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린경제=김기섭 기자] 세종 1년, 이 해는 크고 작은 일들이 연속으로 닥칩니다. 그때마다 세종은 어정쩡한 포즈를 취합니다만 특유의 겸손하고 신중한 자세를 잃지 않습니다. 그러면서 상왕인 태종 밑에서 일을 배워 나갑니다. 하나하나가 공부인 셈이라고 할까요. 그런 가운데에서도 인문학적 상상력을 통해 따뜻하고 바른 정치를 폅니다. 흉년이 들어 일종의 암행어사격인 감찰을 보낸 뒤 보고를 받는데, 백성들이 사정이 어려우니 세금을 면제해달라는 요청이 대부분입니다. 그러자 조정 신하들이 반대하고 나섭니다. 세종은 이들을 타이르면서 자신의 뜻을 분명히 밝힙니다. 임금으로 있으면서 백성이 주리어 죽는다는 말을 듣고 오히려 조세를 징수하는 것은 진실로 차마 못할 일이다---더욱이 감찰을 보내어 백성의 굶주리는 상황을 살펴보게 하고서 조세조차 면제를 안 해주면 백성을 위하여 혜택을 줄 일이 또 무엇이 있겠는가(세종실록 1년 1월6일) 어진 임금으로서 세종의 모습, 1년째 접어든 초보 임금에게서 발견하게 됩니다. ** 김기섭(세종연구가/한국형리더십교육센터 대표)
[그린경제=김기섭 기자] 상왕으로 물러난 태종에게 걱정거리가 하나 있었습니다. 왕위에 오른 세종의 건강이 그것입니다. 세종은 사냥을 좋아하지 않는 데다 비중하기까지 했으니까요. 태종은 젊은 임금에게 행동을 절제하기를 권하며, 동시에 한 나라의 지도자로서 문(文)과 무(武)의 균형이 필요하다는 점을 강조합니다. 그리고 그는 여기서 그치지 않고 직접 세종과 사냥에 나서겠다고 발표합니다. 자상하면서 지혜로운 아버지의 모습입니다. 문과 무 어느 하나를 편벽되이 폐할 수 없다. 나는 장차 주상과 더불어 무사(武事)를 강습할 것이다. -즉위년 10월 9일 ** 김기섭(세종연구가/한국형리더십교육센터 대표)
[그린경제= 김기섭 기자] 세종이 왕위에 오른 지 두 달이 못 되었을 때입니다. 신하들은 경연 자리에서 젊은 임금에게 충고합니다. 경연은 신하들이 유교 경전과 역사를 왕에게 가르치는 자리입니다. 소위 제왕학의 산실이라고 할 수 있죠. 이 날도 신하들은 왕에게 공부를 열심히 하라고 말하면서, 공부를 하여 왕이 마음을 바르게 하면 신하들이, 그 다음에는 백성들의 마음이 바르게 된다는 것입니다. 세종은 여기에 한마디 더 보탭니다. 공부도 공부 나름이라며, 마음공부(心上功夫)야말로 참 공부라고 말이죠. 그러나 경서를 글귀로만 풀이하는 것은 학문에 도움이 안 된다. 반드시 마음의 공부가 있어야만 유익할 것이다. -즉위년 10월 9일 ** 김기섭(세종연구가/한국형리더십교육센터 대표)
[그린경제=김기섭 기자] 태종 18년, 세자였던 양녕대군을 전격 폐하고 충녕대군을 세자로 삼습니다. 어렵고 힘든 결단이 아닐 수 없었습니다. 그렇기에 새로이 세자가 된 충녕대군에게 쏟는 아버지 태종의 마음은 남다를 수밖에 없었을 것입니다. 태종은 세자를 책봉한다는 책문에서 아들에게 신신당부합니다. 그 말은 지극히 소박합니다만 많은 함의가 담겨 있습니다. 어려워하는 마음을 가지고 신중하고 부지런히 하라는 그것입니다. 너 충녕대군 도(祹,세종의 이름)는 늘 책임이 어렵고도 크다는 점을 생각하여, 깊은 못에 다다른 듯이, 얇은 얼음을 밟는 듯이 해야 한다. ** 김기섭(세종연구가/한국형리더십교육센터 대표)
[그린경제=김기섭 기자] 조선시대에서 나라에 재앙이 생기거나 국정을 펴는데 필요할 경우, 임금은 현실정치에 대한 잘못과 민폐에 대해 의견을 가감 없이 청취하곤 했습니다. 구언(求言)이란 제도가 그것입니다. 이 말 속에는 정사에 필요한 바르고 아름다운 말을 구한다는 뜻이 담겨 있습니다. 사실 이때만 해도 나라의 재변(災變)은 하늘로부터 견책을 당한 것으로 인식하고 있었습니다. 따라서 임금은 스스로 통치행위의 문제점을 되돌아보고 이를 해결하기 위해 상향식 여론수렴제도인 구언을 활용한 것입니다. 재이가 발생하면 우선 임금은 국정 전반에 대해 마음을 가다듬어 반성한다는 차원에서 관료를 비롯하여 지방의 유림들, 심지어 일반 백성들에게까지 하고 싶은 말을 다하도록 이른바 구언전지를 내립니다. 그러면 응지상소(應旨上疏)라고 하여, 신하와 백성들은 상소를 통해 자신의 뜻과 생각을 개진합니다. 그런데 흥미로운 것은 이 응지상소 만큼은 승정원을 거치지 않고 임금에게 직접 전달된다는 점입니다. 검열과정이 생략된 밀서(密書)인 셈입니다. 임금은 일일이 상소를 읽어보고 내용이 적절하다 싶으면 정책에 반영하는 것을 관례로 삼았습니다. 구언제도는 삼국시대에서부터 그 흔적이 보입니다
[그린경제=김기섭 기자] 조선시대에서 임금과 신하의 말과 행동을 적는 사관(史官)이 되려면 몇 가지 조건이 있었습니다. 먼저 문과 시험 급제자 중에서 젊고 기개가 높아야 하며 재주와 학식이 뛰어나야 합니다. 그리고 기혼자에다 가문이 훌륭해야 가능했습니다. 결혼하지 않은 사람은 인척에 따라 어떤 정치집단에 가입할지 모르므로 직서(直書) 정신이 훼손될 우려가 있다고 보았고, 훌륭한 가문의 자제는 어떤 미혹에도 흔들리지 않고 자존심을 가지고 직필(直筆)할 수 있다고 믿었기 때문입니다. 직서과 직필은 사관에게 생명과도 같은 가치였습니다. 사관들이 쓰는 사초는 단순히 왕이나 대신의 말과 행동을 적는데 그치지 않고, 견제하는 기능을 가지기도 했습니다. 명분을 중요시하는 하는 유교사회 조선에서 당장의 잘못은 어떻게든 모면할 수 있지만 사초는 나중에 실록이 되어 남으니, 후세의 비판과 평가가 두려울 수밖에 없었습니다. 따라서 한 마디 말, 하나의 행동도 쉽게 할 수 없는 노릇이었지요. 그런 점에서 사관은 눈엣가시와 같은 존재임에 틀림없습니다. 태조도 세종도 실록 보려 했으나 실패하다 태종은 사관과 자주 충돌한 임금 중 한 명입니다. 사사건건 입시하여 왕의 일거수일
[그린경제=김기섭 기자] 조선시대 문과 시험문제, 즉 책문은 임금이 정치에 관한 계책을 묻고 그에 대한 답을 적는 시험을 이릅니다. 국가의 비전에 대한 젊은 선비들의 참신한 아이디어를 듣는 소통의 시간입니다. 예컨대 인재쓰기, 경제위기의 해결책, 국정운영의 방책 등을 임금이 물으면 젊은 인재들은 그에 따른 대책을 제시하는 열정적인 대화의 자리인 셈입니다. 태종 7년 4월 태종은 책문을 내리며, 다음과 같은 출제 배경을 밝힙니다. 지금 우리나라는 창업한 지 오래되지 않았고 법제 또한 갖추지 못했다. 또 천도한 지도 얼마 되지 않아 역사(役事)가 그치지 않는다.---이른 아침부터 밤늦게까지 소강(小康)을 이루려고(중략) 정사를 듣는 틈틈이 책을 보고 그 뜻을 강구하지만 힘을 쓰는 방법을 알지 못한다. 그러니 태종의 주문은 소강(小康)을 이루는 방책을 적어내라는 것입니다. 여기서 소강은 작지만 강한 나라로 태종이 꿈꾸는 조선의 미래상입니다. 따라서 이번 책문은 태종의 고민과 비전이 함께 담긴 시험문제라 할 수 있습니다. 작지만 강한 나라, 태종이 꿈꾼 조선의 비전 그런데 소강을 이루려면 명나라와의 안정적인 외교관계는 필수적이었습니다. 이를 위해 태종은 지성사대라는
[그린경제=김기섭 기자] 조선시대 문과 시험문제, 즉 책문은 임금이 정치에 관한 계책을 묻고 그에 대한 답을 적는 시험을 이릅니다. 국가의 비전에 대한 젊은 선비들의 참신한 아이디어를 듣는 소통의 시간입니다. 예컨대 인재쓰기, 경제위기의 해결책, 국정운영의 방책 등을 임금이 물으면 젊은 인재들은 그에 따른 대책을 제시하는 열정적인 대화의 자리인 셈입니다. 태종 7년 4월 태종은 책문을 내리며, 다음과 같은 출제 배경을 밝힙니다. 지금 우리나라는 창업한 지 오래되지 않았고 법제 또한 갖추지 못했다. 또 천도한 지도 얼마 되지 않아 역사(役事)가 그치지 않는다.---이른 아침부터 밤늦게까지 소강(小康)을 이루려고(중략) 정사를 듣는 틈틈이 책을 보고 그 뜻을 강구하지만 힘을 쓰는 방법을 알지 못한다. 그러니 태종의 주문은 소강(小康)을 이루는 방책을 적어내라는 것입니다. 여기서 소강은 작지만 강한 나라로 태종이 꿈꾸는 조선의 미래상입니다. 따라서 이번 책문은 태종의 고민과 비전이 함께 담긴 시험문제라 할 수 있습니다. 작지만 강한 나라, 태종이 꿈꾼 조선의 비전 그런데 소강을 이루려면 명나라와의 안정적인 외교관계는 필수적이었습니다. 이를 위해 태종은 지성사대
[그린경제=김기섭 기자] 인사가 만사라고 합니다만 머리로는 이해하면서도 실행에 옮기기 어려운 것이 바로 이 말입니다. 철썩 같이 믿었던 사람이 어느 날 아수라백작처럼 얼굴을 바꾸거나, 국민 편에서 일한다기에 권력을 위임했더니 오히려 국민을 옥죄는 일을 목격할 때 우리는 아연실색하게 됩니다. ▲ 세종대왕의 동상 이러한 현상은 과거에도 적지 않았는데, 그래서 선조들은 인재쓰기를 정치의 요체로 삼았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영조 26년 1월 9일 어전회의의 의제도 인재 쓰기와 양성이었습니다. 당시 이조판서 원경하는 영조에게 인재는 미리 배양해야 위급한 일이 생길 때 대응할 수 있다고 고합니다. 그는 세종과 선조의 사례를 예로 들면서, 세종은 절의를 지킨 사육신을 배양했고, 선조 또한 이순신을 발탁한 것 외에 초년에 이미 이항복이덕형윤두수윤근수유성룡이원익 같은 인재를 길러 얻었다고 얘기합니다. 그러니 왕도 두 선대왕과 같이 인재를 미리 배양하기를 힘쓰라고 진언합니다. 화려한 인재풀 자랑하는 선조시대가 세종조보다 못한 이유 그러자 영조가 불쑥 묻습니다. 선조 때는 인재가 매우 많고 성했다고 한다. 그럼에도 지금 사람들은 매양 영묘죠(英廟朝)보다 못하다고 하는데 그 까
[그린경제=김기섭 기자] 최근 《난중일기》를 읽으며, 마치 업무일지를 작성하듯 건조하게 일기를 쓴 이순신 장군의 모습을 보고 많은 생각에 젖습니다. 우선, 치열한 해전이 벌어지는 시기를 제외하고 7년간 꾸준히 일기를 쓴 성실함에 감탄을 하게 됩니다. 자신의 기록이 후세의 사료가 되리라 마음먹지는 않았을 테지만, 자신을 성찰하려는 일관된 의지와 노력은 귀감이 되고도 남습니다. 무엇보다 일기에서 자주 언급하는 단어들은 깊은 생각을 하게 만듭니다. 예를 들어 이야기하다 의논하다 대화하다 논하다 약속하다 등의 단어와 종일 이야기하다라는 말은 전쟁 한 복판에서 이순신과 동료, 그리고 부하장수들이 도대체 무슨 얘기를 나누었을까 하는 궁금증과 함께, 이 단어들이 갖는 함의를 되새겨보게 합니다. 다시 말해 이 단어들은 이순신 장군의 면면을 확인하는 단서를 제공합니다. 먼저, 이순신은 원래 과묵한 사람이거나 말을 아끼는 사람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그것입니다. 일기에서 그의 동료와 부하장수들은 말을 많이 하지만 정작 이순신은 별로 말을 하지 않습니다. 대신 그들의 말을 평가합니다. 연전연승의 비결은 집단적 지혜 모은 작전회의 ▲ 통영 한산도 세병관에 모셔진 이순신장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