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문화신문 = 이윤옥]
저는 요즈음 아버지의 파란만장하셨던 일생의 삶을 작은 책으로 만들고자 남기고 가신 여러 자료들을 정리하고 있습니다. 당신의 체취가 느껴지는 유품을 일일이 다시 보면서 특히 젊은 시절 고향에 계실 때 사진이 남아 있지 않아서 아쉬운 마음이 듭니다. 그 당시 영양의 작은 산골에 사진기 있는 집이 있기는 과연 있었을까 하고 스스로 위안을 해봅니다.
하늘에 계신 아버지, 누구에게든 밤새워 자랑할 수 있을 만큼 떳떳하게 살아오신 훌륭한 아버님 유독 추운 겨울날이 되면 더욱 뵙고 싶은 아버지께 이렇게 편지로 인사를 드려 봅니다.
저의 기억 속에 당신께서는 언제나 자신과 가정보다는 국가를 먼저 생각하신 분이셨습니다.
▲ 독립기념관_본인 활동사진 앞에서 박종길 애국지사
당신께서는 젊은 시절 스무 살도 채 안되었을 때 내선일체를 강요하던 보통학교의 일본인 교관을 구타한 죄로 일경에 붙잡혀 고문과 갖은 고초를 겪으시고 그리고 일본군에 강제로 징집되어 머나먼 중국 땅으로 끌려가셨지만 애국과 독립정신으로 단단히 뭉쳐진 당신은 호남성 형양에서 일본군 히노끼 부대의 탄약고를 불 지르고 친구 분과 함께 탈출하시어 주로 야간에 도로도 아닌 험준한 산길을 가시다가 중공군에 붙잡히셨지요.
친구 분은 처형당하시고 아버지는 거꾸로 매달리는 등 혹독한 고문을 당 하시면서도 말이 안 통하여 오직 “대한독립만세(大韓獨立萬歲)”라고만 한문으로 쓰고 하여 그들의 마음을 움직여 석방되어 홀로 수천리 길의 중경에 있는 대한민국 임시정부에 도착하여 광복군이 되신 여정을 생각하면 그 고통 그 괴로움 저로서는 상상이 안 됩니다. 나라에서 아버지께서 벋으신 독립유공자 건국훈장의 가치를 다시금 생각케 합니다.
이후 임시정부의 광복군 장교로서 김구 선생 휘하에서 독립운동에 참여하시고, 특히 그곳에 계실 때 여성독립운동가이신 정정화 여사(현재 임시정부기념사업회 회장 김자동 선생의 자당)의 사랑을 듬뿍 받으셨다는 얘기도 하셨죠.
당신께서 생전에 어느 해인가 어버이날에 저와 저의 집사람과 함께 오류동 부근에 살고 계셨던 정 여사님께 안부인사 드리러 갔을 때 두 분이 마치 모자지간처럼 환한 미소를 지으시며 담소를 나누시던 그 밝은 얼굴을 지금도 잊을 수가 없습니다.
▲ 임시정부_주화단(중국_중경)
해방이 된 이후에는 좌우대립 혼란 속에서도 당신께서는 육군사관학교를 거쳐 지휘관으로 다시 한 번 나라를 위해 6.25 전쟁에 몸을 맡기셨습니다. 그 후 고향 땅 영양군에서 3선 국회의원을 하시면서 국가를 위해 쉼 없이 일을 하시었습니다. 저희들도 흐트러짐 없이 바르게 사는 법을 배워 왔던 것 같습니다. 하지만 군사정권 이후 정치에 환멸을 느끼시고는, 항상 국민 편에서 당신의 심정을 등산과 서예로 달래셨던 모습이 눈에 선합니다.
어느 날인가 광복회에 다녀오신 뒤 나라에서 독립유공자에게 아파트 우선 분양권을 준다 하였지만 “나 보다 더 어려운 독립 유공자 후손에게 돌려주시오.”라고 마다 하셨던 청렴하신 우리 아버지! 또 연세가 팔순이 가까워 왔을 때 제가 수의 준비를 하려고 하자 거절하셔서 섭섭한 마음에 왜 그러시냐고 여쭈었더니 “수많은 독립운동을 하신 분들이 조국을 위해 이름 모를 산하에서 수의는커녕 옷도 제대로 입지 못하고 돌아가셨다.” 하시면서 평소 입으시던 한복을 깨끗이 하여 입혀 달라고 하시었지요. 정말로 진정한 애국을 실천하시고 가르쳐주신 당신에게 절로 고개가 숙여졌었습니다.
당신께서 살아오셨던 삶과 그 속의 큰 뜻을 제대로 헤아리지 못했던 어리석고 아둔한 이 아들은 초로의 나이가 들어서야 겨우 조금이나마 이해할 수 있게 된 것 같습니다. 누구보다도 자랑스럽고 존경하고 사랑하는 아버지! 이렇게 편지를 쓰고 있는 이 순간 더욱 보고 싶고 그립습니다.
아버지, 나의 아버지 영원히 사랑합니다!
돌아오는 아버님 생신 때도 전과 다름없이 찾아뵙고 술 한 잔 올리겠습니다.
박 재 민
경북 영양군 석보면 출생
한양대 졸업
前) 주식회사 대농 근무 중국법인장(1994~1999)
공장장 및 본사 관리본부장(2000~200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