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린경제/얼레빗=서한범 명예교수] 서도소리와 배뱅이굿은 황해도 황주에서 이인수 선생께 배웠고, 서울 경기의 소리들은 서울에 와서 최경식 선생에게 배웠다는 점, 이은관은 전통사회의 소리꾼 중에서는 드물게 서양의 5선 악보를 볼 수 있는 소리꾼이었다는 점, 그가 5선보를 보게 된 직접적인 원인이나 계기는 6. 25전쟁과 깊은 관련이 있는데, 이북 사람들이 넘어와서 남쪽 연예인들을 포섭하여 연예단을 만들고 군가나 사상적인 노래를 가르치기 위해 악보를 복사해 왔을 때, 한 여성이 악보를 보고 그 자리에서 노래 부르는 장면을 목격하고 악보 배우기를 결심을 하였다는 점, 그래서 이병우나 형석희 씨, 그리고 연예단에 소속되어 있던 양악 악사와 성악을 전공하던 여학생, 피아노를 치던 여학생 등에게 시간이 나는 대로 배우고 익히게 되었다는 이야기 등을 하였다.
그 다음 이야기를 이어가도록 한다.
뾰족당, 즉 명동성당에 숨어서 여러 명이 연습을 하고 있었다. 북쪽과 남쪽의 음악인들이 함께 단체 안에 소속되어 있었으나 연예단의 이름은 특별히 짓지 않았다. 주로 성당 내에 있으면서 연습을 하고 행사를 준비하고 그랬던 원인은 유엔군이 예배당은 절대 폭격을 안 하기 때문이라는 이유였다. 명동 성당 안에 있었기에 대부분의 음악인들이 변고를 당하지 않았다는 이야기가 거짓이 아닌 것이다.
6,25때에도 좋아하던 소리를 하면서 보냈다고 하는 면에서 이은관 명창의 인생은 참으로 파란 만장하다는 이야기가 실감이 난다. 소리를 하며 사는 사람이었기에 대동아 전쟁 때에는 징용을 나가지 않았다. 그러나 일본 정부에서 만든 위문단에 소속되어 이리 저리 다니다가 죽을 고비를 여러번 넘겼다. 뿐만 아니라 6.25때는 순천서 폭격을 맞기도 했으나 요행이 살아나기도 했다.
그는 50년대 이후, 주로 무대 위에서의 공연활동을 하느라 제자 키울 생각은 미처 하지 못 했던 것이다. 아니 장소팔, 고춘자, 기타 대중가수나 코미니언 등과 공연을 다니다 보니 한 자리에 앉아 제자를 기를 시간이 없었다고 해야 옳다. 그만큼 공연이 많았고, 그 공연에 이은관이 빠지면 안 될 정도로 인기가 오른 것이다.
그의 인기를 짐작할 수 있는 활약 중의 하나가 국악인으로서는 흔치 않게 제2회 아세아 영화제에 참석하였다는 사실이다. 그가 참석하게 된 배경은 그의 인기도 대단했지만, 때마침 배뱅이굿 영화를 찍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당시의 유명했던 영화배우들, 예를 들면 김승호, 최남현, 황정순 등과 인기연예인들이었던 황금순, 후라이 보이, 백설희 등과 이은관이 함께 참석을 하게 된 것이다.
이은관은 연기를 하는 영화배우의 자격보다는 공연 쪽에 인기가 있을 시절이어서 위문도 겸해서 공연차 참석하게 된 것이다. 그 이후에도 그는 일본을 50여회, 미국 7회, 월남 전쟁 때에는 월남 위문 공연을 4회나 다닐 정도로 국내외의 공연에 이은관의 이름은 빠지지 않았던 것이다. 그만큼 그의 배뱅이굿은 유명했던 것이다.
현재 한국의 7~80대 노년층으로 배뱅이굿을 모르는 사람도 없을 뿐더러 배뱅이굿을 부르는 사람이 이은관이란 사실, 이은관이 부르는 소리가 바로 ‘배뱅이굿’이라는 사실을 모르는 사람은 아마도 없을 것이다. 이렇듯 그는 소리판이나 국내외의 크고 작은 무대, 영화와 쑈 공연 등에 인기인으로 활발하게 참여하였던 것이다.
1964년도에는 문화재법이 제정되어 소리나 춤, 공예분야의 장인들에게 무형문화재 보유자를 인정하기 시작하였다. 서도소리 분야는 국가중요 무형문화재 제29호로 장학선이 인정되었으나, 작고 후에는 김정연과 오복녀 두 명창이 인정되었다. 이은관은 논의조차 되지 않을 정도였다. 그만큼 그는 문화재에 관한 관심도 없이 오직 공연으로 나날을 보냈다고 하는 점이 큰 원인이며 다른 하나는 그가 스승으로부터 전수받은 내용을 임의로 바꾸어 일반대중들의 기호에 맞게 변화시켜 부르고 있다는 이유도 포함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러다가 1984년도에 이은관도 국가가 인정하는 중요문화재로 인정을 받게 되었다. 같은 종목이었던 서도소리의 김정연이나 오복녀에 비하면 한 10여년 뒤가 된 셈이고 다른 종목의 동년배 보유자에 비한다 해도 매우 늦게 된 셈이다.
문화재 인정을 받은 후에는 지방 공연도 자제하게 되었고, 제자 양성에 심혈을 기울이기 시작했다. 사실 국가가 중요한 문화재를 지정하고, 세칭 인간문화재라고 부르는 예능보유자를 인정하는 이유는 과거로부터 전래하는 전통의 문화유산을 충실하게 지켜나가고 후계자를 선발하여 올바르게 전승시켜야 하는 목적이 큰 것이다.
이은관 명창도 그 취지를 너무도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 학원을 세우고 젊은 소리꾼들을 모아 서도소리며 배뱅이굿을 지도하기 시작한 것이다. 그러면서 신민요나 창작 민요 등을 작곡하거나 작사도 하였으며 채보도 직접 하는 등 활발한 창작민요 작업을 하기 시작하였다. 그가 펴낸 《가창총보》가 그의 창작활동을 잘 말해 주고 있다.
(다음주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