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린경제/얼레빗=양승국 변호사] 일개 수병(水兵)인 안용복이 일본 어선이 울릉도와 독도를 넘보지 못하도록 일본까지 가서 호오키주 성주와 담판을 벌이고 일본 막부로부터 일본 어부들이 그렇게 하지 못하도록 하겠다는 서계를 받아낸 것은 근본적으로는 조선 정부가 직접 나서서 해야 할 일입니다. 그런데 나라가 그렇게 하지 못하기에 보다 못한 안용복이 생명의 위험을 무릅쓰고 직접 나선 것입니다.
그렇다면 조선 정부로서는 공도정책을 포기하고 울릉도에 백성들을 입주시켜 다시는 일본이 그런 마음을 먹지 못하도록 해야 할 것이 아닙니까? 그러나 조선은 1884년이 되어서야 비로소 공도정책을 포기하고 울릉도에 다시 백성들을 입주시킵니다. 그 대신 조선은 울릉도를 비운 후 정기적으로 실시하다가 흐지부지된 수토(搜討) 정책을 다시 실시합니다. 곧 울릉도에 사람을 입주시키는 대신 3년에 한 번씩 울릉도에 관헌을 보내어 울릉도를 시찰하고 조사하게 합니다. 그러나 3년에 한 번씩 울릉도를 돌아보는 정도로 되겠습니까?
▲ 여객선을 타고 울릉도에 들어가며 찍은 울릉도 모습
실제로 일본 막부가 1697년(숙종 23)에 일본 어민의 울릉도 출입을 금하겠다는 서계를 조선 정부에 보낸 후에도 일본인들의 울릉도 출입은 완전히 근절되지 않았습니다. 그 한 예로 1882년에는 울릉도 검찰사 이규원이 울릉도 감찰을 나갔다가, 울릉도에서 벌목하는 일본인을 만나고 일본인이 세운 표목을 발견하기도 하였는데, 그 일본인은 표목은 이미 1869년(명치 2)에 암기충조(岩崎忠造)가 표목을 세운 것이라고 대답합니다. 표목은 당연히 울릉도가 자기네 땅임을 표시하는 것이었겠지요.
쯧! 쯧! 1869년에 세운 표목을 1882년에서야 발견하였다면, 그러면 그동안 울릉도 수토하러 간 관헌은 무얼 보고 온 것입니까? 아마 고종은 그래서 이 보고를 받고서 울릉도를 그대로 비워두었다간 큰일나겠다싶어 다시 백성들을 울릉도에 입주시킨 것으로 보입니다.
일본이 독도를 자기네 땅이라고 우기는 논거중 하나가 주인 없는 섬을 자기네가 먼저 찜했다는 것 아닙니까? 만약 이때 고종이 울릉도에 다시 백성들을 입주시키지 않았다면 일본은 지금 울릉도도 자기네 땅이라고 우기고 있지 않을까요? 허~참~~ 고종이 뒤늦게나마 공도정책을 포기한 것은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면서도, 한편으로는 안용복 장군이 목숨 걸고 지킨 울릉도를 조선 정부가 제대로 지켜내지 못하고 있었다는 것에 허탈한 웃음이 나오기도 합니다. 그리고 조선 정부에 분노가 일어나기도 합니다.
자기들 역할은 제대로 못하면서, 안용복 장군이 처음 일본 갔다 왔을 때에는 곤장 때리고 2년이나 감옥에 가두고, 2번째로 갔다 왔을 때에는 사형시키려고 하다가 남구만, 윤지완의 반대로 크게 봐주는 척 하며 유배를 보내고...
그런데 수토 정책을 얘기하다보니 생각나는 것이 있습니다. 3년에 한 번씩 울릉도를 돌아보고 오라고 수토 정책을 실시하였다지만, 담당 관헌이 울릉도까지 가보지도 않고 허위보고를 할 수도 있지 않겠습니까? 그렇다고 이를 확인하기 위해 다시 관헌을 보낼 수도 없고…….
▲ 울릉도 서면 태하리의 황토구미(울릉황토구미마을 제공)
울릉도 서면 태하리에는 황토구미라고 절벽에 황토층이 선명하게 드러나 있는 곳이 있습니다. 다른 곳에 없는 이곳만의 지질적 특징입니다. 그래서 수토선을 보낼 때에는 울릉도 갔다 왔다는 증거로 황토구미의 황토를 가져오도록 하였답니다. 그러나 위에서 표목을 발견하지 못했다는 얘기를 보면 수토 관헌이 울릉도 가서 황토만 가져오거나, 그나마 전에 가져왔던 황토의 일부를 남겨두었다가 이를 갔다 왔다는 증거로 제출한 것은 아닌가요? 그것~ 참~~
아! 또 하나 공도정책으로 인한 슬픈 전설이 생각나는군요. 태하리에 가면 성하신당(神堂)이 있습니다. 태종이 울릉도를 비우라는 명령을 내리자, 안무사 김인우가 울릉도 주민들을 소개시키기 위해 울릉도에 갑니다. 그런데 주민들을 배에 태우고 떠나려고 하면 풍랑이 일어 배를 띄울 수가 없습니다. 그런데 김인우의 꿈에 해신이 나타나 동남동녀(童男童女)를 섬에 두고 떠나라는 것입니다.
김인우는 처음에 꿈을 무시하고 계속 출항을 시도하지만 거친 풍랑으로 실패합니다. 할 수 없이 김인우는 동남동녀에게 심부름을 시키고 그 사이 몰래 울릉도를 빠져나옵니다. 김인우는 어린 아이들을 섬에 그대로 두고 온 것이 계속 맘에 걸렸을 것입니다. 그래서 김인우는 몇 년 후 다시 울릉도 수토 명령을 받고 울릉도에 오자마자 동남동녀부터 찾습니다. 김인우는 이 아이들이 울릉도에 잘 적응하여 살아주기를 바랐겠지만, 결과는 백골로 변한 아이들을 만날 수 있을 뿐이었습니다.
이 이야기를 쓰다 보니 세월호에 갇혀 어른들을 원망하며 죽어갔을 단원고 학생들이 다시 생각나서 잠시 펜대를 멈추게 되는군요. 김인우로서도 아이들에게 사죄하고 싶은 심정이었을 것입니다. 그리하여 동남동녀의 넋을 위로하기 위해 만들어진 것이 성하신당입니다. 고종 때 다시 사람들이 울릉도에 들어와 살기 시작하면서, 울릉도 주민들은 농사나 고기잡이의 풍년을 기원할 때나 새로 배를 바다에 띄울 때면 성하신당을 찾아 동남동녀에게 제사를 지낸다고 합니다.
▲ 울릉도 주민들이 농사나 고기잡이의 풍년을 기원할 때나 배를 바다에 띄울 때면 제사지내는 성하신당(울릉황토구미마을 제공)
우리 민족은 결코 바다에 약한 민족이 아니었습니다. 장보고가 동아시아의 바다를 호령했고, 이순신이 거북선으로 왜적을 제압했던 민족입니다. 다만 성리학 일본(一本)주의에 빠진 조선의 사대부들이 오직 대륙만 바라보다가 바다에 약해졌던 것입니다. 우리가 원래 바다에 약했던 것이 아니기에 오늘날 우리가 조선 강국, 해운 강국으로 다시 우뚝 설 수 있었던 것 아니겠습니까?
지도를 거꾸로 놓고 보십시오. 그러면 한반도는 대륙에 달랑달랑 매달려 있는 것이 아니라 아시아 대륙에서 해양으로 뻗쳐나가는 대륙의 첨단임을 볼 수 있습니다. 안용복 장군의 사당을 떠나오면서 세계의 대양으로 뻗어나가는 해양강국 대한민국의 모습을 떠올려 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