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문화신문 = 김슬옹 교수] 세종 5년인 1423년은 세종이 임금으로서 본격적으로 나라를 다스리기 시작한 때다. 상왕인 태종이 1422년에 죽기까지 아버지 영향력 아래 있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세종 5년은 세종의 재능을 시험이나 하듯 극심한 천재지변에 시달려야 했다. 극심한 가뭄으로 굶주리는 백성이 온 나라에 넘쳐났다. 함길도에서는 밀과 비슷한 흙으로 떡과 죽을 만들어 먹을 정도로 참혹했다(세종실록 1423/03/13). 함길도의 화주에 흙이 있는데, 빛깔과 성질이 밀과 같았다. 굶주린 백성들이 이 흙을 파서 떡과 죽을 만들어 먹으매, 굶주림을 면하게 되었는데, 그 맛은 메밀 음식과 비슷하였다._세종실록 1423/03/13 즉위 때부터 몇 년째 이어지는 가뭄이었다. 세종은 이 위기를 어떻게 이겨냈을까? ▲ 세종 5년 먹을 것이 없어 흙으로 떡을 해먹는 백성이 있었다. 이에 세종은 모두 자신의 탓이라 여겼다(그림 이무성 한국 화가) 첫째는 위기 상황을 총체적으로 보고 거기에 맞게 적절하게 대응하였다. 1월 9일 충청도에서는 농사에 실패한 각 고을 사람들이 구걸하려고 다른 지방으로 떠돌았다. 그런데 각 지역의 관리들은 떠돌아다니는 사람들을 막기 위해 고
[그린경제/얼레빗=김슬옹 교수] 세종은 어느 날 이렇게 말했다. 사형 집행에 대한 법 판결문을 이두문자로 쓴다면, 글의 뜻을 알지 못하는 백성이 한 글자의 착오로도 원통함을 당할 수도 있으나, 이제 그 말을 언문(훈민정음)으로 직접 써서 읽거나 정확히 듣게 하면, 비록 지극히 어리석은 사람일지라도 모두 다 쉽게 알아들어서 억울함을 품을 자가 없을 것이다. 세종이 이 말을 정확히 언제 얘기했는지 모르지만 1444년 2월 20일에 최만리 등이 올린 갑자 상소문에서 세종의 말이라고 인용되어 있다. 실제로 가장 중요한 훈민정음 창제의 핵심 동기가 바로 이러한 소통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였다. 세종은 자신이 직접 쓴 《훈민정음(해례본)》서문에서 그런 점을 밝히기도 했다. 우리나라 말이 중국과 달라 한자와는 서로 통하지 않으므로 어리석은 백성이 말하고자 하는 바가 있어도 끝내 제 뜻을 펴지 못하는 사람이 많으니라.라고 하였는데 바로 재판 과정에서 한자 사용으로 인한 불소통 문제를 정곡으로 찌른 것이다. ▲ 훈민정음 언해본 어제 서문 통치자가 죄인과 관련된 문서나 판결문에 쓰인 문자까지 고민하고 배려한 사례는 세계사적으로도 없는 일이다. 죄는 미워하되 사람은 미워하
[그린경제/얼레빗=김슬옹 교수] 1418년 세종이 임금 자리에 오른 지 네 달 정도밖에 안 된 12월 25일(음력) 어느 날이었다. 신하들과 함께 경연을 하다가 세종이 이렇게 말했다. 《고려사》를 보니 공민왕 때부터의 역사 기록은 정도전이 들은 바에 많이 의존하다보니 어떤 것은 더 쓰고 어떤 것은 줄이고 하여, 역사 기록을 맡은 사관들의 처음 원고와 같지 않은 곳이 매우 많으니, 어찌 뒷세상에 기쁘게 전할 수 있으랴. 차라리 이런 역사책은 없는 것만 같지 못하니라. 라고 말하였다. 고려 공민왕 이하의 역사 기록이 정도전 등 개국공신들로 말미암아 왜곡되어 실제 기록과 다름을 알고 지적한 것이다. 변계량과 정초도 임금의 말에 공감하여 함께 아뢰기를 만약 역사의 진실을 기록하여 세상에 전하지 않는다면, 뒷세상에서 누가 전하께서 정도전의 역사 기록을 바로잡고자 하는 뜻을 알 수 있겠습니까. 원컨대 문신에게 명하여 고쳐 짓도록 하소서.라고 하였다. ▲ 그림 오수민 그 다음 해인 1419년 9월 20일에 세종은 변계량 등에게 《고려사》를 고쳐 쓰도록 지시하였다. 이렇게 하여 고려사를 바로 쓰는 대사업이 시작되었다. 여기서 우리는 세종이 임금이 되자마자 역사바로잡기에
[그린경제/얼레빗=김슬옹 교수] 1441년 4월 어느 날이었다. 충청도 어느 시골 장터 옆 큰길가에서는 사람들이 길 위로 지나가는 뭔가를 보기 위해 서로 밀치며 난리굿이었다. 뒤쪽에서 볼 수 없는 사람들은 한 마디씩 하느라 정신이 없었다. 도대체 뭐가 지나가기에 이리 난리여. 나라님이라도 지나가는 거유 나라님보다 더 인기가 있는 걸. ▲ 세종 때 발명한 반자동 거리 측정 장치 기리고차(記里鼓車), 장영실이 만들었을 것으로 추측 (그림 오수민) 자세히 보니 기리고차라는 괴상한 마차가 지나가고 있었다. 마차 위에는 북이 징이 있었고 일정한 거리마다 징과 북을 치고 있었다. 징과 북을 사람이 치나 했더니 그것이 아니라 마치 로봇 같은 나무 인형이 치는 것이었다. 사람들은 신기해하다가도 놀랍고 재미있어서인지 눈을 화등잔만 하게 뜨고는 연신 비명이었다. 이 사업 역시 세종 임금이 직접 관여하는 국책 사업이었다. 온나라 땅을 과학적으로 측정할 수 있는 기계인 기리고차를 만들어 전국의 지리를 체계 있게 정리하여 과학적인 지리서를 만들기 위해 나무인형이 북 또는 징을 쳐서 거리를 알려주는 반자동 거리 측정 장치를 개발하여 측량하던 참이었다. 마치 택시 요금 측정기나 마
[그린경제/얼레빗=김슬옹 교수] 1421년 3월 24일, 세종이 임금으로 나라를 다스린 지 3년째 되던 해였다. 지금의 충무로 지역에 있던 인쇄 관청인 주자소가 왁자지껄하였다. 세종 임금이 친히 보낸 술 120병이 도착하였기 때문이다. 임금 심부름으로 온 내시는 주자소 관원들에게 술병의 의미를 설명하였다. 어명이오. 그대들 애쓴 탓에 인쇄 속도가 빨라져 더 많은 책을 빨리 찍어낼 수 있게 되었다고 임금님께서는 더없이 기뻐 하셨소. 그동안 고생 많았으니 오늘은 맘껏 쉬며 술을 마시고 회포를 풀라는 어명이오. ▲ 서울지하철 4호선 충무로역 5번 출구 극동빌딩 앞 화단 안 주자소터 표지석 세종은 인쇄술을 끊임없이 개량하여 문화의 꽃인 출판문화를 크게 드높이게 하였다. 인쇄 개량 전에는 글자를 구리판에 새겨 놓고 사이사이 납을 끓여 부어, 단단히 굳은 뒤에 찍었기 때문에 납이 많이 들고, 하루에 찍어내는 것이 두어 장에 불과하였다. 이때에 세종이 이천과 남급으로 하여금 구리판을 다시 주조하여 글자의 모양과 꼭 맞게 만들었더니, 납을 녹여 붓지 아니하여도 글자가 이동하지 아니하고 더 정확하여 하루에 수십 장에서 백장까지 찍어낼 수 있었다. 《자치통감강목》 같은
[그린경제/얼레빗 =김슬옹 교수] 1433년 9월 초, 강원도 어느 농촌, 가난한 시골 마을이었다. 한 아주머니가 이웃집 아저씨가 몹시 아프다는 말을 듣고 병문안을 하러 왔다. 아저씨는 어디가 아프대유? 어제부터 식은땀이 멈추질 않아요? 그럼 어서 의원님께 보이지 않구. 하루하루 벌어먹기 힘든데 그럴 형편이 되나유. 그럼 최좌수 댁에 《향약집성방》이라는 민간치료법을 모아 놓은 책이 있다고 하니, 그 집 가서 물어봄세. 두 아낙이 최좌수 댁에 가니 마을 어른 구실을 톡톡히 하는 최좌수가 《향약집성방》이라는 책에서 실제 그 병세에 해당하는 처방을 친절하게 일러 주었다. 책에는 다음과 같이 쓰여 있었다. 밀 쭉정이 적당한 양을 세지도 약하지도 않은 불에서 보드랗게 가루 내어 한번에 두 숟가락씩 미음에 타서 자주 먹는다. 묵은 밀을 마른 대추와 같이 달여 먹어도 좋다. 실제로 이와 같이 하니 식은땀이 멈췄다. 이렇게 어려울 때 《향약집성방》이란 책이 무척 요긴하게 의원 구실을 하였다. 마침 세종이 1433년 8월 27일에 향약집성방을 전라도와 강원도에 나누어 인쇄할 것을 명했기에 강원도 농촌에까지 이 책이 들어올 수 있었다. 동네에 한두 권뿐이었지만 급할 때 응급조
[그린경제/얼레빗=김슬옹 교수] 때는 세종 12년인 1430년 5월 어느 날이었다. 충청도 어느 시골 허름한 집 앞에서 사람들이 옹기종기 모여 앉아 웅성거렸다. “어머머. 우리 임금은 역시 성군이셔. 토지세에 관한 법을 만드셨는데 집집마다 그 법에 대한 의견을 들으신대.” “우리 같은 무지렁이한테도 의견을 듣는 세상이라니. 참 살기 좋은 세상이네.” 모인 백성들은 상기된 얼굴로 한 마디씩 하느라 즐거운 표정이었다. 관청에서 관리가 어떤 종이에다가 가가호호 방문하면서 찬반 의견을 묻던 중이었다. 이것이 바로 우리나라 최초의 국민 여론 조사였다. 세종은 관리의 부정으로 농민에게 심각한 피해를 주는 논밭에 대한 세금 제도(전세제도, 공법)를 개혁하기 위해 1430년(세종12) 3월부터 8월까지 여론조사를 했다. 전국 17만여 명의 백성이 투표에 참여하여, 9만 8,657명이 찬성, 7만 4,148명이 반대하는 결과를 얻어 냈다. 세종은 밥은 백성의 하늘이라고 했을 만큼 먹고 사는 문제를 매우 중요하게 여겼다. 이를 위해서는 두 가지가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하나는 농사짓는 법을 잘 가르쳐 농사를 과학적으로 짓게 하는 것이고 또 하나는 농사짓는 땅에 대한 세금을 백성
[그린경제/얼레빗=김슬옹 교수] 세종이 임금이 된지 4년째 되던 1422년 음력 1월 1일. 달이 해를 가리는 일식이 일어날 때가 되자 세종을 비롯한 많은 신하들은 초저하게 하늘을 바라보고 있었다. 세종은 하얀 옷을 입고 인정전의 제단 위에 올라가 일식이 일어나기를 기다렸다. 많은 신하들도 하얀 옷을 입고 임금 곁에서 임금과 하늘을 번갈아 바라보며 서 있었다. ▲ 고려 사람들은 물동이에 물을 담고 해가림(일식)을 보았다. -그림 이무성 한국화가 ▲ 개기일식 모습(왼쪽), 일식장면을 관찰하는 모습(《일식과 월식 이야기》- 나일성.이정복) 일식 계산을 담당한 이천봉 과학자는 더욱 초조했다. 미리 계산한 것에서 어긋나면 큰일 나기 때문이다. 결국 일식은 계산한 시간보다 무려 15분 늦게 일어났다. 이때는 하늘의 움직임을 관찰하고 원리를 파악하여 표준 시간을 정하는 것은 중국 황제의 권한이었다. 따라서 중국에서 만든 천문학책인 역법서를 들여다 사용하니 오차가 생길 수밖에 없었다. 조선의 하늘은 중국의 하늘이 아니었다. 역법서를 중국에서 들여온다 해도 조선 하늘의 움직임을 알고 백성들에게 알려주는 것은 조선 임금만의 특권이었기에 세종은 하늘이 돌아가는 것을 정
[그린경제/얼레빗=김슬옹 교수] 때는 조선시대, 1434년 어느 겨울. 하루해가 뉘엿뉘엿 넘어가는 저녁 어스름이었다. 겨울이라 그런지 해가 더욱 짧았다. 남루한 한 상인이 한양 도성을 향해 길을 재촉하고 있었다. 성남 남한산성 근처 모란 시장으로 물건을 팔러 나갔던 이막동이라는 상인이었다. 한양(서울) 도성 근처에 왔을 때 도성 쪽에서 종소리가 울리기 시작했다. 한 번, 두 번 아이쿠.. 큰 일 났다. 곧 도성 문이 닫히겠구나. 얼른 뛰어가야겠다. 다행히도 상인은 종이 열 번 정도 울렸을 때 도성문에 도착했고 아슬아슬하게 성 안으로 들어올 수 있었다. 들어오고 한 숨 돌렸을 때 28번의 종소리가 끝이 났다. 그 상인은 성 안 한양 시장이 있는 운종가(지금의 서울 종로) 종루 근처에서한 동료 상인의 집에서 잠을 잤다. 새벽이 되자 종루의 종이 울리기 시작했다. 또 다른 장이 열리는 이천 쪽으로 가기 위해 새벽 일찍 일어났다. 꼬끼오 닭이 우는 새벽이었다. 33번 울리자 성 밖으로 나서기 위해 길을 재촉했다. ▲ 조선시대 4대문의 하나인 숭례문, 4대문은 도성을 드나들 수 있는 문으로 33회의 파(바라)와 28회의 인정(인경)을 쳐서 성문을 여닫았다. 이
[그린경제/얼레빗=김슬옹 교수] 정인지, 박연, 최항, 신숙주, 성삼문, 김종서, 최윤덕, 이순지, 김담, 이천, 장영실 세종시대를 빛낸 인재들, 끝이 없다. 분야를 가릴 것도 없다. 특히 정인지처럼 음악, 언어, 과학 등 여러 분야에서 빛을 낸 융합형 인재도 한둘이 아니다. 심지어 노비 출신 장영실도 있다. 이들이 있었기에 세종은 나라를 다스린 32년간 의료, 음악, 국방, 과학 등 온갖 분야의 업적을 이루었고 당대 최고 수준으로 끌어 올렸다. 세종의 인재 양성은 크게 네 가지로 이루어졌다. 첫째는 교육, 둘째는 기관과 제도를 통한 인재 양성, 셋째는 인재들의 연구를 장려하고 선진 학문을 배워오게 하는 오늘날의 유학과 같은 해외 파견, 넷째 공동 연구나 협동 작업으로 인한 재능 발휘의 극대화였다. 세종은 인재 양성이야말로 국가 발전의 바탕임을 실제 정책을 통해 실천하고 이룬 셈이다. 인재 양성의 가장 기본이 되는 길은 교육이며 이러한 교육의 바탕은 책이고 책의 바탕은 문자다. 세종 때 이르러 각종 학교(향교, 학당) 제도가 크게 정비 되었고 평민 이상이라면 누구나 학교에 들어갈 수 있는 길이 열렸다. 더욱이 책을 매우 좋아하고 그 가치와 효용성을 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