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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롭게 보는 한국경제 거목 정주영

"20세기 최대의 공사 주베일항(港) 공사를 수주하라"

새롭게 보는 한국경제 거목 정주영(1915~2001)] ⑭

[그린경제=김영조 기자] 겨우 일어선 현대조선이 쓰러질 수도 있는 위기였다. 그러자 정주영은 다른 위기에서 그랬듯이 또 다시 역발상을 한다. “그까짓 거 만들어 놓은 배를 가져가지 않으면, 우리가 그 배로 직접 사업을 하자.” 무수히 시련을 당했던 정주영. 그러나 그때마다 남들이 생각하지 못하는 톡톡 튀는 기발한 생각으로 헤쳐 나오던 그였다. 정주영은 1976년 3월 골칫거리였던 해약당한 초대형 유조선 3척으로 아세아상선을 설립해 해운업에 나섰다. 우리나라에 수입해 쓰는 기름을 우리가 우리 유조선으로 운반하겠다는 생각이었다. 그동안은 남의 나라 배로 기름을 실어올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그러나 어떤 사업이든지 그에게 호락호락한 것은 없었다. 그동안 우리나라에 기름을 실어 날랐던 외국 선박회사들은 수송권을 넘겨주는 조건으로 1400만 달러를 달라고 했다. 그야말로 칼만 안든 강도였다. “그동안 우리나라에 유조선이 없어 자기네 배를 돈 주고 빌려 썼지만 이제 배가 생겼는데 당연히 우리 배로 실어 날라야 하는 것 아닌가?

이제부턴 우리나라 배로 우리나라 기름을 운반해 쓸 것이므로 그에 다른 조건이 있을 수 없다.”며 거절했다. 버티던 아세아상선은 결국 그들에게 돈 한 푼 건네지 않고 기름을 운송할 수 있었다. 그렇게 출발했던 아세아상선은 지금 현대상선이 되었고, 오일쇼크로 힘들었던 현대조선은 요즘 세계 최대의 조선회사가 되었다. 

그러나 73년 1차 오일쇼크가 시작되고 2년도 채 안 되는 사이 배럴 당 1달러 75센트 하던 원유 값이 10달러로 무려 다섯 배나 뛰었다. 원유를 수입해서 쓰던 우리나라 경제는 휘청거렸을 뿐만 아니라 심각한 인플레이션 현상과 외국 빚 상환 독촉으로 부도직전에 몰렸다. 그러니 당연히 국내 기업들도 허덕일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정주영은 나라밖으로 눈길을 돌렸다.

세계의 돈이 기름을 파는 중동으로 중동으로만 몰리고 있었다. 그 중동의 돈을 다시 빼내오지 않으면 이 위기를 극복할 수 없다고 생각한 것이다. 그 때 들려온 정보는 사우디아라비아가 원유로 굴러오는 돈을 ‘주베일 산업항 신항 건설’에 투자하기로 했다는 것이었다. 주베일은 사우디 동부 유전지대였다. 그곳에 산업항을 건설하여 주베일 지역에서 나오는 원유를 수송하고 그 지역 산업시설과 함께 거대한 산업도시를 꿈꾸는 것이었다.

공사금액이 무려 9억3000만 달러가 넘는 당시 환율로 따져 우리 돈으로 4600억 원 정도가 되어 그해 우리나라 예산의 거의 반에 해당할 정도였다. 이번 공사는 몇 세기에 한 번 있을까 말까 한 공사로 20세기 최대의 역사라 했다. 사우디아라비아 항만청이 발주를 한 이 공사 정보가 정주영의 귀에 들어온 것은 입찰일을 겨우 7달을 남긴 시점이었다.

 

   
▲ 그림 이무성 한국화가

그러나 문제는 해외건설 얘기가 나오자마자 해외건설 담당 부사장이었던 아우 정인영이 펄쩍펄쩍 뛰었고, 많은 반대자들이 나왔다. 그들은 공사 규모나 경험과 공법에서나 현대건설이 도전하는 그 자체가 회사의 사망선고라면서 반대했다. 하지만 늘 반대 속에서 그를 뚫고 성공해온 정주영 아니던가? 결국 아우 인영을 새로 차린 중장비회사에 보내고, 반대하는 사람들을 모두 정리한 뒤 자신이 직접 중동 공사수주를 담당하여 총지휘했다.  

입찰 자격도 안 되는 현대건설, 입찰열차에 동승할 수 있을까? 문제는 “7달 만에 입찰에 성공할 수 있을 것이냐?”였다. 그 당시 현대건설은 그런 엄청난 항만공사를 해 본 적도 없지만 끼어들 자격조차도 안 되었다. 당시 선진국의 손꼽히는 건설업체들은 이미 몇 년 전부터 공사수주를 위해 치열한 작전을 펼치고 있던 상태였다.

그해 12월 공사 주관부처인 사우디체신청이 윌리엄 할크로 기술용역회사에 공사 입찰에 참가할 10개 회사 선정 작업을 의뢰했다. 그때 세계적인 명성을 얻고 있던 미국, 영국, 서독 등 9개 기업은 이미 입찰 초청을 받았다. 일본의 대건설사들도 끼지 못한 대열에 나머지 한 개를 놓고 인지도가 낮은 현대건설이 바늘구멍 뚫듯 들어가야만 했다.

정주영은 런던지사 음용기 이사에게 마지막 한 장 입찰 승차권을 따오라는 특명을 내렸다. 음 이사는 영국에 있는 윌리엄 할크로에게 이런 제안을 했다. “우리는 지난 10월 바레인 아스리 수리조선소에 1달 만에 첫발을 내딛었다. 우리의 순발력을 얘기하는 것이다. 또 주베일의 해군기지 공사를 하고 있다. 특히 얼마 전 우리는 당신네 영국이 도운 덕분에 단일 조선소로는 세계 으뜸의 울산조선소를 최단기에 건설해냈다. 그것이 우리의 능력이 어느 정도인지 분명하게 말해주고 있지 않은가?”

이런 설득에 조선소 건설 때 인연을 맺은 애플 도어와 바클레이즈은행의 정보자료가 더하여 윌리엄 할크로는 사우디체신청에 현대건설의 입찰자격 제의를 했고, 체신청은 이를 받아들여 드디어 현대건설은 세계 최고의 건설사들과 함께 입찰 대열에 나란히 설 수 있었다.  

그러나 입찰자격이 전부가 아니었다. 막상 입찰하려면 보증이 있어야 했다. 그런데 당시 신용도가 낮은 대한민국 정부가 보증을 서는 것으로는 안 되었다. 신용도가 높은 국가 보증서가 있거나 세계적인 은행의 보증서를 가져가야 될까 말까 했다. 그래서 16㎜ 필름에 현대그룹의 시멘트 공장, 자동차 공장, 조선소 자료를 모두 찍어서 은행마다 찾아다니며 필름을 돌려서 보여주고 보증서를 끊어 달라고 통사정을 했다. 문제는 입찰정보를 비밀로 해주면서 2000만 달러라는 거액의 보증서를 쉽게 떼어줄 리는 만무했다.

그래서 바레인 아스리 수리조선소 공사로 거래를 하고 있던 바레인국립은행에 지원을 요청했다. 이때 선뜻 보증을 서주겠다고 했던 바레인국립은행은 자본금 1500만 달러를 넘는 보증서는 끊어줄 수가 없었다. 어찌 쉽게 풀린다 했는데 그게 아니었다. 그래서 바레인 국립은행이 바레인의 후견인 격이었던 사우디의 국립상업은행에 부탁했다. 사우디의 국립상업은행은 바레인 국립은행이 미국 은행에 1000만 달러의 보증금을 예치하는 조건으로 겨우 보증서를 발급해 주었다.  

정주영은 어렵게 입찰자격을 딴 이상 입찰에서도 만세를 불러야 했다. 그래서 입찰금액을 12억 달러로 계산하고 그 금액에서 25%를 깎았다가 그래도 안심이 안 되자 다시 5%를 더 깎아 8억7000만 달러에 응찰하기로 결정했다. 중역들이 지나치게 낮은 금액이라며 말렸지만 정주영은 낙찰 받으려면 10~20%에 매달리면 안 된다고 고집을 부렸다. 그런데 투찰실에 들어갔다 나온 전갑원 상무의 표정이 묘했다. 

“입찰금액을 잘 못 쓴 거야? 왜 표정이 그래? 내가 쓰라는 대로 제대로 썼지?” 

“그대로 안 썼습니다. 입찰금액이 너무 싸 6000달러를 더 얹어 쓰고 나왔습니다. 실패하면 걸프만에 빠져 죽겠습니다.” 

상상할 수 없는 일이 일어났다. 최고경영자의 지시를 어기고 입찰금액을 쓰다니 기가 막힐 노릇이었다. 그러나 이미 엎질러진 물이었다. 호흡이 멈춰질 정도로 초조하게 기다리던 정주영과 중역들은 “9억3114만 달러로 현대에 낙찰됐다. 모든 서류는 완벽하다. 특히 우리는 현대가 조건 없이 공기를 4달이나 단축시키겠다는 제의에 감명 받았다.”는 말을 들었다. 정주영은 자신의 귀를 의심했다. 사실은 있을 수 없는 기적이 일어난 것인지도 모른다. 인지도도 없는데다가 신용도 낮은 한국의 기업이 세기의 공사를 따내다니……. 

그러나 낙찰을 받고도 쉽게 계약을 할 수 없었다. 입찰에 실패한 기업들 쪽 에이전트들이 왕족들을 동원해 온갖 훼방을 부리고 다닌 탓이었다. “그 돈으로는 절대 공사를 할 수 없다. 후진국 한국의 현대는 기술・자본・경험이 모두 수준 이하다. 현대는 해양공사 경험이 전혀 없다.”라는 재를 뿌리는 말들이 들려오기 시작했다. 과연 현대는 ‘주베일 산업항 신항 건설’을 할 수나 있을 것인가?(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