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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한범 교수의 우리음악 이야기

이은관, 영화출연도 하고 서양악기도 연주하다

[국악속풀이 168]

[그린경제/얼레빗=서한범 명예교수]  24세가 되던 해, 황해도 장현 마을의 권번 소리선생을 접고 귀향한 이은관은 앞으로의 소리인생을 어떻게 헤쳐 나가야 할 것인가에 대한 깊은 고민을 끝없이 하다가 서울행을 결심하였다. 제일 먼저 인천의 한 가설극장에 들어갔고 그 곳에서 서울의 유명한 소리꾼 박천복과 한 무대에 서게 되었다. 또한 박천복을 통해 신불출이라는 공연계의 거목을 만나게 되었고 그래서 신불출의 일행이 되었다는 이야기도 하였다.

당시 신불출의 단체에 입사한다는 것은 요즘으로 치면 방송국의 전속 탈렌트나 연예사에 오디숀을 보고 합격한 것이나 다름없을 정도의 행운이었다. 신불출은 이은관의 배뱅이굿을 새롭게 기획하여 서울 종로 4가의 제일극장에 올렸는데, 폭발적적인 인기리에 4일을 연장공연하기에 이르렀고, 그 이후 전국을 돌며 지방공연을 다니기 시작하였다는 이야기 등을 지난주에 소개하였다. 이번 주에는 그 다음의 이야기를 시작해 보도록 한다.  

지방공연이라고 해서 서울에서 경기지방이나 충청지방에 가는 것이 아니다. 전라도에서 함경도까지 전국을 돌며 그것도 그 지역에서 규모가 큰 극장을 빌려 대규모 출연진으로 순회공연을 하는 것이었다. 신불출 선생 하면 당시에는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로 유명한 인물이어서 가는 곳곳마다 아우성이었다. 심지어 관공서에서도 신불출 선생이 오셨다고 하면 최대의 귀빈으로 환영을 할 정도였다고 한다.

청년 이은관은 이 정도의 대단한 연예계 대부를 5년 동안이나 �아 다니며 잔 심부름을 했고 또한 크고 작은 공연의 경험을 쌓아 갔다. 그러다가 1945년 조국의 해방을 맞았다. 국내의 국악인들도 삼삼오오 모임을 갖거나 소그룹을 조직하기 시작하였다. 특히 민속음악계의 거물들은 대한국악원을 창립하였는데, 이은관도 예외 없이 회원으로 가입하였다. 활동을 시작한지 얼마 안 되어 6.25 가 터졌다. 1950년 전쟁으로 인해 모든 연예활동은 군인들을 위한 위로의 공연이 중심이었다.

위문대 민요단에는 장소팔, 고춘자, 이은관 등 3인이 중심이 되어 전국을 유랑하였다. 거의 10여년을 함께 다니며 공연행사를 가진 것이다. 그러니까 1941년 대동아전쟁 때는 신불출 일행과 함께 다니다가 1945년 해방과 더불어 대한 국악원의 민요단원이 되어 장소팔 등과 함께 전국을 돌며 활동을 해왔으며 전쟁 중에는 군 위문공연이 중심이 되었던 것이다.

 

   
 

전쟁이 끝난 후에는 판소리의 스타들이 여성국극단을 만들어 선풍적인 인기를 끌었던 시기이기도 하다. 이 틈 사이에서 이은관을 중심으로 한 배뱅이굿이나 장소팔 등의 만담도 힘겹게 명맥을 유지할 수 있었던 것은 이들의 공연을 기다리던 관객들이 존재했기에 가능한 것이었음은 두말 할 나위가 없는 것이다.

1960년대에 들어서면서 정국은 소용돌이 속으로 빠져 들었다. 60년도에는 학생들의 4.`19 혁명이 있었는가 하면, 61년에는 5. 16 군사혁명이 일어났다. 60년대 초에 문화재 보호법이 만들어졌고 종목별 지정이나 보유자 인정이 시작되었으나 이은관은 곧 바로 서도소리의 문화재 지정이나 배배이굿의 예능보유자가 되지 못하였다. 확실한 원인은 모르겠으나 소리의 실력은 갖추고 있었지만, 후진들을 지도하고 전승하는 일에는 신경을 쓰지 않고 대중의 인기에 영합하여 만담이나 쑈 공연에 진력하고 있다는 점이 원인이라고 전해진다.

그도 그럴 것이 공연 외에 이은관은 60년대 영화의 주인공으로도 활약하였다. 고려영화사에서 기획한 배뱅이굿이라는 영화에 박수무당 역을 맡아 당시 복혜숙이나 정애란 등과 같은 유명 배우들과 함께 영화에 출연한 것이다. 또한 때를 같이하여 배뱅이굿의 레코드판도 세상에 내 놓았다. 배뱅이굿의 영화와 음반이 동시에 나가는 바람에 이은관의 이름이 세상에 본격적으로 알려지기 시작한 것이다. 영화의 흥행도 괜찮았다는 후문이었다. 당시에 히트를 친 한국 영화로는‘배뱅이굿’이전에‘자유만세’‘망나니 비서’‘시집가는 날’등이었다고 한다. 곧 이어 칼라 영화의 전성시대가 이어지다가 TV가 확산되면서 영화의 손님이 줄어들기 시작했다.

이은관은 작고하기 얼마 전까지도 섹스폰이나 아코디언과 같은 서양악기를 무대 위에서 연주하곤 하였다. 어떻게 그런 악기를 다루게 되었는가에 대해 “어려서부터 좋아했으나 정식으로 배운 건 아니다. 장소팔과 단체 다닐 적에 양악을 하는 악사도 있어서 그들에게 배웠고 한양 합주도 같이 했다. 뿐만 아니라 피리와 같은 악기도 이병우 선생에게 배웠다”고 술회한 적이 있다.

이러한 악기들은 악보 없이 배우기가 어려운 것이다. 기실 민속 음악인들 중에서 악보를 읽을 수 있는 사람들이 흔치 않은 상황에서 이은관 명창이 서양의 악보를 익혔다고 하는 사실은 그의 음악적 욕구나 역량을 충분히 짐작할 수 있는 대목이기도 한 것이다. (다음주에 계속)

 

   
▲ 무대에서 섹소폰도 종종 불었던 이은관 명인

 

단국대학교 국악과 교수
한국 전통음악학회 회장
전통음악진흥연구소 소장
충청남도·경상북도 문화재 위원
한중 학술 및 실연교류회 한국측 대표
UCLA. Korean Music Symposium 대표

누리편지 suhilkwan@hanmail.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