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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롭게 보는 한국경제 거목 정주영

미국에 첫발, 천국과 지옥을 맛보다

새롭게 보는 한국경제 거목 정주영(1915~2001) ⑳

[그린경제/얼레빗=김영조 기자]  자, 이제 미국이다. 자동차의 본고장 철옹성 미국에 상륙하기 위해서 캐나다로 돌아간 현대자동차. 1985년 1월 샌프란시스코 대리점 컨벤션 기간 중에는 무려 3000여 개나 되는 미국 내 유명 대리점이 앞 다투어 방문해 현대만을 위한 잔치가 될 정도였다. 현대가 이렇게 미국에서 첫 대면이 성공적이었던 것은 이웃 캐나다에서의 “포니 돌풍”이 미국 언론을 통해 속속들이 알려진 덕분이었다. 

1985년 4월 드디어 미국 LA에 600만 달러를 투자하여 현지법인 “Hyundai Motor America”를 설립했다. 미국에서 현대 포니의 인기가 올라가자 언론들도 덩달아 흥분했다. 뉴스위크지 85년 10월호는 “한국이 온다(Koreans coming)”라는 제목의 표지 특집으로 ‘포니 엑셀’을 크게 소개했다.  

현대는 1986년 GM, 포드, 클라이슬러가 버티고 있는 미국땅 플로리다주 잭슨빌항에 포니 1호차를 처음 내려놓았다. 그리곤 1년 만에 20만대의 판매실적을 내놓았다. 미국 환경보호청이 발표한 “86년 미국 내 자동차판매 베스트10”에 들기까지 했다. 계속해서 1987년 26만대, 1988년에는 30만대, 그리고 1990년에는 미국 현지 판매 100만대를 돌파하며 “포니 돌풍”을 넘어 “포니 신화”를 만들었다는 평가를 받았다. 

그러나 현대자동차의 이런 성공은 쉽게 얻어진 것은 아니었다. 현대는 미국에 수출하기 이전 철저한 시장조사를 했다. 또 정비사들에 대한 훈련에 정성을 쏟아 애프터서비스에 빈틈없이 준비했다. 그뿐만 아니라 엄격한 미국공해규정과 안전규정을 통과하기 위해 8달 동안 포니로 미국 곳곳을 돌며 생기는 문제점을 철저히 보완해 86년 1월 미국 환경보전국으로부터 합격인증서를 받아냈다. 이러한 노력이 튼실한 열매를 맺게 한 것이었다.

 

   
▲ 그림 이무성 한국화가

그리고 또 다른 배경으로 2차 오일쇼크 이후 기름을 적게 먹는 소형차를 사기 시작한 미국 소비자들의 구매 성향변화도 큰 몫을 했다. 또 미국 행정부가 일본자동차에 쿼터제를 적용한 탓에 일본의 자동차들이 소형차가 아닌 중형 시장에 집중하는 동안 현대자동차는 '작고 싸면서도 넓은' 포니를 앞세워 소형차 시장을 장악할 수 있었다. 더구나 미국에 먼저 상륙한 일본 자동차들은 엔화 강세로 이중 고전을 면치 못한 탓도 작용했다. 
 

브레이크 패드 결함에 따른 리콜 

그러나 현대는 후발주자로 먼저 상륙한 일본 자동차들과의 경쟁에서 무려 5000달러라는 저가 공세를 편 탓에 “아시아에서 만든 싼 차”라는 불명예스러운 낙인이 붙기 시작했다. 더구나 브레이크 패드 결함에 따른 리콜이 대대적으로 보도되고, 1986년~1988년 기간 중 미국 내 수입자동차들의 품질과 애프터서비스 조사에서 얻은 부정적인 결과는 미국 소비자들에게 좋지 않은 이이미를 심어주는 계기가 되었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일본의 엔화가 약세로 돌아서서 일본 자동차와의 가격경쟁력에서 밀리기 시작했다. 설상가상이었다. 이후 포니는 미국시장에서 끝없는 추락을 당해야 했다. 

심지어 1899년 미국 언론들은 당시 유고슬라비아가 만들어 미국 시장에 판매하던 최하위 모델 “유고(Yugo)”와 비슷하다며 깎아내리기 바빴다. 포니의 성공으로 기고만장 했던 현대는 고개를 숙여야 했다. 정말 미국은 쉽게 공략할 수 없는 철옹성이 분명했다. 달콤한 시작이었지만 그 달콤함이 삼엄한 미국 시장에서 오래가지 못한 것이었다. 어쩌면 이 사태는 정주영의 성공가도에서 처음 생긴 불명예스러운 혹이었는지도 모른다. 
 

실패를 모르던 현대 다시 일어서다 

그러나 정주영의 현대가 그렇게 쓰러질 허약한 기업은 아니었다. 좌절을 맛보면서도 끊임없는 제품개발에 몰두했고, 미쓰비시를 응용했던 엔진도 1991년 국내 최초로 “α엔진”을 개발, 100% 국산화를 통한 기술독립을 이루었다. 그보다 더 미국에서 영광을 다시 찾기 위한 노력은 1998년 “10년・10만 마일 워런티”제도에 있었다. “2년・2만4000마일 워런티”가 일반적이었을 때였으니 가히 혁명적이랄 수 있었다. 이에 나라안팎에서는 “얼마나 내놓을 것이 없으면 그럴까?”, “그렇게 긴 시간 보증수리하다니 현대가 망하는 것은 시간문제네.”라는 비아냥거림도 들었다.  

그러나 합리적인 미국 소비자들은 이에 호응했다. 품질에 자신 있다는 신호로 받아들인 것이다. 이 전략 덕분에 1998년 9만 대에 불과하던 현대의 미국시장 판매실적은 1999년 16만 대, 2000년 24만 대, 2001년 34만 대로 3년 만에 380%란 엄청난 증가세를 보였다. 

또 현대가 미국시장에서 고전을 면치 못하고 있을 때도 국내에서는 국민의 성원 속에 승승장구했다. 1988년에 출시한 소나타가 인기를 끌면서 1989년에는 자동차 생산대수가 100만 대를 넘어섰다. 1990년에는 전주공장, 1995년에는 아산공장을 세워 다양한 모델을 출시했다. 그런가 하면 1996년 세계 자동차업체 가운데 가장 짧은 기간 안에 1000만 대 생산을 돌파했다. 그뿐만 아니라 1996년 나라밖 시장 처음으로 터키에 자동차공장이 준공되고, 1998년에는 인도에도 현지 공장을 세웠다.  

거기서 끝이 아니었다. 현대자동차는 외환위기 와중에서 오히려 당시 최대 경쟁업체였던 기아자동차를 인수하기에 이른다. 2000년대에 들어와서는 글로벌 100대 브랜드 진입, 해외 시장 확대로 인한 2006년 현대차 그룹 매출 100조 시대를 여는 등 글로벌 기업으로 성장하고 있다. 최근에는 규모로 보았을 때 현대자동차는 세계 5대 자동차업체 가운데 들어간다는 평가도 받는다. 

1966년 현대자동차가 닻을 올리고 1967년 처음 미국 포드사 모델 “코티나”를 조립 생산했고, 1974년 독자적인 모델 “포니”를 출시했던 현대는 이제 당당한 세계적 자동차회사로 굳건히 서있다. 그러나 정주영이 자동차산업을 시작하기 이전 미국은 현대에게 자동차 산업을 포기하라고 압력을 넣었다.  

1977년 5월, 조선호텔의 한 객실에서 현대가 진행하던 국산 자동차 1호 ‘포니’의 개발을 포기하라는 리처드 스나이더 주한 미국대사의 압력에 정주영은 답했다. "대한민국의 길이 사람으로 따지면 핏줄이고 그 위를 달리는 자동차는 핏줄을 통해 지나가는 피와 같은데 우리 핏줄에 남의 나라 피를 달리게 할 수는 없습니다.”  

정주영은 눈 하나 깜짝하지 않은 채 세계 최대 강국의 대사 앞에서 당당하게 말을 이어나갔다. “제 생각과 계산이 잘못되었을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제가 그동안 건설에서 번 돈을 모두 쏟아 붓고 실패한다 하더라도 저는 결코 후회하지 않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이것이 밑거름이 되어 우리나라 자동차 산업이 자리를 잡을 수만 있게 된다면 나로서는 그보다 더한 보람은 없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당시 두 사람의 통역을 맡았던 박정웅 전경련 상무는 “통역이 끝났는데도 한동안 말을 잇지 못하는 스나이더 대사의 표정은 참담하기까지 했다.”고 회고했다. 미국의 압력을 쉽게 거스를 수 없는 한국의 기업의 수장으로서 단호하게 압력을 뿌리쳤던 정주영이 바로 오늘의 현대자동차를 있게 한 주춧돌이었을 게다. 그뿐만 아니라 그의 생각대로 자동차산업은 전자공업, 통신기술, 신소재, 기계공업에서 금융과 보험산업까지 닿는 연관효과를 가진 우리 경제의 심장이 된 것 아닌가? 

물론 정주영 혼자서 포니를 만든 것은 절대로 아니다. “포니정”이란 별명까지 얻었던 동생 정세영은 물론 청춘을 바치고 피땀 흘려 자동차에 열정을 바친 노동자들이 없었다면 지금의 현대자동차는 없었다고 해야 한다. 하지만 어떻게든 한국 고유독자 모델을 만들어 보겠다는 뚝심을 발휘하고, 미국 대사와의 독대에서도 기가 죽지 않았던 정주영은 돈벌이에 급급한 여타 자본가들과는 견줄 수 없는 돈벌이만을 생각한 그저 그렇고 그런 자본가는 아니란 얘기이다. 그래서 정주영 그는 오늘의 대한민국을 있게 한 일등공신의 하나라고 해야 하지 않을까?  

자동차를 본고장 미국에 수출한 정주영은 작은 땅덩어리 한국의 지도를 다시 그리게 할 엄청난 사업을 시작한다. 이제 바다를 메워 옥토로 만드는 대형 국책사업을 실천에 옮기는 것이다. 그러나 그동안의 사업들과 달리 전혀 다른 성격의 서산간척지 사업을 어떻게 해낼 것인가?(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