편집자-
문의: 대한민국임시정부기념사업회 02-3210-0411
|
|
안창호 선생님께.
선생님 안녕하세요.
저는 현재 선생님이 한창 활동하셨던 캘리포니아 샌프란시스코에서 어학연수를 하고 있습니다. 이번에 편지 의뢰를 받았을 때 누구에 대해 쓸까 고민을 많이 했습니다. 그러다가 샌프란시스코와 관련 있는 분께 편지를 쓰자는 생각으로 선생님께 편지를 쓰게 되었습니다.
.jpg) |
안창호 선생이 딸에게 쓴 엽서 |
하지만 저는 이제 공부의 길에서 조금씩 멀어지고 있는 사람이고, 대학원 전공도 현대사이다 보니 독립운동과 관련된 근대사에 대해 자세히 쓰기가 조심스러웠습니다. 또한 샌프란시스코에 온 지 3개월 밖에 안 지났지만 그동안 한국어랑 일부러 담쌓고 지내, 유창한 글 솜씨로 선생님을 기쁘게 해 드릴 수가 없기 때문이기도 합니다. 원래 부족하기도 했지만요.
다른 분들이 보낸 편지들은 보셨는지요? 저는 이 곳 샌프란시스코에서 선생님에 관련된 자료를 찾는 일이 여간 힘든 일이 아니었습니다. 그래서 정확히 쓰지 못할 바에는 선생님과 얘기를 하는 게 낫겠다 싶어 이렇게 몇 자 적게 되었습니다. 답장을 못 받기에 일방적인 짝사랑의 편지처럼 되겠지만 마음을 툭 터놓고 읽어 주셨으면 좋겠습니다. 그리고 선생님이 가장 잘 아시는 선생님의 인생 얘기보다는, 선생님이 지금 계신 곳에서 이야깃거리가 필요하실 거 같아 다른 이야기를 해보고자 합니다.
선생님이 세상을 떠나신지 벌써 75년이 흘렀습니다. 선생님과 많은 분들의 노력 끝에 광복을 맞이한 지도 68년이라는 세월이 지났네요. 반세기보다 약간 더 지난 시간동안 저희는 많은 일을 겪었습니다. 저희는 이념이라는 무서운 질병으로 인해 동족상잔의 아픔을 겪었고, 아직까지도 그 상처가 아물지 않고 있습니다. 또한 소수의 사람들에게는 부와 명예를 누리는 광명의 시간이었지만 다수의 사람들은 기나긴 어두운 시간을 보내기도 하였습니다. 광복 후 세계에서 손꼽히는 극빈곤 국가에서 지금은 위에서 세는 것이 더 빠른 경제 강대국 중 한 나라도 되었구요. 아픔을 겪은 만큼 더 성숙하는 법이라는 말처럼 저희는 선생님과 많은 분들이 노력하신 것을 잊지 않고 이루어 내었습니다. 하지만 너무 빨리 달려온 것일까요? 다른 국가나 민족이 봤을 때 겉으로는 멀쩡해 보이고 화려해 보이지만 안에서는 아무도 원인을 이야기 해주지 않는 병이 점점 자라나고 있습니다.
화려한 시절을 10년도 누리지 못한 채, 생각도 못한 IMF라는 큰 장벽을 만나 또다시 힘든 시기를 겪어야만 했습니다. 이전의 많은 어려움을 겪어서 그런지, 단기간에 극복해 내는 놀라움을 보여 주었습니다. 하지만 그 과정에서 너무나 많은 부작용이 생겨났고, 너무나 많은 사람들이 아파하고 힘들어 했습니다.
.jpg) |
안창호 선생이 옥안에서 직접 만든 지승공예품 |
저희 셋째 외삼촌은 IMF가 있기 전까지 소위 잘 나가는 건설 회사를 운영하고 있었습니다. IMF 때 모든 회사들이 겪었듯이 다른 회사들이 줄도산 하는 바람에 부도가 났습니다. 부도 후 3년이라는 시간동안 온갖 노력을 다해서 IMF가 공식적으로 끝나갈 무렵에 예전보다 더 크게 회사를 살려 놓았습니다. 하지만 스트레스로 인한 간암이 진행되고 있다는 것도 모른 채 지냈습니다. 그저 과로로 인해 피로하다고 생각하고 외삼촌 자신뿐만 아니라 모두가 힘든 거라고 위안을 삼으며 지냈습니다. 3년 후 회사가 다시 제자리를 찾은 지 3개월도 안 되어서 외삼촌은 간암 말기로 2001년 3월 선생님이 계신 곳으로 갔습니다. 혹시 지나가시다가 만나셨는지 모르겠네요. 마주치시면 가족들이 많이 보고 싶어 한다고 전해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개인적인 얘기는 그만하고 현재 많은 사람들이 겪었던 혹은 겪고 있는 얘기를 전해 드리겠습니다. IMF를 겪으면서 한국 기업들은 비정규직 또는 계약직이라는 서양 문물을 강제적으로 받아들이게 되었습니다. 종류는 다르지만 선생님이 젊은 시절 접하셨던 충격적인 서양 문물을 저희는 또 다시 받아 들여야 했습니다. 처음에는 나라의 빚을 갚기 위해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지만 이게 이렇게까지 큰 부작용이 있는 줄 몰랐습니다. 변명을 하자면 IMF 시기에 사람들은 그저 힘든 하루를 잘 견뎌내는 게 더 중요했기 때문에 부작용에 대해서는 생각하기 힘들었습니다. 당장 자신에게 닥친 문제를 해결하는 게 더 시급했기 때문입니다.
저희는 민주주의와 자본주의 밑에서 살고 있습니다. 자본주의 사회이기 때문에 이 사회를 구성하는 요소 중 돈이 중요한 건 사실입니다. 하지만 민주주의라는 말이 무색하게 돈이 점차 사회계층을 나누고 있습니다. 같은 사회, 같은 회사, 같은 구성원 안에서 정규직이냐 비정규직인가 하는 문제는 상당히 심각한 문제로 자리 잡고 있습니다. 젊은 20대들은 사회가 만들어 놓은 기준에 맞추기 위해, 어느 유행가 가사에 나오는 다시는 돌아오지 않을 20대를 추억을 만들고 자신을 형성하는데 보내기 보다는 미래의 불안함을 없애는데 소모하고 있습니다.
선생님의 실력 양성에 맞추어 본다면 지금의 20대는 어쩌면 정말 제대로 살고 있을지 모릅니다. 회사를 그만둘 때까지 거의 쓸 일이 없는 영어를 위해 어학원이나 해외로 영어를 배우러 갑니다. 그저 취업을 위해 또는 승진을 위해 말이죠. 어떻게 보면 실력 양성과 가장 관련이 높은 스펙 쌓기에 짧게는 2년에서 길게는 4년을 보냅니다. 회사에 취직할 때 자신을 뽐내기 위해서 입니다. 평소에 관심도 없었고 취업 이후로는 평생 쓸 일도 없는 자격증만 수십 개를 취득하는 친구들을 주변에서 심심치 않게 볼 수 있습니다. 누가 정의한건지 모르겠지만 사회가 원하는 사람이 되기 위해, 다들 살아남기 위해 발버둥 치고 있습니다.
선생님이 사셨던 시대처럼 다른 누군가가 죽이러 오는 것도 아니고 나라를 뺏으러 오는 것도 아닌데 우리는 왜 이렇게 입신양명을 위해 노력을 해야 하는지 모르겠습니다.
몇 년 전에 "아프니깐 청춘이다"라는 말이 유행했었습니다. 하지만 많은 젊은이들이 얘기한 것처럼 자신의 이상을 향하거나 꿈을 향해 아픈 것이 아니라 아프기를 강요당하는 사회를 지내야 하기에, 유행어는 공감보다는 반감을 더 많이 샀습니다. 대학을 졸업하고 사회로 나가는 순간부터 정규직·비정규직, 대기업·공기업·중소기업 등으로 자신의 진짜 가치가 아닌 겉모습으로 평가받아야 하는 사회에서요.
남들과 다른 자신을 보여줘야 하는 세상은 겉으로 보기에는 능동적이고 자발적인 자아계발을 이루는 사회처럼 보이고 아름다워 보일지 모릅니다. 하지만 반대로 곰곰이 생각해 보면, 어느 순간부터 사람들은 자신의 일이 아니면 다른 이들에게 관심을 갖지 않거나 겉으로만 신경 쓰는 척을 자주 하기 시작했습니다. 겉으로만 신경 쓰는 척도 사회생활과 대인관계라는 포장지로 포장되어 미화되고 있지요. 다들 자신을 계발한다는 명목 아래 서로에게 점점 무심해지고 있다고 저만 느끼는 건지 모르겠습니다. 한때는 초등학생들 조차 "나만 아니면 돼"라는 유행어를 따라 했습니다. 이런 면에서 본다면 선생님이 미주 한인사회를 위해 노력하셨던 모습이랑 지금의 한국사회는 너무나 다른 모습일지도 모르겠습니다.
위에서 얘기한 것들보다 더 진지하게 생각해 봐야 하는 문제는, 우리는 어디가 아픈지 다 아는데 얘기하기를 꺼려하고 병을 숨기려고 하는 것입니다. 전염병이 아니었던 이 병은 내성이 너무 강해져서 항생제조차 듣지 않는 슈퍼 박테리아로 변해가고 있습니다. 누군가 너무 아파서 그 병에 대해 얘기하자고 하면 정치적으로 공격하거나 특정 기업들의 눈치를 보는데 더 바쁜 것 같습니다.
얼마 전에 한 대학교에 대자보가 붙는 일이 있었습니다. 내용을 보니 정말 답답해서 쓴 것 같았는데, 일부 언론들과 단체들은 누가 먼저라도 할 것 없이 호환마마보다 무섭다는 ‘그것’으로 몰아가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엄청나게 많은 사람들이 호응을 하는데도 불구하고, 일부 사람들은 귀를 닫고 눈을 가려 쉬쉬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계속 아픈 채로 살아야 하는 게 맞는 걸까요? 저는 분명히 민주주의는 모두에게 동등한 권리가 있다고 배웠는데 말을 할 수 있는 사람은 제한을 두려고 하네요. 사람들의 기억 속에 남아있는 선각자들은 대부분 실력 양성뿐만 아니라 사회에 도움이 되기 위해 행동을 직접 했다고 배웠는데, 우리 사회는 그러지 않기를 바라고 있네요. 다 같이 아팠으면 좋겠다고 얘기하네요.
저는 이제 학교라는 틀에서 벗어나 사회로 나가려고 준비하고 있습니다. 저는 20살부터 28살까지 8년이라는 시간동안 한 번도 쉬지 않고 역사라는 공부와 학교 일을 해왔습니다. 처음에는 이게 제 일이고 가장 잘 어울린다고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이제는 다른 길을 가기 위해 샌프란시스코에 무작정 왔습니다. 생각도 정리할 겸 해서요. 제 개인적인 생각의 변화로 오랫동안 해온 것을 놓는다는 게 얼마나 힘들지는 잘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저 자신을 속이고 싶지 않아 과감하게 뛰어들려 합니다.
어쩌면 이 글이 제가 쓰는 마지막 역사 관련 글일 거 같습니다. 제 글을 읽으시는 동안 기분이 나쁘셨을 수도 있고 저와 다른 생각을 가지셨을 수도 있습니다. 이 편지에 적은 글이 이제 슬슬 사회로 나가야 하는 저의 푸념일수도 있고 걱정일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한 번은 선생님께 물어보고 싶었습니다. 실력 양성을 먼저 얘기하셨던 선생님은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jpg) |
서상현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