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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롭게 보는 한국경제 거목 정주영

정주영 14세 첫 가출…'거지와 나폴레옹' 평생 스승을 얻다

[새롭게 보는 한국경제 거목 정주영(1915~2001)] ② 가출

[그린경제/얼레빗=김영조 기자] 

내년 탄생 100주년-소처럼 우직했던 천재적인 뚝심의 기업가
어린 농꾼 은 신문 읽는 것한밤 2걸어 구장집서 신문 구해 읽어
"평생 농투성이로 살 수 없다" 비상금 47전 들고 동네 선배와 첫 가출
길거리 거지의 끈질긴 생존법 "간절해야 세상을 살 수 있다" 큰 깨달음 

[그린경제/얼레빗=김영조 기자] 정주영은 19151125일 강원도 통천군 송전면 아산리에서 태어났다. 아버지 정봉식은 약 4000평의 논밭을 소유한 중농이었는데 먹고 살기가 빠듯한 정도였다. 그런 가정에서 정주영은 서당 선생님이었던 할아버지에게 다섯 살 되던 무렵부터 여덟 살까지 동몽선습,소학,대학,맹자,십팔사략따위를 배웠다. 서당을 마친 정주영은 열 살 되던 해에 송전소학교에 입학하여 6년 간 공부를 하고 2등으로 졸업했는데, 이는 정주영의 최종학력이 된다. 

어린 시절 정주영은 새벽 다섯 시면 일어나 아버지와 함께 농사를 지었다. 그때 그에게 유일한 즐거움은 <동아일보>를 읽는 것이었다. 농사일이 끝나면 날마다 밤에 2떨어진 구장 집에 가 <동아일보>를 빌려, 연재되고 있던 소설 이광수의 <>을 호롱불 아래에서 읽었다고 한다.소학십팔사략을 공부하고 이광수의 <>을 읽었던 것이 어쩌면 평생의 밑거름이 되었을 지도 모른다. 소학교를 졸업한 뒤에도 정주영은 아버지를 도와 농사일을 했다. 하지만 꿈 많은 소년 정주영은 아무리 봐도 앞날을 기약할 수 없는 농사만 지을 수는 없었다. 

결국 14살 때 첫 가출을 한다. 죽어라고 일해도 겨우 콩죽 신세를 면할 길이 없는 배고픈 농촌생활이 진절머리가 난 것이다. 힘들게 돌밭을 개간해봐야 손에 쥐는 돈은 쥐꼬리만 하니 차라리 공사판에 가서 돈을 벌어 그 돈으로 논밭을 사는 게 훨씬 낫다는 생각을 하게 된 것이다. 정주영은 나이가 세 살 위 선배인 지주원한테 같이 청진에 가서 돈을 벌자고 꼬드겼다.  

둘이 주머니를 뒤집어 털어낸 돈은 모두 47. 처음 투자한 이 작은 돈을 허투루 쓸 수 없었기에 그들은 청진까지 걸어서 가기로 했다. 무려 보름 걸리는 길을 굶으면서 걷고 또 걸었다. 뱃속에서 꼬르륵 소리가 나서 도저히 참을 수 없을 때 떡판과 떡메가 있는 떡집이 보였고 당시 자신들로서는 거금인 5전으로 인절미 세 개를 사서 나눠 먹었다. 간에 기별도 안 가는 정도였지만 더는 쓸 수가 없었다.  

청진 가는 도중, 원산에 들른 두 사람은 친구 전운학을 만났지만 잠을 잘 곳이 없어 모기가 들끓는 보세창고에서 잤다. 정주영은 훗날 제비만한 모기들이 내의도 안 입은 자신들의 무명 홑바지 저고리를 뚫고 쉴 새 없이 마구 물었다.”고 회상했다. 객지생활의 쓰라린 맛을 처음으로 경험한 것이다.  

이때 그는 평생 잊지 못할 장면을 목격한다. 참외장수 아주머니에게 어떤 거지아이가 손을 내밀고 돈 한 푼 달라고 졸라대고 있는 것이었다. 끈질기게 졸라대는 거지아이에게 화가 난 아주머니가 거지아이 손을 쳐낸다는 게 아주머니 손에 들고 있던 참외 두 개가 그만 땅에 떨어져 와짝 깨져버렸다. 그러자 아주머니는 길길이 뛰면서 욕을 퍼부었지만 거지아이는 눈 하나 꿈쩍하지 않은 채 끈덕지게 졸랐다. “아주머니 이왕 못 팔게 됐으니 내나 주세요. 내나 주세요.”  

정주영은 이때 깨진 참외에 침을 꿀꺽 삼키면서 한 편으로 깨달음을 얻게 되었다. “! 세상에 거지 아이가 사는 방법이 바로 저거였구나. 저렇게 끈질기게 간절하게 원해야만이 세상을 살 수 있구나. 거지 아이도 저러는데 나는 어떻게 살아야 할까?” 그날 밤 정주영은 거지 아이가 눈에 밟혀 쉽게 잠이 들 수 없었다. 어쩌면 그 거지아이가 평생의 스승이었는지도 모른다.  

다시 발길을 옮긴 정주영은 청진에 가기 전에 우선 탄광촌 고원(高原)에 있는 평원선 철도 공사판에서 일을 한다. 당시 품삯은 비교적 힘이 덜 드는 노동은 하루 40, 중노동은 45전이었는데 한 푼이라도 더 벌기 위해 중노동을 하기로 했다. 그런데 품삯이 45전이었지만 매일 숙식을 해결하는 현장식당에 내는 돈이 30전이나 됐다. 하루 45전을 벌어 30전을 숙식비에 내고나면 남는 돈은 고작 15, 한 달을 모아봐야 450전에 불과했다.  

하지만 그도 비 오는 날은 공치는 날이어서 수입이 없다. 그래도 밥은 먹고 잠은 자야하기에 하루 30전의 생돈을 내야만 했다. 이래가지고는 돈을 모으기는커녕 자칫 빚쟁이가 될 판이었다. 공사판에서 힘든 일을 하던 중 두 달이 지난 어느 날 아버지가 찾아와 정주영의 첫 번 가출은 청진에 가보지도 못하고 막을 내리게 되었다.  

아버지가 너는 우리 집안의 장손이다. 장손은 집안의 기둥인데, 기둥이 빠지면 집안은 쓰러지는 법이다. 어떤 일이 있어도 너는 고향을 지키고 네 아우들도 책임져야 한다. 네 아우들 가운데 누가 집을 나갔다면 나는 이렇게 찾아 나서지 않는다.”라고 간곡하게 집에 가길 원했기에 말없이 집으로 발길을 돌려야 했다.  

그러나 정주영에게 가출하기 위한 비상금 47, 인절미 세 개 값 5, 중노동 품삯 45, 현장식당 숙식비 30전은 훗날 잊을 수 없는 돈이었다. 아니 그보다도 첫 번 가출에서 그는 인생에 조금이나마 눈을 뜨게 만든 거지아이를 만난 행운도 얻었다. 결코 수확이 없었던 가출은 아니었다.  

두 번째 가출도 실패했다. 세 번째 가출. 서울로 올라와 부기학원 등록. "내 사전에 불가능이란 없다" 나폴레옹을 죽어라 읽었다. 가출한 아들을 찾아 나선 아버지는 덕수궁 앞에서 아들과 쪼그리고 앉았다. "그래, 끝까지 고집을 피울 테냐?" "안 내려가요" 무섭게 대들었다. 아버지 볼 위로 두 줄기 눈물이 흘러내렸다. 정주영도 엎어져 한 없이 울었다. 나폴레옹의 꿈을 접고 또 한번 집으로 돌아가야 했다. 그러나 정주영 인생에 커다란 도약이 될 마지막 네 번째 가출이 기다리고 있었다. 

그리고 다음해 4월의 두 번째 가출은 소학교 동창 둘과 함께였다. 그때 그들은 한 친구의 친척집에 머물렀다가 다시 길을 떠났는데 중간에 사기를 당해 빈털터리가 된 뒤 금강산 자락에 있던 정주영의 작은할아버지 집으로 가게 되었는데 아버지에게 연락을 받은 작은할아버지의 손에 붙들려 정주영은 집으로 돌아가야 했다. 첫 번째 가출에 견주면 참 싱거운 결말로 끝나고 말았다. 

인생에 있어서 가장 극적인 가출, 그것은 세 번째였다. 아버지가 소를 팔아 마련한 거금 70원을 훔쳐서 가출한 이래 60여 해가 흐른 뒤 그 돈은 천 마리의 소가 되어 돌아온 것이다. 나무 판 돈에서 3, 4전씩 빼돌려 모은 비상금 47전이 가출을 위한 자금이었던 첫 번째 가출에 견주면 세 번째 가출 자금 70원은 어마어마한 큰돈이었다. 
 

   
▲ 정주영의 가출(그림 이무성 한국화가)


세 번째 가출을 감행한 정주영은 서울로 올라와 덕수궁 근처 부기학원에 등록했다
. 부기학원에서 6달 동안 속성으로 공부하면 회계원이나 경리원으로 취직할 수 있다고 했기 때문이었다. 학원 안에서 숙식하며 부기 공부를 했고, 수업이 끝나 기숙사에 가면 죽어라고 책을 읽었다. 특히 내 사전에 불가능은 없다라는 정신으로 프랑스 황제 자리에까지 오른 나폴레옹전을 죽어라 읽었다. 정주영의 가슴에 나폴레옹은 활활 타는 야망의 불을 질렀다.  

그러나 두 달 뒤 아버지가 불쑥 자신의 기숙사 방으로 찾아왔다. 정주영이 미처 챙겨 나오지 못했던 부기학원 입학안내서를 찾아내고 틀림없이 학원에 가면 찾을 수 있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세 번이나 가출한 아들을 찾아 나선 아버지의 열정도 만만치 않았다. 가출한 장남을 찾아 시골집으로 데려가야 집안이 온전할 수 있다는 믿음이 만든 열정이었다. 아버지는 덕수궁 대한문 앞에 아들과 쪼그리고 앉았다. 그리곤 조곤조곤 종손, 맏아들의 의무를 얘기하면서 집으로 가자고 타일렀다. “그래, 끝까지 고집을 피울 테냐?” 하지만 끈질기게 쫓아다니는 아버지가 귀신처럼 지겹고 원망스러웠다.”는 생각이 들 수밖에 없었던 아들은 아버지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대들 듯 말했다. 

안 내려가요. 이제 넉 달이면 취직이 되는데 뭣 때문에 집에 가요. 안 가요.” 이번에 돌아가면 다시는 넓은 세상에 나가는 것이 불가능할 것만 같아 독한 마음으로 고집을 피웠다. 그러나 아버지 볼 위에 두 줄기 눈물이 흘러내릴 뿐이었다. 사람이라면 눈물, 그것도 부모나 자식처럼 사랑하는 사람의 눈물에는 누구나 약하기 마련이다.  

정주영은 자신을 곰곰이 생각해보니 잦은 가출에 돈까지 훔쳐 달아난 불효막심한 아들이었다. 아버지한테 못할 짓을 하고 있다는 자책감이 가슴을 엤다. 정주영은 엎어져 한 없이 울었다. 가출을 밥 먹듯이 한 아들, 하지만 내 아들은 돼먹지 못한 불효자는 아니라고 믿었던 아버지의 조용한 눈물 한 방울은 결국 정주영의 나폴레옹 꿈을 일시나마 접게 한 것이다. 

비록 가난했지만 정직한 흙과 평생을 살아온 아버지는 그 세계를 벗어나려고 발버둥 치는 아들의 마음을 이해 할 수는 있었지만 다시 데려가야만 했다. 특히 장손인 아들이 객지 바람이 불어 나도는 것이 안타까워 어떻게든 마음을 돌리고 싶었다. 그러나 정주영의 가출은 이게 끝이 아니었다. 기어이 저지른 네 번째의 가출, 사실 그 가출은 정주영에게 있어서 커다란 인생의 도약이 된 사건이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