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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승국 변호사의 세상바라기

신숭겸의 묘는 왜 3개일까?

[양승국 변호사의 세상 바라기 4]

[그린경제/얼레빗 = 양승국 변호사]  춘천시 서면 박사마을에 갔었다가 마침 박사마을에는 신숭겸 장군의 묘도 있어, 이곳도 둘러보았습니다. 신숭겸은 후삼국 시대인 918년 배현경, 복지겸, 홍유 등과 힘을 합쳐 궁예를 몰아내고 왕건을 추대하여 고려를 열게 한 충신입니다. 그런데 신숭겸은 여기에 더하여 왕건을 위해 대구 팔공산에서 목숨까지 바쳤습니다. 

   
▲ 무덤이 3개인 신숭겸의 묘

팔공산이라면 당시는 신라의 영역인데, 어떻게 신숭겸이 여기서 목숨을 잃었을까요? 927(태조 10) 견훤이 신라로 쳐들어가 포석정에서 경애왕을 생포하여 강압적으로 자결하게 하였는데, 이 소식을 들은 왕건은 즉시 군사를 이끌고 경주로 향했지요. 그런데 왕건의 군대는 대구 팔공산 근처에서 도리어 후백제의 군대에 포위되어 태조 왕건의 목숨까지 위태로운 상황에 빠지게 됩니다. 

이때 신숭겸이 나서서 태조를 피신하게 한 후 자신이 태조의 갑옷으로 갈아입고 태조의 마차에 올라 타 후백제 군대와 접전을 벌이다 목숨을 잃습니다. 그리고 자신을 고려의 왕으로 오인한 후백제 군사가 전리품으로 목을 잘라 가지고 가는 바람에 머리 없는 시신으로 남구요. 

전투가 끝나고 신숭겸의 시신을 수습하여 돌아간 왕건은 슬피 웁니다. 단순히 부하 장군이 죽은 것을 애도하여 우는 정도가 아니라, 자신을 위해 죽은 신숭겸을 위해 피눈물을 흘렸겠지요. 그리고 신숭겸을 이곳에 후히 장사지내줍니다. 그런데 눈앞에 보이는 무덤은 3개입니다. 당연히 신숭겸과 그 부인들의 무덤인가 하였으나, 모두 신숭겸의 무덤입니다 

   
▲ 멀리 산숭겸 무덤이 보인다.

왜 무덤이 3개일까요? 태조 왕건은 탈취당한 신숭겸의 얼굴 모습을 금으로 조각하여 몸체에 맞추어 장사지냅니다. 금으로 사람 얼굴을 만들었다면 당연히 탐욕스러운 인간들이 노릴 것 아닙니까? 그래서 왕건은 무덤을 3개로 만들어 진짜 시신이 어느 무덤에 묻혔는지 모르게 한 것이라고 합니다. 글쎄~ 무덤을 3개로 만들었다고 도굴꾼을 피할 수 있을까? 

그런데 또 하나 의문이 드는 것은 신숭겸은 전라도 곡성 출신으로 이곳 춘천시 서면에는 아무런 연고가 없는데, 왜 이곳에 묻혔는가 하는 것입니다. 원래 이곳 묘역은 도선국사가 태조의 묘소로 잡은 명당 터였다고 합니다. 그러나 태조는 자신을 위해 죽은 신숭겸을 위해 아낌없이 이곳 명당자리를 신숭겸에게 내준 것이지요. 

그리고 신숭겸의 원래 성은 신씨가 아닙니다. 기록에는 태조가 평주 산탄으로 사냥을 나갔을 때 기러기 3마리가 날아가는 것을 보고, 신하들에게 누가 저 기러기를 쏠 수 있겠냐고 물었답니다. 그 때 신숭겸이 선뜻 나서 태조가 명한대로 날아가는 기러기 가운데 셋째 기러기의 왼쪽 날개를 맞혔다고 합니다. 그래서 태조 왕건이 치하하면서 능산에게 신씨 성을 쓰도록 하고 평산의 땅을 하사하여, 이로서 신숭겸은 평산 신씨의 시조가 되었다는 것이지요.  

그러면 '원래는 무슨 성씨였을까' 하는 의문이 들겠지요? 당시에는 아직 중국식 성씨(姓氏)가 일반화되기 전이라 신숭겸도 '()'씨 성을 하사받기 전까지는 따로 성이 없었을 것입니다 

   
▲ 신숭겸 사당

이제 신숭겸의 묘역을 내려옵니다. 내려오는 제 눈앞으로 춘천 시내를 가로 질러 대룡산이 바로 보입니다. 재작년 12월에 저 대룡산 얼음나무 숲을 거닐었는데, 그때는 의식하지 못했지만 당시 내 눈의 망막에도 이곳 신숭겸 묘역이 비쳤겠군요. 묘역 아래에는 신숭겸의 시호를 딴 장절사(壯節祠)가 있습니다. 문이 잠겨 들어가 볼 수는 없었지만, 사당 내에는 김기창 화백이 그린 신숭겸 장군의 영정이 걸려 있다는군요.  

그리고 사당 옆에는 1805(순조 5)에 세운 신도비도 있는데, 비문은 당대 최고의 세도가였던 김조순이 지었고, 글씨는 조선의 4대 명필가로 불리는 자하 신위가 썼네요. 신위가 춘천부사를 지냈기에 비문의 글씨를 쓴 것입니다. 서울대 다닐 때 관악 캠퍼스 내에서 신위 선생의 호를 딴 자하연(紫霞淵)을 지나다녔기에 신위 선생이라면 친근감을 느끼게 되는데, 여기서 또 신위 선생의 글씨를 만나게 되니 반가웠습니다. 

이제 신숭겸 장군의 묘역을 떠납니다. 묘역을 떠나는 제 머리에는 예전에 국사 배울 때 고려 예종이 지었다는 도이장가(悼二將歌)가 생각납니다. 제목 그대로 2명의 장군을 애도하는 노래라는 뜻인데, 바로 개국공신 신숭겸과 김락을 애도하며 지은 노래이지요. 김락도 신숭겸과 같이 공산 전투에서 전사하였습니다. 

예종은 서경(평양)에서 연 팔관회에서 이 노래를 지었습니다. 예종이 이 노래를 짓게 된 연유를 말씀드린다면, 태조가 처음 팔관회에서 두 장군을 추모하는 행사를 벌였답니다. 이 행사에서 태조는 두 충신이 그 자리에 없음을 애석히 여겨 허수아비에 두 장군의 옷을 입혀 자리에 앉혔다고 합니다. 그러자 두 충신의 넋이 허수아비에 들어왔는지, 두 허수아비는 술을 받아 마시기도 하고 생시와 같이 일어나서 춤을 추기도 하였다는군요. 

그래서 그 후 팔관회 행사 때마다 허수아비로 만든 두 장군이 등장한 것이지요. 예종은 팔관회에서 허수아비 장군이 말 위에 앉아 뛰어다니는 것을 보고 주위 신하에게 저게 뭐냐고 물었답니다. 그때까지도 예종은 이런 경위를 잘 모르고 있었던 모양이군요 

   
▲ 여전히 왼손에 칼을 굳게 잡은 신숭겸 장군의 동상

이윽고 주위 신하들의 설명을 듣고 그 경위를 알게 된 예종이 감격하여 노래를 지은 것이 도이장가입니다. 가사는 이렇습니다.  

님을 온전케 하온 / 마음은 하늘 끝까지 미치니 / 넋이 가셨으되 / 몸 세우시고 하신 말씀 / 직분(職分) 맡으려 활 잡는 이 마음 새로워지기를 / 좋다, 두 공신이여 / 오래 오래 곧은 자최는 나타내신저. 

예종이 찬미하며 애도한 신숭겸 장군. 주군을 위하여 자기 목숨을 던진 충신. 그를 생각하며 천천히 장군의 곁을 떠나갑니다. 뒤를 돌아보는데 장군은 여전히 왼손에 칼을 굳게 잡고 떠나가는 우리를 바라보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