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린경제/얼레빗=김영조 기자] 자동차 수리공장을 하던 정주영은 어느 날 자동차 수리비를 받으러 관청에 갔다가 자신은 자동차 수리비로 고작 몇 백 원을 받아 가는데, 건설업자들은 건설 공사비로 몇 만원을 받아가는 것을 보고 건설업을 하기로 결심했다. 그러나 함께 사업을 하는 친구는 물론 식구들도 팔짝 뛰었다.
“안 됩니다. 건설업을 하려면 한두 푼이 들어가는 것도 아닌데 그럴 만 한 돈도 없고, 더구나 경험도 없는 상태로 시작한다면 섶을 지고 불속으로 들어가는 일일 것입니다. 그동안 어렵게 일구어놓은 것마저 무너집니다.”
“건설공사나 토목공사는 자동차 수리처럼 단기간에 끝낼 수 있는 것이 아니고 어떤 공사는 일 년도 걸리고 삼년도 걸리는데다가 요즘은 자고나면 물가가 오르니 섣불리 공사를 맡았다간 단박에 망해요.”
그러나 주위가 모두 반대해도 자신의 뜻을 굽힐 정주영은 아니었다.
정주영이 조선소를 하려고 할 때도 역시 그랬다. 반대하는 이들의 논리는 한결 같았다. 몇 백 톤짜리 나무배만 만들던 보잘 것 없는 기술만 가진 우리나라에서 더구나 배는 만들어 본 적조차 없고 오로지 건설만 해오던 현대건설이 큰 바다에 띄울 거대한 배를 만들 수는 없다는 거였다. 그러나 정주영은 “조선이란 것이 철판을 잘라 용접하고, 엔진을 올려놓고 하는 일 아닌가? 우리가 현장에서 늘 하던 일인데 못 할게 뭐 있나?”라고 생각했다.
또 정주영이 본격적인 자동차제조업을 하려고 했을 때도 마찬가지였다. 반대하는 사람들은 “자기자본금의 20~30배나 되는 돈이 필요한데, 그 돈을 어디에서 빌릴 것인가?”와 “돈을 빌릴 수 있다 치더라도 언제 세계 시장에 차를 팔아 수익을 챙겨 그 돈을 갚을 수 있을까?” 등의 논리를 내세웠다. 그보다 좀 더 구체적인 반발도 있었다. “최소한 5만대는 팔아야 하는데, 1972년 국내 자동차 판매대수는 승용차와 버스와 트럭을 다 합해 봐야 겨우 1만 8000대를 넘길 정도다. 이 가운데 현대는 4000여 대에 지나지 않는다. 수출하기 전에는 내수로 버텨야 하는데, 이 정도 밖에 안 돼서는 생존이 불가능하다.” 이런 논리에도 정주영은 우리나라 최초의 독자적 자동차 제1호인 ‘포니’를 출시해 폭발적 인기를 끌었다.
그렇게 반대를 받을 때마다 정주영이 입버릇처럼 하는 말이 있었다. 훗날 정주영의 명언으로 손꼽힌 “이봐, 해보기나 했어?”가 바로 그것이었다. 또 행동하면서 고민하는 스타일이었던 정주영은 브리핑하는 사람에게 늘 “이봐, 알았으니까 결론부터 얘기해봐.”라고 요구하곤 했다. 두괄식으로 보고하되, 긍정적으로 결론을 내라는 것이다. 정주영은 여간해서 안 되는 일은 수용하지 않았다. 해보고 안 된다고 하는 것인지, 머릿속에서 안 된다고 하는 것인지 물어보는 말임과 동시에 하면 된다는 일종의 지시이기도 했다. 도전해보지도 않고 지레 포기하는 사람과는 같이 사업을 할 수 없다는 것이 그의 소신이었다.
이런 정주영의 진가를 보여준 사건이 또 하나 있었다. 고사에 고사를 거듭했던 정주영은 1977년 2월 전국경제인연합회(이하 전경련) 회장이 되었다. 그런데 전경련이 그를 만장일치로 회장에 추대한 까닭은 전경련의 오랜 숙원사업이었던 전경련 회관을 완성할만한 추진력이 강한 지도자를 모시고 싶었던 것이었다. 이때 전경련은 남산 밑에 있었는데 전경련의 위상에 걸맞은 번듯한 20층의 회관을 지으려고 했다. 웬만한 대기업 본사 건물들도 모두 10층 정도인 현실에서 국내 최대의 경제단체인 전경련이 적어도 20층은 되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어떤 수를 써도 건축허가가 나지 않았다. 그 까닭은 20층 건물이 들어서면 남산 중턱에 자리 잡은 포대의 사계(射界)를 가린다는 이유 때문이었다. 남산의 포대는 수도 서울의 항공방위를 위한 중요한 군사시설이었기에 건축허가가 날 리 만무했다. 새로 회장이 된 정주영에게 담당자는 조목조목 공사가 이루어질 수 없는 이유를 댔다.
“회장님 부지를 바꾸든지, 층수를 10층으로 낮추든지 하는 방법 밖에는 도리가 없는 것 같습니다. 워낙 정부의 반대가 심해서 어찌할 수가 없습니다.”
그러자 정주영은 “듣고 보니 안 되는 까닭을 참 많이 연구 했군. 그렇지만 이미 주변 여건에 맞추어 설계까지 다 해놓았는데 이제 와서 부지를 바꾸는 것은 말이 안 되고, 더욱이나 전경련 회관을 10층으로 지으라는 건 도대체 뭐야? 내일 다시 올 테니 되는 쪽으로 다시 보고해!”라는 말이 떨어졌다.
그러면서 정주영은 정부의 반대를 수용하면서도 회관을 지을 방법을 연구했다. “고층 건물을 지어 전경련의 위상도 높이고, 포를 쏘기 위한 사계도 가리지 않는 방법이 없을까?” 생각하던 그는 묘안을 떠올렸다.
“일단 그 땅에 20층짜리 회관을 짓고, 포대는 20층 건물보다 더 높은 위치에 옮겨서 건설해주면 될 게 아닌가! 그러면 번거롭게 설계변경을 하거나 부지 변경을 안 해도 되니 비용도 훨씬 절감될 것 아닌가. 또 포대야 높은 데 있으면 더 좋을 테니까 말이야. 그야말로 일석삼조가 바로 이런 것을 두고 하는 말이네.”
▲ 그림 이무성 한국화가
그야말로 기막힌 해결책이었다. 모두가 깜짝 놀라면서 반겼다. 포대는 높은 곳에 둘수록 좋은 것이기에 정부에서도 대환영이었다. 결국, 양측이 만족하는 협상이 이루어진 것이다. 그는 아무도 안 된다고 반대할 때 해 낼 수 있는 경영자였다. 또 정주영은 사람들에게서 “생각하는 불도저”라는 별명을 얻었다. 그것은 정주영이 단순히 밀어붙이기만 하는 것이 아니라 누구보다도 더 열심히 생각하고, 계산하고 분석하면서 일을 추진했음을 말한다.
1970년대 남산에 우뚝 섰던 전경련회관은 이후 여의도로 이전한 이래 2008년 전국경제인연합회관의 재건축 및 여의도의 50층 마천루 건설을 목적으로 새로 신축하여 2013년 12월 18일 완공을 보았다. 이 우람찬 건물의 정식 명칭은 전국경제인연합회관이며, 영문 별칭으로는 FKI타워(Federation of Korean Industries Head Office Building)라고 부른다. 이 초고속 빌딩은 지상 50층, 246m로 2013년 현재 서울에서 다섯 번째로 높은 마천루로, 여의도에서는 IFC서울, 63빌딩 다음으로 높은 빌딩이다. 정주영 회장 시대부터 전경련은 회관 건물에 신경을 쓰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정주영은 잘 나가던 자동차 수리공장을 홀랑 불에 태워 알거지가 되었을 때도 절망하지 않고 다시 일어나 결국은 현대자동차를 설립한 사람이다. 또 74년 울산조선소를 건설하면서 26만 톤짜리 배도 함께 건조해 진수하는 등 세계 조선업계에 전무한 기록을 남겼다. 불가능하다고 여겼던 서산 천수만 간척사업 물막이 공사에서는 유조선을 동원하는 ‘정주영 공법’을 동원하기도 했다. 10층 빌딩만한 자켓 89개를 인도양 건너 운반해냈던 것도 그였다. 81년 기껏해야 3표 정도밖에 얻지 못할 것이라는 조롱에도 불구하고 올림픽 유치위원장을 맡았던 정 회장은 불과 4개월 만에 일본 나고야를 물리치면서 ‘바덴바덴의 기적’을 일궈냈다. 이 모두 정주영의 추진력과 돌파력이 아니면 도저히 해낼 수 없는 일들이었다.
정주영 이제 그는 없다. 남북이 으르렁거리면서 분위기가 심각해졌는데도 나서서 이를 타계할 사람이 없다. 모두가 안 된다고 하지 정주영처럼 안 될 것을 되게 하는 사람도 없다. 어떤 이는 서양에 레오나르도 다빈치와 맥가이버가 있다면 우리에겐 정주영이 있었다고 말한다. 그래서 새삼 정주영이 그리운가 보다. 120살까지 살면서 많은 것을 이루고 싶다던 그가 그렇게 빨리 갈 줄이야. 지금 그가 살아 있다면 아무도 못할 일들을 해내고 또 해낼 것이 아닌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