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린경제/얼레빗=김슬용 교수] 세종 26년, 1444년 여름이었다. 세종은 이렇게 말한다. 나라는 백성으로 근본을 삼고, 백성은 먹는 것으로 하늘을 삼는 것인데 농사는 입는 것과 먹는 것의 근원으로 임금의 정치에서 먼저 힘써야 할 것이다_1444년(세종 26년) 윤7월 25일
그 어느 시대건 먹는 문제만큼 중요한 것이 없다. 먹는 것으로 하늘을 삼는다는 것은 제대로 먹어야 사람답게 이 세상을 떠받치는 사람구실을 할 수 있다는 것이다. 세종은 바로 가장 중요한 사람의 문제, 백성의 문제를 정확히 꿰뚫었다. 정치란 특별한 것이 아니었다. 백성들이 사람답게 살기 위한 터전을 만들고 법을 만들고 더 나은 제도를 만들면 되는 것이었다.
▲ 세종 때 정초 등이 꼭 필요한 농사지식만 모아 펴낸 《농사직설(農事直說)》 |
1. 굶주리는 백성들
세종이 임금이 된 그 다음 해인 1419년(세종 1년)에 흉년이 들고 온갖 자연 재해가 끊이질 않았다. 세종은 굶어 죽는 백성들을 보고 그들을 제대로 구제하지 못하는 현실이 가슴이 아파 신하들에게 2월 12일에 이렇게 말했다.
“백성(국민)은 나라의 근본이요, 백성은 먹는 것을 하늘과 같이 우러러보는 것이니라. 요즈음 홍수와 가뭄 등 자연의 재앙으로 인하여, 해마다 흉년이 들어 소외받은 백성들과 궁핍한 자가 먼저 그 고통을 받으며, 일을 하는 백성까지도 역시 굶주림을 면치 못하니, 너무도 가련하고 민망하도다.”
그래서 세종은 호조에 명령하여 창고를 열어 굶주린 이를 구제하게 하고, 연달아 신하들을 각 지역으로 보내 살피게 하고 지방 수령으로서 백성의 쓰라림을 돌아보지 않는 자들은 죄를 다스리게 하였다. 그리고는 이렇게 말했다.
“슬프다, 한 많은 백성들이 굶어 죽게 된 형상은 부덕한 나로서 두루 다 알 수 없으니, 감사나 수령으로 무릇 백성과 가까운 관원은 나의 지극한 뜻을 본받아 밤낮으로 게을리 하지 말고 한결같이 그 경내의 백성으로 하여금 굶주려 처소를 잃어버리지 않게 유의할 것이며, 궁벽한 촌락에까지도 친히 다니며 두루 살피어 힘껏 구제하도록 하라. 나는 장차 다시 조정의 관원을 파견하여, 그에 대한 행정 상황을 조사할 것이며, 만약 한 백성이라도 굶어 죽은 자가 있다면, 감사나 수령이 모두 교서를 위반한 것으로써 죄를 논할 것이라.”
이때는 굳이 자연재해가 아니더라도 가난한 백성들은 늘 굶주림에 시달려야 했다. 심지어 이런 일도 있었다. 세종 5년 그러니까 1423년 3월 13일, 함길도의 화주(和州)에 흙이 있는데, 빛깔과 성질이 밀[꿀 찌꺼기를 짜내서 끓인 기름]과 같았다. 굶주린 백성들이 이 흙을 파서 떡과 죽을 만들어 먹으매, 굶주림을 면하게 되었는데, 그 맛은 메밀 음식과 비슷하였다는 보고까지 올라왔다.
백성들이 먹고 사는 문제는 당연히 임금이 해야 할 가장 중요한 일이었다. 그래서 세종은 농업 문제에 관심을 갖게 되었고 농사를 어떻게 하면 잘 지어 곡식을 많이 거둬들일까 고민과 연구를 거듭했다. 그러고 보니 농사를 잘 짓기 위해서는 농부들의 경험도 중요하지만 농사에 관한 많은 지식들이 필요하고 그런 지식을 담은 책이 필요했다.
세종이 우리식 농사 책을 펴내기 전에는 우리 농사 실정에 맞는 농사 책이 없었다. 그 대신에 우리나라 기후와 토질에 안 맞는 중국의 농사 책을 이용하여 농사를 지었다. 이러한 까닭으로 우리나라 농업 생산량은 낮았다. 그래서 세종은 우리나라 지역별 특성에 맞는 농사 책을 펴내 농업 생산량을 크게 높여 굶주리는 백성이 없게 하려고 하였다.
▲ 그림 오수민 작가
2. 굶주리는 백성이 없게 하라, 농사에 대한 지식을 정비하고 나눠 주다
세종은 드디어 1429년(세종 11년)에 5월에 정초 등으로 하여금 우리식 농사책인 《농사직설》을 짓게 하였다. 물론 이 책의 뿌리는 태종 임금 때부터 비롯된 것이지만 체계적인 책으로는 세종 때 완성한 것이다. 이 책 서문에 보면 태종 때부터 농사에 필요한 말들을 수집 정리하고 책으로 만들어 가르치고 보급케 하였다고 한다. 한문으로 적기 힘들어 한자를 우리식으로 고친 이두로 적게 하였다. 세종은 농사는 천하의 큰 뿌리라 하여 이를 적극 독려하였다.
태종 때는 주로 옛책에 있는 지식들을 정리하였지만 세종 때 와서는 직접 관리들로 하여금 농사 현장에 나가 실용적이니 농사지식을 정리하게 하였다. 중국의 고전에도 ‘먹는 것은 농사시기에 달렸다.’라고 할 만큼 농사 지식은 어느 나라든 중요하게 여기던 사항이었다.
세종은 우리의 풍토가 중국과 다르므로 곡식을 심고 가꾸는 법이 각기 특성이 있으므로 옛 책대로 따를 수 없다 하였다. 그래서 꼭 필요한 농사지식만 모아 《농사직설(農事直說)》이라고 하였다. 농사에 필요한 지식을 간략하고 바르게 하여, 백성들도 쉽사리 알도록 하였다. 이 책으로 백성을 인도하여 집집마다 넉넉하고 사람마다 풍족하게 하는데 이르도록 할 것이라고 하였다. 이 책을 대표 집필한 정초는 이 책이 비록 작더라도 그 이익됨은 이루 말할 수 있겠는가라고 하였다.
책이 나온 그 다음 해인 1430년 2월 14일에는 《농사직설》을 각 도에 배포하면서 말하기를, “농사에 힘쓰고 곡식을 소중히 여기는 것은 왕정(王政)의 근본이므로, 내가 매양 농사에 정성을 쏟는 것이다.”라고 하였다. 책 내용은 다음과 같다.
보리・밀은 햇곡식과 묵은 곡식 사이의 식량을 이어가는 먹거리이므로 농가의 가장 급박한 식량원이다. 메마른 밭은 백로절(양력 9월 9일경)에, 보통 밭은 추분 때에, 좋은 밭은 추분 후 10일에 씨를 뿌리는데 옛말에 이르기를 너무 이르면 벌레가 마디에 생긴다고 하였다. 먼저 5~6월 사이에 밭을 갈아서 볕에 쪼이고 써레로 고른다. 씨 뿌릴 때에 또 갈고 씨를 부린 다음 쇠스랑이나 써레로 좀 두텁게 복토한다(일찍 파종하면 뿌리가 깊어 추위에 견디고 늦게 파종하면 이삭이 잘아진다).
이듬해 3월 사이에 한 번 김을 맨다. 보리그루 밭은 이 방법을 따르고 기장, 콩, 조, 메밀그루 밭은 곡식을 거두기 전에 미리 자루가 긴 낫으로 풀이 미처 영글기 전에 베어 밭두둑에 쌓아 두었다가 곡식을 거둔 후 그 풀을 밭 위에 두텁게 펴서 불태우고 재가 흩어지기 전에 갈고 씨를 뿌린다._농사직설/김영진 뒤쳐
이로부터 7년 뒤인 1437년 7월 23일에는 세종이 각 도 감사에게 명하여 《농사직설》 등을 활용해 농사짓는 법을 백성에게 권장하게 한 기록이 실록에 실렸다.
세종은 먹는 것은 백성에게 으뜸이 되고 농사는 정치의 근본인 까닭으로, 백성에게 가까이 하는 일은 농사 잘 짓게 하는 것보다 중요한 것이 없다고 하였다. 만약에 물난리나 가뭄 같은 천지 재변은 하늘의 운수에서 나오는 것이니 어찌할 수가 없으나, 그 사람의 힘으로 할 수 있는 일이라면 의당 마음을 다 써야 할 것을 강조했다.
1429년에 펴낸 《농사직설》의 효과가 크게 없음을 걱정하여 더 찍어 각 고을의 수령들에게 반포하여, 농민을 깨우치고 가르쳐 책에 의거해 시험해 보여서 풍속을 이루도록 하라는 것이다. 만약에 어리석은 백성으로서 자력이 부족한 자나 제 스스로 하기를 원하지 않는 자는 반드시 강제로 시킬 것이 아니라, 적당하게 권고하기를 시종 게을리 하지 말아서 점차로 흥행하도록 하라고 하였다.
세종은 직접 궁궐 안에 논을 만들어 농사를 지으며 연구하며 ‘농자천하지대본야’의 정치를 펼쳤다. “백성이 넉넉하면 임금은 누구와 더불어 넉넉하지 못하겠으며, 만일 백성이 넉넉하지 못하면 임금은 누구와 더불어 넉넉하겠는가 _세종 8년, 1426년 4월 28일”라고 하며 농업 생산량을 늘리고자 갖은 애를 썼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