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린경제/얼레빗=서한범 명예교수] 배뱅이굿이 어느 지방의 소리이고 어떤 내용을 담고 있는가를 확실하게 알려주고 이은관 명창은 우리곁을 떠나갔다. 그를 뛰어넘는 제자는 차치하고라도 이은관 정도의 제자라도 나와야 배뱅이굿이 앞으로도 대중의 사랑을 받을 것인데, 이점 또한 심각한 문제로 지적되고 있다. 지난 주까지 무대공연을 비롯하여 음반제작, 라디오 방송이나 TV, 영화출연, 해외 공연, 전수교육, 신민요의 작사 작곡, 창작 소리극의 제작, 등 개략적이긴 하나 이은관의 활동상황을 짚어 보았다.
우리가 국악인 중에 가장 오래도록 인기를 누린 대표적인 분으로 이은관을 꼽는데 주저하지 않는 까닭 가운데 하나는 이은관 선생이야말로 진정 서도소리를 사랑한 명창이기 때문이다. 그의 스승 김인수도 그랬고, 많은 서도소리꾼들이 그랬던 것처럼 서도소리 속에 들어있는 남도소리를 그는 대부분 서도소리로 고쳐 불렀던 것이다.
서도소리는 서도의 창법으로 불러야 한다고 주장해 왔고, 앞으로도 서도소리제로 아이들에게 가르쳐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여 왔던 것이다. 그 결과 이제 서도소리는 경기소리의 한 변방이 아니란 점도 확실하게 인식시켜 놓은 것이다.
평생을 배뱅이굿과 함께 해오면서 “부모님께서 선천적으로 목소리를 주셨고, 자신이 소리가 좋아 해 왔다는 점, 관중의 호응이 없을 때에도 내가 못해 그러려니 생각을 했다.”는 말에서 그의 진솔한 인간미를 느끼게 된다.
이은관 선생과 생전에 나누었던 대화 중 인상에 남는 이야기를 소개해 보도록 하겠다. <배뱅이굿> 하면 이은관이고, <이은관> 하면 곧 배뱅이굿이다. 아마도 이러한 등식은 영원히 깨지지 않을 것으로 보인다. 선생이 이토록 건강한 모습으로 오랜 세월 지존의 자리를 지켜 온 저력은 무엇일까?
무엇보다도 선생은 목(성대)을 타고 났고 그리고 후천적 노력에 의한 음악성이 남다르다는 점이다. 누구도 따르지 못하는 높고 맑은 목청은 고저(高低)를 자유롭게 왕래하며 관객의 가슴을 시원하게 풀어 주었다. 그 위에 정성을 다한 소리는 관객을 강하게 흡인(吸引)하는 힘을 지니고 있는 것이다.
▲ 김뻐꾹 선생(오른쪽)과 함께 공연중인 이은관 명인
이러한 음악적 요인 외에도 선생은 규칙적인 생활로 건강을 지켰으며, 상대의 조언에 경청하는 겸손한 마음가짐의 소유자라는 점도 그를 지존의 자리에 오래도록 머물게 했던 원인이라 하겠다. 몇 년전 문화타임즈라는 신문의 편집자문을 맡고 있을 때였다. 마침 <배뱅이굿> 공연을 앞두고 열심히 준비중이었던 이은관 명창을 만나 인터뷰를 진행할 당시의 이야기이다.
서한범-“선생님, 배뱅이굿 속에 3정승이 각각 딸을 낳았는데, 신수가 불길한 탓인지 한 집은 딸을 낳고, 한 집은 계집아이, 또 한 집은 여자아이를 낳게 되었다는 내용이 나오고 있습니다. <신수가 불길하다>는 대사는 지금 시대에는 맞지 않는 여성비하의 내용인데 앞으로도 계속 그대로 부르실 겁니까?
이은관- 듣고 보니 그도 그렇네요.
서한범- 제 생각은요. 객석의 절반이상이 여성이니 이 대목을 차라리‘신수가 대통하여’로 바꾸면 좋겠네요. 선생께서는 고쳐 부르실 의향은 없으신지?
이은관-“아, 그거 좋겠네요. 당장 고치겠습니다.”
그러면서 전통이라고 해서 시대에 맞지 않는 부분을 고집하고 싶지 않다며 당장 고쳐 부르겠다고 약속하던 말씀이 기억난다.
또 한번은 이은관의 제자 박정욱 군이 대학로 문예회관에서 3일 동안 발표공연을 할 때의 일이다. 격려사 요청을 받고 극장에 갔었는데, 마침 발표 중간에 스승 이은관 선생을 모셔 특별무대 한 코너를 마련했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은관 명창이 무대에서 장고를 돌리는 기교를 보여주겠다며 열심히 연습하는 모습을 보고 박정욱군이 놀래서 나에게 뛰어와 난색을 하며 만류를 요청하는 것이었다.
나는 조심스럽게 배뱅이굿을 즐겨 하는 청중이 예전에 비하면 훨씬 젊어진 학생층이란 점, 그들에겐 장고를 돌린다는 자체가 이해되지 않을 것이란 점, 장고라는 악기는 성악이나 기악의 반주악기인데, 이 악기로 음악을 연주하지 않고 기교의 도구로 쓰거나 재주를 보인다는 점은 국악의 인식을 바꾸는데 별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점 등을 들어 간곡하게 만류의사를 전달하였다.
명창이 장고를 돌리던, 접시를 돌리던, 내가 나설 일은 아니었으나, 무대에서 장고를 돌린다는 것은 우리의 타악기를 마치 한낱 도구로 생각하게 만든다는 점을 지적하고자 한 것이었다. 옛날 시골 무대에서는 굉장한 인기를 끌었다고 하나 지금의 서울 무대에서는 통할 리 만무였기에 나는 분에 넘치는 만류를 조심스럽게 그러나 강력하게 시도한 것이다. (다음 주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