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05.03 (금)

  • 흐림동두천 1.0℃
  • 흐림강릉 1.3℃
  • 서울 3.2℃
  • 대전 3.3℃
  • 대구 6.8℃
  • 울산 6.6℃
  • 광주 8.3℃
  • 부산 7.7℃
  • 흐림고창 6.7℃
  • 흐림제주 10.7℃
  • 흐림강화 2.2℃
  • 흐림보은 3.2℃
  • 흐림금산 4.4℃
  • 흐림강진군 8.7℃
  • 흐림경주시 6.7℃
  • 흐림거제 8.0℃
기상청 제공
상세검색
닫기

새롭게 보는 한국경제 거목 정주영

네 번째 가출, 드디어 쌀가게 주인 되다

[새롭게 보는 한국경제 거목 정주영(1915~2001)] ③ 네 번째 가출

[그린경제/얼레빗=김영조 기자]  아버지 손에 붙들려 고향으로 돌아온 정주영은 다시 농사일을 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그 해에 흉년이 들었다. 고향으로 다시 돌아온 뒤 아버지의 간곡한 설득에 굳은 결심으로 농사를 지으려 했지만, 또 다시 마음은 서울에 가 있었다. 흉년을 벗어날 뾰족한 수가 없는 농촌현실은 희망이 없었다. 기회를 엿보던 정주영은 송전소학교 동창 오인보와 함께 기어이 4번째의 가출로 서울 땅을 밟았다. 하지만 당장 먹고 살 길이 막막했다. 그래서 일거리가 많다는 인천 부둣가에 가 새벽부터 해질 때까지 쉼 없이 짐을 지어 날랐다. 

그러나 이도 밥 세 끼를 먹기에 급급한 형편없는 수입이었다. 하루 품삯은 고작 50전으로 먹고 자는데 드는 돈을 빼면 20전이 고작이었기 때문이다. 그 뿐만이 아니라 그들이 자는 합숙소는 빈대가 들끓어 하루 종일 힘든 일을 하고 나서도 잠을 제대로 잘 수가 없었다. 잠은 자야했기에 할 수 없이 그는 식탁 위로 올라가 잠을 청했다.  

하지만 빈대는 식탁 위의 그를 그대로 놔두지 않았다. 정주영은 생각 끝에 식탁의 네 다리에 물을 담은 양재기를 하나씩 놓고 잠을 잤다. 그런 방법으로도 곤히 잘 수 있었던 건 이틀에 불과했다. 불을 켜고 보니 빈대들이 벽을 타고 까맣게 천장으로 올라가다 사람 몸에 뚝뚝 떨어지고 있는 것이 아닌가? 소름끼치는 장면이었다. 

그러나 천하의 정주영은 빈대를 통해서도 가르침을 받는다. “빈대도 먹고 살기 위해 저렇게 오르고 또 오르는구나. 어쩌면 죽음을 걸고 기어오른 것인지도 모른다. 그런데 나는 저 빈대만큼의 노력을 하고 있을까? 내가 빈대보다 나은 존재일까? 저 미물 빈대와 견주어 만물의 영장이라는 내가 더 낫다고 할 수 있을까? 그는 첫 번째 가출 때 봤던 거지아이를 다시 떠올렸다. 그리고 그의 꿈 나폴레옹도 생각했다. 점점 정주영에게는 스승이 늘어나고 있는 셈이었다.  

그 날로 정주영은 인천 부둣가의 날품팔이 일을 그만두었다. “빈대도 살기 위해 끊임없이 오르고 또 오르는데, 내가 빈대보다 못해서야 되겠나? 그래, 경성으로 가자. 노동을 해도 경성이 더 나을 거다.” 그는 경성에서 새로운 도전을 해보기로 작정했다. 첫 번째 가출처럼 그는 걸어서 걸어서 경성으로 향했다. 

물론 경성에서도 마땅한 일자리는 쉽게 나타나지 않았다. 며칠을 헤매고 다닌 끝에 겨우 얻은 일자리는 안암동 고려대학교 신축 공사장에서 막노동 하는 일이었는데 이 역시 품삯이 생각보다 많지 않았다. 막노동을 하던 그의 머릿속에는 고정된 일자리 생각뿐이었다. 그래서 그는 시간만 나면 이곳저곳 경성 바닥을 헤매면서 보다 나은 일자리를 찾고 또 찾았다.  

그러다 두 달 뒤 정주영은 용산역 근처 엿공장에 잔심부름꾼으로 들어갔다. 그곳에서 그는 하루 50전을 받으면서 온갖 잔심부름과 궂은 일을 다했다. 돌과 목재 따위를 나르던 신축공사 막노동에 견주면 몸은 편했지만 돈도 모이지 않았고 그렇다고 기술도 제대로 가르쳐 주지 않는 엿공장에서 더는 청운의 꿈을 꿀 수가 없었다. 그래서 그는 다시 다른 일자리를 찾아 헤맸다.  

그러다 눈에 띈 것은 신당동의 복흥상회라는 쌀가게에서 배달원을 구한다는 광고였다. “하루 세끼 밥을 먹여주고, 가게에서 잠을 잘 수 있고, 월급으로 쌀을 한 가마나 준다.” 정주영은 이 조건이 눈에 번뜩 뜨였다. 득달같이 쌀가게로 찾아갔다. 그런데 마음씨 좋아 보이는 주인은 보자마자 이렇게 물었다.  

자네, 자전거를 탈 줄은 아나?”
물론 잘 탑니다.”  

사실 정주영은 자전거를 겨우 탈 줄만 알뿐 자전거에 무거운 쌀을 싣고 배달할 정도는 아니었다. 취직하고 싶은 마음에 약간은 거짓을 보탰던 것이다. 정주영은 드디어 자신이 바랐던, 숙식은 물론 돈을 모을 수 있는 그런 첫 직장을 얻었다. 그는 취직하자마자 열심히 일했는데 일찍 새벽에 일어나 가게 앞을 깨끗이 쓸고 물을 뿌리는 일로 하루를 시작했다. 그뿐만이 아니라 시키지도 않았던 정리정돈까지 신나서 했다. 여기저기 너저분하게 흩어져 있는 쌀가마와 곡식 자루를 가지런하게 쌓고, 언제나 일이 끝난 뒤에는 가게 안팎을 청소하는 것에도 신이 났다. 

며칠 뒤 주인은 쌀 한 가마니와 팥 한 되를 왕십리에 있는 자신의 집에 배달하라고 했다. 비까지 추적추적 내리는 날이었지만 쌀가마니와 팥 자루를 자전거에 싣고 나설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자전거가 서툴러 비틀비틀하다가 기어이 나동그라지고 말았다. 쌀가마니와 팥 자루가 진흙탕에 떨어져 엉망이 되어 버렸고 설상가상 자전거 핸들은 확 휘어져 버렸다. 정주영은 다리가 시퍼렇게 멍들었지만, 아픈 줄 몰랐다. 그저 자전거를 못 탄다고 당장 그만 두라고 할까봐 하늘이 노랬다.  

그런데 주인아주머니는 정주영을 보더니 큰 소리로 웃으며 비 오는데 수고했다. 다친 데는 없냐?”며 오히려 걱정해 주는 것이 아닌가? 천우신조였다. 큰 인물은 귀인을 만나는 법인가 보다. 

다시 돌아온 고향땅. 마음은 온통 서울로 쏠려있었다. "가자, 경성으로. 막노동을 해도 여기보단 나을 것이다" 네 번째 가출. 인천에서 서울서 막노동으로 전전했다. 그러다 눈에 띈 것은 쌀가게 복흥상회 구인광고였다. 하루 세끼 먹여주고 재워주고 월급으로 쌀 한 가마불철주야 솔선수범하며 일했다. 어느 날 주인이 정주영을 불렀다. "노름꾼 자식에게 못 맡기겠다. 자네가 인수했으면 좋겠네" "저는 돈이 없습니다" "돈은 걱정말게. 모아둔 돈만 내고 나중에 갚게" 드디어 '경일상사'라는 쌀 가게 주인이 되었다. 

그는 그날부터 꼬빡 사흘 동안을 뜬눈으로 자전거를 타고 또 탔다. 그렇게 노력하니 얼마 되지 않아 한꺼번에 쌀 두 가마를 싣고도 거침없이 달릴만한 으뜸 배달꾼이 됐다. 시골에서 농사짓던 것에 견주면 쌀가게 일은 식은 죽 먹기였다.  

정주영은 거기서 멈추지 않았다. 배우지 못한 주인은 어디에서 쌀을 얼마만큼 들여왔고, 누구한테 배달했는지, 돈은 언제 받았는지 등을 장부에 제대로 쓸 줄 몰랐다. 세 번째 가출 때 부기학원에 다녔던 그는 시키지 않았지만 장부를 깨끗하게 정리해 놓았다. 반년쯤 지나자 주인은 자신의 아들이 아닌 정주영에게 장부 정리를 맡겼다. 주인과 그 사이에는 믿음이라는 끈이 생긴 것이었다. 쌀 한가마로 시작한 정주영의 월급은 두 가마가 되고 나중에는 세 가마니까지 되었다 

   
▲ ⓒ 이무성 한국화가

그러던 어느 날 주인은 정주영을 불렀다. 

아무래도 가게를 내놓아야 할 것 같다.” 

정주영은 주인의 말을 듣는 순간, 먹여주고, 재워주고, 이만한 월급을 받을 곳이 없다는 생각에 눈앞이 아득해지고 맥이 탁 풀렸다. 그런데 이어지는 주인의 말은 정주영의 귀를 의심케 했다. 

아들놈 때문이야. 가게를 계속해 봐야 아들놈 노름 돈이나 대주는 꼴이니 더는 할 생각이 없네. 그래서 말인데, 자네가 이 가게를 인수하면 좋겠네.” 

주인에겐 아들이 있었는데 아들이 만주까지 들락거리며 노름과 유흥으로 가산을 탕진하는 꼴에 주인은 울화병이 걸릴 정도였고 사업을 계속할 의욕까지 잃어버린 것이다. 

주인어른, 하지만 저는 가게를 인수할 돈이 없습니다.” 

정주영은 물론 가게를 맡아 할 자신은 있었지만 그동안 일을 해 모은 돈으로는 쌀가게를 인수할 정도에 턱없이 모자랄 거란 생각을 했던 것이다. 

! 돈은 걱정 말게. 자네가 저금해 놓은 것만 먼저 주고, 나머지는 벌어서 갚으면 되네. 단골들은 그대로 물려받고, 정미소에서도 쌀값은 월말에 한꺼번에 계산해 주면 된다고 했어. 지금까지 죽 자네를 보아왔는데 그동안 하던 것처럼 성실히 하면 될 것이야.”  

주인이 보는 정주영은 다른 배달꾼과 달랐다. 저녁때가 되면 다른 일꾼들은 장기나 두고 담배를 피우고 놀았지만 그는 항상 책을 보고 있었다. 더구나 주인아주머니도 정주영을 변호사가 되겠다는 꿈을 키우며 주경야독하던 성실한 청년이었다고 말 할 정도였으니 주인이 자신의 가게를 물려줄 만도 했다.  

드디어 정주영은 쌀가게 배달원에서 주인이 되었다. 19381월 정주영은 경성에서 제일이라는 뜻으로 경일(京一)상회라는 간판을 내걸고 처음 사업이란 걸 하게 되었다. 그는 단골손님을 더 만들기 위해 뛰고 또 뛰었고 배화여고와 서울여상 기숙사에도 쌀을 댈 수 있었으며, 가게도 부쩍부쩍 커 나갔다. 하지만 세상일이 자신의 뜻대로만 되는 것은 아니었다. 잘 나가던 쌀가게를 그만 두어야 할 일이 벌어진 것이다.(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