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자 여러분의 질문 중에 ‘봉선화’나, ‘바위고개’, 또는 ‘금강산’이나 ‘비목’과 같은 노래들을 가곡으로 알고 있는데, 국악방송을 들어보면 이름부터 생소한 ‘초수대엽’이나 ‘언락’, ‘편락’과 같은 긴 노래를 가곡으로 소개하기 때문에 혼란스럽고 어리둥절할 때가 많다는 것이다. 가곡이 어떤 노래인가? 미적 특징이 무엇인가? 하는 점을 이해하기 위해 오늘부터는 가곡에 관한 이야기를 쉽게 풀어서 소개할 예정이다. 관심있는 분들의 애독과 질문을 포함한 많은 의견을 보내 주시기 바란다. 일반적으로 가곡(歌曲)이라 하면 아름다운 시(詩) 위에 곡조를 얹어 부르는 노래를 지칭한다. 독일에서는 리트, 불란서에서는 샹송, 이태리에서는 깐쪼네로 부르고 있다. 그러나 우리나라에서 가곡으로 정의하고 있는 노래는 몇 가지 특징적인 요소들을 지니고 있기 때문에 다른 노래와는 차별성을 갖고 있다. 특징적인 요소란 다음과 같다. 1. 조선조 전기에 생성된 노래로 오랜 역사를 지니고 있다는 점 2. 우리가 잘 알고 있는 초장, 중장, 종장으로 구성되어 있는 3장 형식의 시조시를 노랫말로 삼는다는 점 3. 16박자, 혹은 10박자의 길고 느린 장단에 맞추어 부르고 있다는 점 4. 반
“바람 앞에 흔들리는 조국 / 안사람들이여 일어나라 / 며느리들이여 총을 메라 / 가서 아들을 돕고 남편을 돕고 / 의병장 시아버지를 따르라 / 가정리 여우내골 여자 의병 모아 / 쟁쟁한 독립군 키워낸 억척이 / 시아버지 남편 아들 조카 / 유씨 문중 뿌리 뽑아 독립에 바친 집안 / 돌비석 하나로는 다 기리지 못해...“ -이한꽃 “의병장 윤희순 중에서”- 을미의병부터 후기 정미의병때까지 직간접적으로 의병운동에 참여했던 우리나라 최초의 여성의병장 윤희순(尹熙順, 1860.~1935. 8. 1) 은 8편의 의병가를 손수 지어 여성과 청년들에게 나라사랑 정신을 일깨워주었으며, 4편의 경고문을 지어 의병과 싸우던 관군, 의병을 밀고했던 밀고자들과 일본군을 꾸짖었습니다. 일가가 모두 중국으로 망명한 뒤에는 조선독립단 활동, 항일인재양성을 위한 교육운동에 전력을 다했던 보기 드문 항일독립투사 가족의 안주인이었지요. “나라없이 살 수 없네 나라살려 살아보세 임금없이 살 수 없네 임금살려 살아보세 조상없이 살 수 없네 조상살려 살아보세 살 수없다 한탄 말고 전진하여 왜놈 잡아 임
사람이 태어나서 한 길을 걷는다는 일이 말처럼 쉽지 않은데 55년 동안 선소리 《산타령》을 부르며 외길을 살아온 분이 계십니다. 중요무형문화재 제19호 황용주 선생이 바로 그분으로 한국 산타령의 대명사이지요. 《산타령》은 예로부터 예인집단에 의해 전승된 것으로 불가(佛家)에서는 주로 사찰의 의식이 끝난 후, 산타령과 민요로 일반 대중을 위로하였고, 도시와 농촌에서는 넓은 마당에서 불을 밝히며 참가자들과 함께 즐겼던 노래가 바로 산타령인 것입니다. 특히《산타령》은 답교(踏橋)놀이에서는 빼놓을 수 없는 노래였습니다. 1900년대까지도 서울의 왕십리와 뚝섬을 잇는“살고지다리”에서는 정월 대보름 답교놀이가 행해졌는데 이날 밤, 서울의 산타령 패(牌)들이 전부 이곳에 모여 목말을 타고 목청을 높여《산타령》을 부르며 밤을 새워 흥겹게 놀았다고 하지요. 100년 전의 노래잔치를 연상해 보면 그 분위기를 짐작할 수 있을 것입니다. 《산타령》은 1969년 중요무형문화재 제19호로 지정된 이래 40여 년이 지난 현재, 당시의 보유자들은 모두 세상을 떴으며, 제2세대의 선두주자인 황용주
"미나리꽝 늙은 아버지 / 허벅지 담그고 / 향긋한 초록을 건진다 이마에 흐르는 땀 / 오월 바람이 씻어줄 때 / 바둑이 앞세운 칠순 엄니 새참 이고 조붓한 논두렁길 출렁출렁 / 노부부 논둑 앉아 미나리 한 줌 넣고 보리밥 비빌 때 / 뒷산 뻐꾸기 뻐꾹 뻐억국." - 김신영 ‘미나리꽝’- 향긋한 미나리가 제철인 오월입니다. 미나리는 찬 성질이라 몸에 열이 있는 사람에게 좋은 식품으로 알려져 있지요. 혈액순환과 해독작용에 좋으며 나른한 춘곤증을 이기는데도 좋은 음식으로 살짝 데쳐 식성에 맞게 무쳐먹거나 미나리 김치를 담가도 좋고 특히 매운탕에는 비린내를 없앨뿐더러 특유의 향긋한 냄새가 식욕을 돋워 줍니다. 미나리 김치는 이미 세종실록 1419년 12월 7일 기사에도 보이는데 산릉(山陵)의 개토(開土) 제사 때 “첫 줄은 달래 김치를 앞에 놓고, 젓갈을 다음에 놓으며, 둘째 줄은 무김치를 앞에 놓고, 사슴 젖과 미나리 김치를 다음에 놓는다.”라는 기록처럼 미나리 김치의 역사는 깁니다. <별건곤 제23호> 1929년 9월 27일자에는 “경성명물집” 기사 속에 “왕십리 미나리와 안주(安州) 미나리가 평남에서 이름이 높고 남원 미나리는 전라도에서 이름이 높
조선을 세운 태조 임금이 한양으로 수도를 옮기려고 궁궐과 종묘를 먼저 지은 뒤 태조 4년(1395) 도성축조도감을 설치하고 경복궁을 중심으로 내사산 곧 북악산ㆍ낙산ㆍ남산ㆍ인왕산에 성곽을 쌓습니다. 이 가운데 흙으로 쌓은 부분은 무너져 내려 세종 4년(1422)에 모두 돌로 고쳐 쌓았으며, 숙종 30년(1704)에는 정사각형의 돌을 다듬어 벽면이 수직이 되게 쌓았지요. 그러나 일제강점기 조선총독부가 도시계획이라는 구실로 성문과 성벽을 무너뜨렸고, 한국전쟁 등으로 또 파괴되었습니다. 이에 서울시는 1975년 삼청지구(창의문∼숙정문) 서울성곽 2,570m를 되살리는 것을 시작으로 지난 36년간 성북, 광희, 남산, 청운, 삼선, 동숭지구 등에서 성곽을 다시 살려 현재 12.21㎞를 복원한 상태입니다. 이제 그 복원사업에 더욱 박차를 가해 2014년까지 18.627km 모두 복원한다고 합니다. 서울시는 인왕산~창의문~부암동~숙정문 구간은 '명승코스', 숭례문~소의문~돈의문 구간은 근대 역사 코스, 장충동~남산타워~남산 회현자락 구간은 가족 코스로 각각 단장할 계획이며 주변에
전철 1호선 월계역 다음은 녹천역입니다. 녹천(鹿川)이라는 한자로 보아 사슴이라도 뛰어놀았을 성싶은 이 역은 1668년(현종 7) 과거에 급제하여 통정대부, 우의정, 영의정 등을 지냈던 조선 후기 문신인 녹천 이유(李濡) 선생과 관계가 있습니다. 녹천이 좌의정을 지낼 때 북한산성을 쌓았는데 일부 대신들이 청나라 눈치를 보며 반대했지만 도성을 방비하려면 북한산성이 절대 필요하다며 강력히 추진했지요. 녹천은 단순히 북한산성 쌓기를 주장한 것으로 끝나지 않고 현장에 경리청이란 재정확보특별기구를 만들어 자신의 개인 재산을 털어 보태기까지 했습니다. 또 그는 공사장에서 성을 쌓는 백성과 침식을 같이하면서 공사를 이끌었는데 대감 신분이면서 거들먹거리지 않고 솔선수범하여 모든 이의 본보기가 되었습니다. 녹천은 그의 호를 따서 이름 지은 노원구 월계동 녹천마을에서 살았고, 후세 사람들은 그를 가리켜 녹천대감이라 불렀습니다. 그는 나라로부터 많은 땅을 내려받아 마을 사람들에게 농사를 짓도록 했으며 마을 사람들은 녹천대감의 은혜에 감사하는 마음을 담아 해마다 세 차례씩 오늘날까지 “녹
단청(丹靑)은 목조건물에 여러 가지 빛깔로 무늬를 그려서 아름답고 장엄하게 장식한 것을 이릅니다. 단청은 장식 목적 외에 벌레가 갉아먹는 것을 막고 방습효과로 목조건물이 썩는 것을 방지합니다. 단청의 기본빛깔은 청·적·백·흑·황의 다섯 가지 색이며 이를 섞어서 수많은 빛깔을 내지요. 이 다섯 빛깔은 다산 정약용이 《여유당전서》 〈잡찬집(雜纂集)〉에서 5행사상과 관계가 있다고 하였습니다. ≪삼국사기≫ 권 제48 열전 제8에 “일찍이 황룡사 벽에 늙은 소나무를 그렸는데, 까마귀, 솔개, 제비, 참새가 그것을 보고 날아오더니 길을 잃고 헤매다가 떨어지곤 하였다. 세월이 오래되어 색이 바래지자 절의 승려가 단청으로 보수하였더니 까마귀와 참새가 다시 오지 않았다.”라는 기록이 있는 것으로 보아 단청은 이미 삼국시대에도 쓰였음을 알 수 있습니다. 단청무늬를 세분하면 기하학적인 무늬로 동그라미·네모꼴·세모꼴·격자(格子)·만자[卍字]·직선 등이 있으며, 당초(唐草)무늬로 인동당초(忍冬唐草)·포도당초·싸리당초·국화당초·보상당초(寶相唐草), 천지자연물로 해·달·별·구름·암석·산수가 있
지난 15일 일요일은 세종대왕이 태어나신 날이었습니다. 하지만, 세종대왕 탄신 대신 많은 이들은 스승의 날만 생각하고 기렸습니다. 그런 가운데서도 세종대왕이 태어나신 준수방으로 추정되는 곳에서는 특별한 행사가 둘 있었습니다. 그 하나는 “세종대왕 생가터 복원 촉구 기자회견”이고, 또 하나는 “세종마을 선포식”입니다. 먼저 오후 1시에는 서울 종로구 통인동 세종대왕 나신 곳 표지석 앞에서 세종대왕생가터찾기위원회와 한말글문화협회 공동 주최로 열린 “세종대왕 생가터 복원 촉구 기자회견”이 있었지요. 그 자리엔 50여 명의 배화여고 학생을 포함 100여 명의 참석자가 모였습니다. 그들은 특히 “개인도 먹고살 만하면 조상의 은덕을 기리고 그 고마움을 생각합니다. 하루빨리 세종대왕이 나신 곳을 찾아 세종정신과 업적을 배우고 기리도록 합시다.”, “세종대왕께서 만든 한글은 세계 으뜸 글자로서 우리가 잘살게 해주는 도구요, 무기입니다. 우리 말글보다 남의 말글을 더 섬기는 어리석은 짓은 이제 그만 합시다.”라며 국민과 정부에 호소했지요. 이어서 2시부터 서울 종로구 통인동 통인시장
바다를 사이 두고 이어진 하늘을 그렇게도 미워하고 보고 싶어 울었던데 그 밑에 몸 세워보니 눈물 독이 되었네. - 믿고장에서 - 앞 4해(예수 2007)에 60해 만에 믿고장(고향)을 찾았다. 어릴 때부터 찾아가고 싶었으나 이런저런 일들이 앞을 막아 60해를 쌓아야만 믿고장 땅을 찾았고 한한어버이들의 무덤을 찾아 큰절을 올려 드릴 수 있었다. 하늘은 ‘죽일 놈’이 아니었지만 오래 문을 열어 주지 않으니 미련하게도 60해를 줄곧 그렇게 생각했다.
‘얼굴 곰보처럼 얽었다고 / 그대를 흉본들 무슨 상관이라 / 우리들 끼리끼리 어깨 맞대고 / 가르릉 가르릉 세월 갈면서 / 향긋 향긋 향기 짜내는 일 / 이보다 더 고소한 맛 세상에 또 없으리 / 가르릉 가르릉 갈면서 생각도 지우고 / 가르릉 가릉 갈면서 회한도 지우고“ - 김인환 곡식을 갈아서 가루로 만들 때나 물에 불린 곡식을 갈 때 사용하는 기구 맷돌을 아시지요? 맷돌의 종류로 풀매라 하여 옷에 먹일 풀을 만들려고 물에 불린 쌀을 가는 맷돌도 있습니다. 흔히 한 사람이 손잡이를 돌리고 다른 한 사람은 아가리(구멍)에 곡식을 넣습니다. 그러나 맷돌이 크고 갈아야 할 곡물이 많을 때에는 맷손잡이(매손)에 가위다리 모양으로 벌어진 맷손을 걸고 2~3사람이 노를 젓듯이 앞뒤로 밀어가며 갈기도 하지요. 우리나라 맷돌은 중부와 남부 두 지방의 것이 다릅니다. 중부지방의 것은 위쪽 곧 암맷돌과 아래쪽 숫맷돌이 같고, 둥글넓적하여 맷돌을 앉히기가 좋은 매함지나 멍석을 깔고 쓰게 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남부의 것은 숫맷돌이 암맷돌보다 넓고 크며 한쪽에 주둥이까지 길게 달려서 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