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림경제/얼레빗=서한범 명예교수] 지난주에는 청년 이은관이 황해도 황주의 이인수 선생 앞에서 테스트를 받은 후, 선생 댁에 기거하면서 배뱅이굿을 비롯한 서도 소리를 배우기 시작했다는 이야기, 당시에는 김종조나 최순경, 이인수 등이 김관준의 배뱅이굿을 잘 불렀다는 이야기, 선생은 제자 이은관을 황해도 장현 마을의 권번 선생으로 추천해 주어서 남을 가르치는 일과 자신의 공부를 열심히 하여 그의 소리가 인근에 널리 알려지기 시작할 무렵, 대동아전쟁 [大東亞戰爭]이 터졌다는 이야기를 했다.
또 1941~1945년까지 일본과 연합군 사이에 벌어진‘태평양 전쟁’은 일본이 제국주의 침략전쟁을 합리화하기 위해 내세운 이름이라는 이야기, 전쟁의 확대로 국내의 사정은 불안해 졌고 권번들이 없어지고 배울 사람이 없어져 고향땅으로 돌아 왔다는 이야기 등을 하였다.
24세가 되던 해, 청년 이은관은 대동아전쟁으로 인해 황해도 장현 마을의 권번 소리선생을 접고 귀향하였으나 강원도 고향땅에도 그를 기다리거나 그의 소리 실력을 발휘할 뾰족한 방법이나 기회가 있을 리 없었다. 기껏해야 동네 유지들 앞에서 간혹 소리하는 기회가 있었지만 명창의 꿈을 안고 있는 이은관이 그 정도로 만족할 수는 없었다. 어떻게 해야 내가 배운 소리를 발휘할 수 있을까? 깊은 생각, 고민은 끝없이 이어졌다.
해답은 서울행이었다. 그러나 서울이라고 해서 이은관을 기다리고 있는 사람이나 그가 머물고 활동을 할 공연장도 없었다. 그야말로 하루하루가 전전긍긍이었다. 배운 게 소리뿐이니 소리를 하며 살아야 하는데, 생계가 심각해 진 것이다. 그가 제일 먼저 찾은 곳은 인천의 한 가설극장이었다. 그 가설극장은 김봉업이라는 줄타기 광대로 유명한 사람이 인천에서 인기를 끌며 공연을 하고 있던 곳이었는데, 이은관의 배뱅이굿 소리를 듣고는 특채를 하였던 것이다.
그 곳에는 소리와 재담이 뛰어나 당대 최고의 인기를 끌던 박천복이 인기리에 공연을 하고 있었다. 박천복은 서울 사람으로 종로 권번의 소리 선생도 했던 인물이었다. 강원도에서 올라온 이은관이 서울의 유명한 소리꾼 박천복과 한 무대에 서게 된 것이다. 그런데 박천복을 만난 것도 행운이었지만, 더 큰 행운을 잡게 된 것은 박천복을 통해 신불출이라는 공연계의 거목을 만나게 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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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 신불출 사단은 웬만한 실력으로는 명함도 내 밀기 어려운 곳이어서 누구나 들어 갈 수도 없는 연예계의 큰 문이었는데, 이를 무사통과했으니 출세길이 보장된 영광의 길이 아닐 수 없었다. 아마 요즘으로 치면 방송국의 전속 탈렌트나 연예사에 오디션을 보고 합격한 것이나 다름없는 일이었다.
신불출 단체에 들어가서는 주로 배뱅이굿을 했다. 이은관이 배뱅이굿을 하며 슬피 우는 대목에서는 신불출은 물론, 어머니와 누이동생, 심지어 연출가 까지도 눈물을 흘리며 감격했다고 한다. 이은관의 배뱅이굿에 자신감을 확인한 신불출은 이를 새롭게 기획하여 서울의 한복판인 종로 4가의 제일극장에 붙이였다. 성공을 한다면 이은관의 앞길은 어느 정도 보장이 되지만, 실패한다면 재정적인 문제는 말할 것도 없이 이은관의 앞길도 순탄치 않을 것이 뻔한 것이다.
이은관의 최초 서울 공연은 예상을 뒤엎고 대 성공을 거두게 되었다. 그래서 3일간의 공연 일정은 관객의 요청으로 4일간 더 연장공연에 들어갔다. 이 공연에는 이은관의 선배격인 여류 소리꾼 김계춘, 박천복과 손홍란의 대화만담, 김윤심의 노래, 신불출의 독만담 등도 가세하였던 것이다.
아쉬운 것은 당대 최고의 인기를 끌던 만담이나 재담은 점차 사라져 지금은 거의 만나보기가 어렵게 되었다는 점이다. 다만, 지금의 코미디나 개그 등으로 확대 발전되어 예전의 그 자리를 이어가고 있을 뿐이다.
이처럼 이은관이 펼치는 극장 무대에서의 배뱅이굿은 점차 성공적인 흥행을 기록하면서 전국의 지방공연도 계획되기 시작했다. (다음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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