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쌀쌀한 바람이 때때로 불며 누른 잎새가 우수수하고 떨어지든 가을철도 거의 다 지내가고 새빨갓케 언 손으로 두 귀를 가리고 종종 거름을 칠 겨울도 몃날이 못되야 또다시 오게 되얏다. 따듯한 온돌 안에서 쪽각 유리를 무친 미닫이에 올골을 대이고 소리 업시 날리는 백설을 구경할 때가 머지 아니하야 요사이는 길가나 공동수도에 모히어 살림이야기를 하는 녀인네 사이에는 ‘우리 집에는 이때까지 솜 한 가지를 못 피어 놓았는데 이를 엇지해….’ 하며 오나가나 겨울준비에 분망하게 되었다.” 위는 라는 제목의 1922년 11월 6일 자 동아일보 기사 일부입니다. 당시의 입동 즈음 분위기를 잘 묘사해 놓았습니다. 오늘은 24절기의 열아홉째인 입동입니다. 이때쯤이면 가을걷이도 끝나 바쁜 일손을 놓고 한숨 돌리고 싶지만 곧바로 닥쳐올 겨울 채비 때문에 아낙네들은 걱정 속에 일손이 바빠집니다. 입동 전후에 가장 큰일은 역시 김장이지요. 지금은 배추를 비롯한 각종 푸성귀를 365일 팔고 있고 김치 말고도 먹을거리가 풍요롭지만 예전에 겨울 반찬은 김치가 전부이다시피 했으며 김장하기는 우리 겨레
전남 구례 지리산 자락에는 유서 깊은 절 화엄사가 있습니다. 화엄사는 멀고먼 인도에서 오신 연기조사가 지은 절로 알려져 있는데 연기조사는 효성이 지극한 스님이었습니다. 화엄사 대웅전 뒤편 언덕을 효대(孝臺)라 부르는데 이곳에는 4마리 사자가 석탑을 떠받치고 있는 4사자삼층석탑(四獅子三層石塔)이 있습니다. 그 4사자석탑 4마리 사자 한가운데에는 연기조사의 어머니가 합장을 하고 단아하게 서 있습니다. 석탑이 마주 보이는 곳에는 아담한 석등이 하나 있는데 이 속에는 연기조사의 모습이 어머니를 우러르고 있습니다. 머나먼 고국 인도에서 어렵사리 건너온 연기조사의 마음속에는 늘 어머니가 자리했고 그 어머니를 그리워하던 연기조사는 불철주야 아들만을 그리워했을 어머니를 그리며 즈믄해(천 년)를 합장하고 있는 모습이 보는 이의 가슴을 뭉클하게 합니다. 대각국사 의천은 연기조사의 효심을 시로 읊었는데 효대라는 이름은 여기서 나온 말이지요. 국보 제35호 지정된 4사자석탑은 통일신라 전성기인 8세기 중엽에 만든 것으로 추정되며, 탑의 높이는 5.5m이고 탑 안에는 부처님의 진신사리 72과가 봉안되어 있습니다. 석탑을 받들고 서있는 네 마리 사자의 얼굴은 각각 그 모습이 다른데
애비 놈들 남의 나라 삼키더니 / 그 자식들 통학하며 싸가지 없이 / 조선인 여학생 댕기를 잡아 당겼것다 아야야야 아야야야 / 그 광경보다 못해 조선 남학생들 왜놈 학생 멱살 잡고 한 대 날렸것다 … 어린 학생 잡아다가 고문하던 왜놈 순사들 / 머리채 잡아끈 후쿠다(福田修三)는 놔두고 힘없는 나주의 딸 이광춘만 / 머리끄댕이 잡히고도 퇴학당했다지 … - 이윤옥, 《서간도 들꽃 피다》 오늘은 달력에 '학생의 날'이라고 쓰여 있습니다. 과연 무엇을 기리는 날일까요? 이날은 정확히 말하자면 '광주학생운동의 날'이라고 해야 할 것입니다. 일제강점기인 1929년 10월 30일 오후 5시 30분 나주역에서 한 소동이 일어났습니다. 통학열차에서 내려 개찰구를 빠져나가던 한국인 여학생의 댕기 머리를 일본인 남학생이 잡아당기며 희롱한 것입니다. 이 광경을 보다 못한 조선 남학생들이 뛰어들어 난투극이 벌어졌고 이날 사건으로 조선인 학생들이 많이 잡혀갔습니다. 이후 11월 3일 대항일 학생운동이 전개되는데 마침 11월 3일은 일본 명치왕의 생일이었지요. 이날 광주고등보통학교 학생들은 명
세계문화유산이 된 판소리는 보통 섬진강을 중심으로 동쪽지역인 남원, 운봉, 구례, 순창, 곡성에서 불렸던 동편제와 서쪽 지방인 보성, 나주, 목포 같은 곳에서 불렸던 서편제로 가릅니다. 물론 충청 이북지방에서 불렸다는 중고제, 서편제를 창시한 박유전이 말년에 새롭게 만든 강산제, 동초 김연수가 창시한 동초제가 있지만 역시 큰 가름은 동편제와 서편제지요. 그 가운데 동편제는 명창 가왕(歌王) 송흥록(宋興錄)이 발전시켜 국창 송만갑이 완성한 것인데. 그밖에 송우룡, 유성준, 박초월, 김소희, 임방울, 정광수, 박봉술 명창이 손꼽힙니다. 특히 유성준 명창은 근대 판소리 5대 명창 가운데 한 사람으로 대한민국을 대표하는 동편제 판소리의 제왕이라 일컬어집니다. 그는 와 를 잘 불렀는데 특히 에서 토끼와 자라가 만나는 대목과 토끼 신세를 그리는 대목은 그를 따라올 사람이 없었지요. 얼마 전 끝난 구례동편제소리축제(10.21~23)에서 군산대 최동현 교수는 “유성준의 생애와 예술”이라는 제목의 강연을 했습니다. 최 교수에 따르면 '송만갑과 유성준이 사흘 동안 소리 대결을 했는데
쪽진 머리에 똬리 얹어 / 함지박 이고 어머니 우물 가는 길 / 누렁이 꼬리 흔들며 따라나서고 / 푸른 하늘 두레박에 넘실거릴 때 / 이남박 가득 하얀 햅쌀 / 일렁이며 돌 고르던 마음 / 아! 어머니 마음 - 신수정 '이남박' - 이남박은 예전엔 어느 집에나 있던 물건입니다. 쌀, 보리 같은 곡식을 씻거나 돌을 일 때 쓰는 물건이지요. '이남박'을 북한에서는 '쌀함박', 강원도는 '남박' 또는 '쌀름박', 경상북도는 '반팅이'라고 불렀으며 통나무를 파서 만드는데 바가지 안쪽에는 돌을 일기 좋게 여러 줄의 골을 내었습니다. 새로 만들었을 때는 먼저 들기름을 바르고, 기름이 잘 밴 다음 마른행주로 닦아 길을 들인 뒤 썼지요. 지금은 석발기라는 돌 고르는 기계가 있어 쌀에 돌이 섞이는 일이 없지만 예전엔 자그마한 돌이나 잔모래가 으레 섞이곤 해서 쌀을 잘 일어야 했지요. 한 그릇의 밥이 밥상에 오르려면 우물가로 함지박에 쌀을 이고 나가 조리로 인 다음 이남박에 담아 졸졸졸 물을 여러 번 흘려보내야 밥에 돌이 들어가는 것을 막았습니다. 이남박의 골진 주름을 보자니 예전 어
보름이 밝을까 그믐이 어두울까 요까지 걸어온 길 길기도 하는구나 죽살이 기껏 쉰 해를 차근차근 다듬는다 *죽살이: 인생 사람의 인생이란 그림자처럼 '희로애락'이 따른다. 특히 지난날 재일동포의 삶은 '로'와 '애'가 가 가득 차고 어쩌다가 '희'나 '락'이 얻어질 수 있었다. 그러나 그런 속에서도 재일동포는 먼 고향을 뜨겁게 생각하면서 굴하지 않고 알속 있게 살았다. 50해를 하루와 같이
38년 동안이나 벼슬살이를 하며 집 한 칸을 장만하지 못했다고 하면 곧이들을 사람이 있을까요? 그런데 조선 중기 때 문신 박수량(朴守良:1491∼1554)은 평생 집 한 칸은커녕 그가 죽었을 때 남은 양식이 없어 초상마저 치를 수 없었을 만큼 청렴결백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38년 동안 벼슬을 하며 가는 곳마다 많은 치적을 쌓았으며, 학자로도 존경받았을 뿐 아니라 효성이 지극하기로도 소문이 자자했습니다. 한번은 늙은 어머니를 모시려고 나주 목사를 자청하였는데 삼정승이 나서서 "대사간을 맡을 사람이 목사를 자청하느냐?"라며 만류하기까지 했지요. 어머니를 곁에 모실 수 있는 목사자리를 고집하면서까지 자기 영달을 접는 박수량의 효심이 참으로 대단합니다. 그런 그가 서울 벼슬살이 끝에 죽자 대사헌 윤춘년이 "박수량은 청백한 사람이라 멀리 서울에 와서 벼슬을 하면서도 남의 집을 빌려 살고 있었을 정도로 가난하게 살았습니다. 그래서 고향인 장성으로 돌려보내 장사지내려고 해도 지낼 수가 없습니다. 따라서 그를 나라에서 표창해야 합니다."라고 임금에게 올리자 명종 임금은 서해의 좋
그동안 농악에 관한 연구는 기원에 관한 물음으로부터 시작해서 전승과정이나 실태에 관한 연구, 구성이나 판제에 관한 연구, 각 차(次)에 따른 기본형 리듬과 변형리듬에 관한 연구, 동작이나 춤사위 연구, 지역이나 마을 단위로 해서 상호 비교나 특징을 찾는 작업들이 활발한 편이었으며 상당수준의 연구성과도 축적되어 가는 상황이라고 하겠다. 특히 농악의 리듬을 발췌하여 이를 무대음악으로 만든 꽹과리, 장고, 북, 징의 타악합주 사물놀이는 시연 30여 년이 지난 현재 한국을 넘어 전 세계로 미치는 한국의 대표적인 음악으로 자리를 잡고 있다. 초등학교를 비롯한 각급학교의 사물놀이 팀이나 평생교육원, 직장의 동호인 중심으로 점점 확산해 가고 있다. 이제는 농악의 외양이나 내면의 매력이 무엇인가 하는 물음에 대한 응답을 준비해야 할 때가 되었다. 농악 속에 어떤 미적인 가치가 있어서 한국인들은 농악과 더불어 긴 세월을 함께 해 올 수 있었는가 하는 문제를 비롯하여 지방마다 전해오는 농악은 각각 어떤 독특한 멋과 특징을 지니고 있는가? 한국 농악 속에 녹아있는 미적인 특징이나 농악
농악은 한국의 대표적인 향토음악이다. 그런데 농악의 기원을 딱히 언제부터라고 말하기는 어렵다. 그 옛날 삼국시대 이전에도 5월의 파종 후나 10월의 추수 후에는 천신, 지신에게 제사를 지내는 제천의식이 있었는데, 이때는 온 마을 사람들이 한데 모여 노래도 부르고 춤도 추면서 즐겼다고 한다. 그것이 비록 오늘날의 농악과는 다르다고 해도 농사일과 관련하여 춤추고 노래를 불렀다는 기록에서 농악의 시초로 볼 수 있을 것이다. 고려가요인 동동의 후렴에 나오는 「아으 동동다리」라는 가사에서「동동」을 농악에 쓰이는 북소리의 의성어인「둥둥」에서 온 말로 풀이하는 사람도 있다. 하여튼 농악의 기원은 우리 민족이 이 땅에 정착하여 농경생활을 시작하면서부터 비롯되었다고 생각하는 것이 무리는 아닐 것이다. 그런가 하면 농악의 기원설도 다양하다. 농사와 안택(安宅)을 위한 축원설이 있고, 농군을 훈련 양성하는 방안의 하나로 군악(軍樂)설도 있으며, 사찰건립이나 중수목적의 모금방안과 관련한 불교 관계설 등도 있다. 이중에서는 농사를 위하고 안택을 제신에게 비는 농사안택축원설이 농악을 하게
젊음을 자랑하던 옛날이 그립다들 되돌아 잡을손가 당겨서 쥘손가 오늘을 힘껏 사는게 새맛으라 하느나 인생이란 흐르는 강물과 같다. 그러나 지난날이 그립고 자랑스럽다면 그에 사로잡히지 말고 오늘을 맑고 깨끗하게 살아야 한다. 그래야, 내일도 도움을 주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