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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롭게 보는 한국경제 거목 정주영

해방…드디어 '현대자동차공업사'를 차리다

[새롭게 보는 한국경제 거목 정주영(1915~2001)] ⑤ 타고난 마케팅

[그린경제/얼레빗=김영조 기자]  [그린경제=김영조 기자] 여기저기서 돈을 꾸어가며 차린 아도비서비스 공장에 불이 나는 바람에 졸지에 빚더미에 올라 앉아 나오느니 한 숨 뿐이었지만 여기서 주저앉을 정주영은 아니었다. 망연자실한 상황 속에서도 그는 얼핏 참외장수 아주머니에게 끈질기게 달라붙던 거지아이가 생각이 났다. 그리고 낡은 하숙집 벽을 타고 살고자 끊임없이 기어오르던 빈대도 생각이 났다. 거지아이는 어떤 희망보다는 그저 참외 하나 얻어먹고 순간의 배고픔을 참으려 했고, 빈대도 그저 본능적으로 위로, 위로만 올라가는 것 말고는 무슨 뾰족한 수가 없지 않은가?  

거지아이와 빈대가 지금의 정주영과 다른 점은 무엇인가? 절망 자체를 느끼지 못하는 것과 동시에 아무런 희망도 없는 거지아이와 빈대에 견주면 정주영은 분명히 절망을 느낄 수 있으며, 그 절망 속에서도 희망으로 다시 일어설 수 있는 사람이 아닌가? 거기에 생각이 미치자 그는 벌떡 일어섰다. 그리고 예전에 돈을 꾸었던 오 영감을 부리나케 찾아갔다.  

“영감님, 이대로 주저앉으면 영감님 빚은 못 갚을 테고 그러면 영감님의 평생 업에 누가 되는 것 아닙니까? 빚을 갚도록 돈을 더 빌려주셔야겠습니다.” 

이건 숫제 협박이었다. 아니 그만큼 절박했기에 어떤 수를 써서라도 오 영감에게 돈을 다시 빌려야만 했다. 정주영의 말을 가만히 듣고 있던 오 영감은 아무 말도 없었다. 영감은 고심을 하고 있는 것이었다. 이전에 빌려줬던 3000원도 적은 돈이 아닌데 거기에 더 얹어 돈을 빌려주어야 한다니 오 영감으로서는 상당한 갈등을 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자존심으로 살아오던 오 영감도 결단을 내려야만 했다.  

신설동 뒷골목에 다시 자동차 수리공장 세우다 

“나는 지금까지 단 한 번도 담보를 잡고 돈을 빌려 준적이 없네. 그뿐만 아니라 단 한 번도 떼인 적이 없지. 그건 아마 자네도 잘 알고 있을 거야. 그런 내가 내 평생에 사람 잘 못 보아 돈 떼었다는 말은 듣고 싶지 않네. 돈을 더 빌려줄 터이니 이제는 틀림없이 성공해야 하네.”  

정주영의 어깨를 툭툭 쳐주며 용기를 준 오 영감은 어쩌면 자신의 눈이 남들과 다르다는 것을 확인해보고 싶었던 것이 아닐까? 어쨌든 오 영감은 그가 재기할 길을 열어주었다. 이때 정주영에게 있어서 평생의 구세주였을 오 영감은 그에게 다시 3500원을 빌려주었다. 그 돈으로 빚을 갚고 남은 돈은 얼마 되지 않았지만 그는 신설동 뒷골목에 무허가 수리 공장을 열었다.  

당시 서울엔 황금정 6정목(현재 을지로 6가)의 경성서비스, 혜화동 로터리의 경성공업사, 종로 5정목(종로 5가)의 일진공작소와 같은 꽤 큰 규모의 자동차 공장 3~4곳이 있었다. 그에 견주면 정주영의 수리공장은 그야말로 영세한 구멍가게에 불과했다. 이런 공장들 틈에서 살아남으려면 남들과 뭔가 다른 게 있어야 하는 거 아닌가?  

차별화된 방법은 다른 게 아니었다. 경쟁 업체가 하지 못하는 걸 해야만 했다. 지금도 일부 자동차서비스 공장은 손님에게 바가지 씌우는 곳이 종종 있는데 당시도 역시 다르지 않았다. 보통의 서비스 공장은 괜히 고치기 어려운 고장인척 하면서 수리기간을 길게 잡아 늘여놓고 늘인 날짜만큼 수리비를 더 많이 받았다. 일주일이면 고칠 것도 열흘, 보름은 예사였다.  

하지만, 정주영은 오히려 정상적으로 걸려야 할 수리기간을 줄여 빨리 고쳐내는 대신 수리비를 다른 공장보다 더 비싸게 받았다. 당시 자동차 소유주들은 돈이 많았던 부자들이라 수리비를 싸게 하기 보다는 하루라도 빨리 차를 고치는 것을 좋아했기에 그의 이런 방식은 크게 인기를 얻었다. 서울 장안의 고장 난 차들은 모조리 신설동 뒷골목으로 몰려들기 시작했다. 그 때나 지금이나 마케팅 기법은 간단하다. 손님의 원하는 바를 채워주면 되는 것이다.  

요즘 뉴스를 보면 “소비자 니즈 꿰뚫었다”, “건설사, 주부 니즈 반영한 아파트 공급 ‘총력’”, “'고객니즈' 잡아라… 미사강변 분양대전 '후끈'” 등 <니즈>란 말을 쓰기 좋아 한다. 바로 이 <니즈>를 정주영은 꿰뚫어 보았던 것이다. 마케팅 기법을 전혀 배울 기회가 없었던 정주영은 자신 만의 뛰어난 감각으로 이미 세계적인 경영자가 될 바탕이 되어 있었던 것이다.  

수리공장은 쉴 새 없이 돌아갔다. 드디어 정주영은 3년 만에 오 영감에게 빌린 돈의 원금과 이자를 모두 갚을 수 있었다. 정주영은 신용을 지킬 수 있었고, 오 영감은 돈을 떼어 먹힌 적이 없는 기록을 계속 유지할 수 있었다. 그야말로 두 사람 모두를 살린 누이 좋고 매부 좋은 격이 되었다.  

그러나 식민지 나라에 사는 정주영은 이 승승장구의 자동차 수리공장을 오래도록 운영할 수는 없었다. 일제는 전시체제 령을 내린 뒤 전쟁 물자를 만들기 위해 쇠붙이 등을 거둬들이고, 군수품 통제를 하는데 그치지 않고 기업통제정책의 하나로 “기업정비령(企業整備令)”을 내렸다. 정주영의 자동차 수리공장 아도비서비스는 1943년 3월 종로 5정목의 일진공작소에 내줘야만 했다.  

그렇게 의욕적으로 시작했던 그리고 승승장구 해보이던 자동차수리업에서 일제의 식민지 정책에 따라 손을 떼게 된 정주영은 이후 “보광광업주식회사”의 황해도 수안군 소재 홀동금광과 광석 운반 하청 계약을 맺고 화물트럭 40여 대를 사서 2년 동안 광석운반을 했다. 그리고는 해방 직전인 1945년 5월 홀동금광 하청권을 내놓고 고향으로 돌아간다.  

드디어 '현대자동차공업사' 차리다

   
▲ 정주영, 해방 뒤 드디어 '현대자동차공업사' 간판을 올리다.(그림 이무성 화백)
 
해방을 맞자 정주영은 서울로 돌아와 다시 자동차수리업의 문을 두드렸다. 그냥 앉아 있을 정주영이 아니었고, 이제 예전처럼 식민지 치하가 아니기에 하고 싶은 일은 맘대로 할 수 있지 않은가? 당시는 정치적으로 혼란한 시기였으며, 미군정청(美軍政廳)이 모든 권력을 장악하고 있을 때였다. 정주영은 미군정청으로부터 서울 중구 초동 106번지 적산(敵産‧일제나 일본인이 가지고 있던 재산) 토지를 사서 1946년 4월 “현대자동차공업사(現代自動車工業社)”를 설립했다.  

드디어 온 세상에 드날릴 상호 “현대(現代)”가 등장한 것이다. 설립 당시 정주영은 어쩌면 이 “현대자동차공업사”가 오늘의 현대그룹을 일으킬 전진기지가 될 것이라고 생각했을지도 모른다. 30여 명의 종업원을 거느린 작은 공장 “현대자동차공업사”는 중고차 수리는 물론 휘발유차를 카바이트차나 목탄차로 개조하기도 했다. 기름이 나지 않아 휘발유가 비쌀 수밖에 없었던 우리나라로서는 자동차 연료를 휘발유 대신 값이 싼 카바이트나 목탄을 쓸 수 있도록 개조해서 써야만 했던 시대가 있었다.  

“현대자동차공업사”는 미군부대에서 산 낡은 자동차가 시중에 점차 늘어나자 종업원이 1년 만에 70~80명으로 늘어날 정도로 번창했다. 아직 20대에 불과한 젊은 정주영은 쌀가게 주인으로 시작하여 “아도비서비스”를 거쳐 “현대자동차공업사”까지 발전하기에 이른다. “현대=정주영”이라는 등식이 성립이 시작되는 순간이었다. 그리고 절망을 모르는 경영의 귀재 정주영이 탄생되는 순간이었다.  

끊임없는 ‘노력의 화신’ 정주영, 아니 절망을 모르는 천하의 정주영, 마케팅을 배우지 않고도 어찌 마케팅의 화신이 될 수 있었는가? 또 알거지에서 어떻게 재기할 수 있었던가? 그는 종종 “빈대의 교훈”에 빗대어 얘기하기를 좋아한다. “사람들은 위기를 맞게 되면 쉽게 절망하지만, 빈대는 위기도 모르고, 절망도 모르고 오로지 위로 올라가는 것밖에 모른다. 그처럼 사람도 그저 목표점만 보고 죽기 살기로 노력한다면 성공은 틀림없을 텐데도 빈대처럼 필사적인 노력을 안 하니까 좌절로 끝나는 것이다.”라고 말이다.  

그러나 정주영이 “현대자동차공업사”에 안주했더라면 오늘의 “현대”나 “정주영”은 없었을 것이다. 정주영은 “현대자동차공업사”를 넘어서는 새로운 업종의 “현대”를 넘보고야 만다.(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