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은 5월 15일 하면 스승의 날을 먼저 떠올리지만 사실 이 날은 세종임금이 태어나신 날입니다. 세종임금은 우리의 삶에 끼친 공이 지대하지요. 그런데 세종대왕이 언제 어디서 태어났는지 아는 사람은 적습니다. 세종실록 총서에는 “태조 6년 정축 4월 임진에 한양 준수방(俊秀坊) 잠저(潛邸)에서 탄생하였다.”라고 나옵니다. 서기로는 1408년 5월 15일 태어나셨고 이름은 "도"이고, 시호는 장헌(莊憲)으로 태종과 원경왕후(元敬王后) 민씨(閔氏)의 셋째 아들로 태어나셨지요. 이날은 모든 학교에서 스승의 날로 지냅니다. 그것은 1965년 청소년 적십자 중앙학생협의회(RCY)가 세종대왕이 태어나신 날인 5월 15일을 '스승의 날'로 정한 이후에 모두가 따라하는 것입니다. 한글을 만들어주신 세종대왕이야말로 우리의 영원한 스승이라는 뜻이지요. 국제천문연맹(IAU) 소행성 분과위원회는 1997년 말 세종대왕 탄신 6백 돌을 맞아 일본인 천문학자 와타나베가즈로(渡邊和郞)씨가 발견한 "QV1"이라는 소행성에 "(7365) SEJONG(세종)"이라는 이름을 붙여 세계 천문학계에 공포
오늘은 입양문화의 정착과 국내 입양의 활성화를 위하여 만든 “입양의 날”입니다. 수양부모(收養父母)를 사전에서 찾아보면 “수양아버지와 수양어머니를 아울러 이르는 말. 자식을 낳지 않았으나 데려다 길러 준 부모를 이른다.”라고 풀이합니다. 예부터 우리나라에는 자식이 없는 사람이 남의 자식을 친자식처럼 받아들이는 수양부모 풍습이 있었으며 친부모가 있어도 자식의 수명을 길게 하려고 수양부모를 삼기도 했습니다. 태종실록 25권, 13년(1413) 4월 24일 기록에 보면 군사의 수양부모에 대한 상례 규정(收養父母喪制)을 정하는 이야기가 나옵니다. 병조 참의 김자지(金自知)가 아뢰길 “3살 이전의 수양은 곧 자기 아들과 같이한다.’ 하였으니, 이를 보면 그 말을 따라야 마땅하나, 군관들에게는 안 될 듯하니 어떻게 처리함이 옳겠습니까?”라고 묻고 있는데, 이는 국방의 의무 중에 수양부모 상을 당하면 어찌하느냐는 질문입니다. 이에 임금이 말합니다. “비록 군사라 하더라도 수양부모에게 1일의 상(喪) 밖에 할 수 없다면 특히 수양한 뜻과 맞지 않으니, 마땅히 날짜로써 달을 대신하는
붓꽃 붓꽃의 보라빛을 온몸에 지녀서 옛날에 가고파 옛날을 가고파 검너울 물결소리는 어디가서 없다느냐. 나팔꽃 나팔꽃 두송이를 받아 안은 땅인데 목숨은 어디가고 빛깔만 남았느냐 단풍이 오는 걸음을 알고서 물러섰나. -믿나라 시조 집에서-
1 가는 봄 아쉬워서 꽃잎을 입에 무니 멀리를 보리내 바람 타고 찾아오네 믿고장 이른 여름을 버들피리 퍼지느나. 4 가고 오는 봄이건만 나이는 쌓기만코 쫓겨온 망육이니 갈데도 없는구나 하나의 믿나라 믿고 줄곧 가는 죽살이. *보리내 : 보리냄새 *망육(望六) ; 예순을 바라본다는 뜻으로, '나이 쉰한 살'을 일컫는 말 *믿나라 : 조국, 모국 *죽살이 : 인생
이달 24일(화) 오후 3시:30분, 세종문화회관 대극장에서 산타령의 예능보유자 황용주(黃龍周)사범이 예악 생활 55주년을 기념하여 발표공연을 펼친다고 한다. 축하의 글과 함께 산타령이란 어떤 음악인가 하는 점을 2회에 걸쳐 소개해 보기로 하겠다. 사람이 태어나서 한 길을 걷는다는 일이 말처럼 쉽지 않은 터에 10년, 20년도 아닌 55년을 오직 경기소리, 그 중에서도《산타령》을 부르며 외길을 살아온 황용주 사범은 후학들로부터 존경과 축하를 받아 마땅한 일이다. 그의 기념공연 무대는 경기소리 전반이지만, 그 중심은 역시 경기 지방에 전승되어 오는《산타령》이 될 것이다. 입창(立唱)형식, 즉 서서 부르는 이 노래는 좌창의 12잡가와 함께 경기소리의 대표적인 노래로 꼽고 있다. 구성악곡은 ‘놀량’ ‘앞산타령’ ‘뒷산타령’ ‘잦은 산타령’을 차례로 부르는 것을 기본 틀로 하는 연창형식의 노래이다. 《산타령》은 예로부터 예인집단에 의해 전승되었던 것으로 보고 있다. 불가(佛家)에서는 주로 사찰의 의식이 끝난 후, 산타령과 민요로 일반 대중을 위로하였고, 도시와 농촌에서는 넓은 마당에서 불을 밝히며 참가자들과 함께 즐겼던 노래가 바로 산타령인
오늘날 한국을 대표하는 현악기들은 현을 손가락으로 뜯거나 채 따위로 켜서 연주하는 발현악기(撥絃樂器)에 가야금과 거문고, 활로 현을 마찰시켜 소리를 내는 찰현악기(擦絃樂器)에 해금과 아쟁이 있다. 이 중 1500년 전의 가야금이 현재까지 전승되어 오면서 많은 국민의 사랑을 받을 수 있었던 배경에는 가야국의 유명한 악사 우륵과 그의 음악을 높이 인정했던 진흥왕의 만남이 결정적이라 말하고 싶다. 가야국이 망하자 가야금 한 틀을 품에 안고 신라로 투항한 악사 우륵(于勒) 선생을 신라에서는 국원성, 지금의 충주지방에 살도록 특별히 배려했다. 그도 그럴 것이 우륵은 단순한 악기연주자가 아니라, 가야국에서는 하늘과 땅에 제사 지내는 일을 비롯하여 대소사를 주도하고 결정하던 영향력 있는 유명 인사였기에 신라에서는 그를 딴 지방으로 옮겨 살게 해 특별히 보호 관찰했던 것이다. 고향땅을 등지고 충주에 정착하게 된 우륵 선생이 해야 할 일이라고는 가야금을 타는 일 외에는 없었다. 그래서 그는 종일 가야금만 타면서 시간을 보냈다. 꽃피고 새우는 봄이나 녹음이 우거진 여름에는 동산에 올라 가야금을 타면서 고향을 그리워했고, 가을밤 중천의 달이 높이 솟아도 서러움에 복받쳐 두고
“나라에서 불교를 믿지 않으니, 가지고 있은들 어디에 쓰겠느냐? 달라는 대로 주는 것도 괜찮으니, 그것을 의논하여서 하라.” 그러자 노사신(盧思愼)은 말하기를, “《대장경》은 국가의 긴요한 물건이 아니니, 내려주는 것이 편하겠습니다.” 이는 성종실록 244권 21년(1490 ) 9월 24일 자에 나오는 ‘일본에 대장경을 퍼주라.’라는 기록입니다. 한국의 국보 제32호인 《팔만대장경》은 목판본이 1,516종에 6,815권으로 총 8만 1,258매이며 초조대장경(初雕大藏經)과 속장경(續藏經)은 몽골의 침입 때 불타버린 뒤 1236년(고종 23) 만들기 시작하여 1251년 9월에 완성되었습니다. 이는 현존하는 세계의 대장경 가운데 가장 오래된 것일 뿐만 아니라 체재와 내용도 가장 완벽한 것으로 오자(誤字)와 탈자(脫字)가 거의 없기로 유명합니다. 유교나라이기에 ‘가지고 있어봐야 쓰일 데가 없는 물건“에 지나지 않았던 팔만대장경은 일본에서 그 가치를 일찌감치 눈치 채어 대장경 요구가 끈질기게 시작되는데 고려 우왕 14년(1388) 포로 250명을 돌려보내 주면서 처음 달라고
경기도 고양시 대자동에는 숙종임금의 장인인 김주신(1661~1721)의 무덤이 있습니다. 김주신의 딸은 숙종의 둘째 왕비인 인원왕후로 그가 한글로 쓴 《션균유사》에 "아버님은 궁궐을 출입할 때마다 근신하여 나막신의 앞부분만 보고 다녀 10년이나 아버지를 모신 나인도 얼굴을 잘 알아보지 못했다."라고 할 정도로 김주신은 겸손한 선비였습니다. 왕비가 된 딸에게 부담을 지우지 않게 했을 뿐 아니라 김주신은 홀어머니에게 극진한 효자로도 소문난 사람이었습니다. 김주신은 다섯 살에 아버지를 여의고 어머니의 사랑 속에서 자라면서 아버지가 없는 것을 한으로 여겨 글공부에 전념하였지요. 어머니가 밤늦도록 글 읽는 것을 안쓰럽게 여기자 김주신은 밤늦은 시간에는 목소리를 낮추어 어머니의 걱정을 덜었을 만큼 어머니를 효성으로 모셨습니다. 김주신은 다섯 살 때 아버지를 여의었는데 비석을 실어 나르던 소가 숨이 차서 혀를 빼물고 헐떡이는 것을 보고 너무 측은하여 그 뒤로부터는 소고기를 입에 대지 않았다고 할 만큼 인정도 넘쳤었지요. 또 김주신은 대자동에 모신 아버지 산소를 갈 때마다 멀리 십리(4km) 정도 떨어진 송강고개에 이르러 아버지의 뫼가 보이면 말에서 내려 걸어갔다는 일화가
“작보한바와가티 재작 23일 오후 7시에 세상을 떠난 소파 방정환 씨에 대한 영결식은 금 25일 오후 1시에 부내 경운동 천도교당에서 거행 하얏다. 장지는 시외 홍제원 경성부화장장이라한다.” 동아일보 1931년 7월 26일 자 신문 한켠에는 “故 方定煥氏 今日 永訣式”이라는 짧은 간단한 기사가 실려 있습니다. 소파 방정환 선생은 1931년 7월 9일 갑자기 코피를 쏟고 입원하여 2주 만에 숨을 거두는데 33년의 짧은 생이었습니다. 선생은 1899년 11월 9일 서울 종로구 당주동 야주개(夜珠峴)에서 태어나 열다섯에 선린상고에 입학했다가 가난으로 2년 만에 중퇴하고 열아홉 살에 천도교 3대 교주인 손병희의 셋째 딸과 결혼합니다. 이후 보성전문을 나와 일본 동양대학을 마친 뒤 귀국하여 어린이를 위한 일에 뛰어듭니다. 1923년에 ≪어린이≫ 잡지를 만들고 그해 5월 1일 어린이날을 만들었는데 1939년 일제가 금지해 한동안 지내지 못하다가 해방 뒤인 1946년에 5월 5일로 법령을 공포하여 공식적인 어린이날이 되었습니다. 첫째, 씩씩하고 참되고 인정 많은 사람이 됩시다.
유희경은 13살 되던 해에 아버지가 세상을 떠났는데, 어린 나이에 홀로 흙을 날라다 장사지내고 3년간 여막살이를 했으며 3년상을 마치고 나서는 병으로 앓아누운 어머니를 30년간이나 모신 효자로 소문이 났습니다. 여막살이 중에 마침 수락산 선영을 오가던 서경덕의 문인 남언경에 눈에 띄어 주자가례를 배운 뒤 예학(禮學)에 밝아진 그는 국상이나 사대부가의 상(喪)때는 으레 초빙되었지요. “하룻밤 맘고생에 귀밑머리 희었어요 / 소첩의 맘고생 알고 싶으시다면 / 헐거워진 이 금가락지 좀 보시구려” 이 시는 조선 선조 때의 유명한 여류시인 매창이 그의 정인(情人) 유희경을 그리워하며 지은 <금가락지>입니다. 얼마나 애타게 그리웠으면 가락지 낄 손가락이 여의었을까요? 그렇게 매창이 그리워한 촌은(村隱) 유희경(劉希慶, 1545~1636)은 허균의 <성수시화>에 보면 “유희경이란 자는 천한 노비이다. 그러나 사람됨이 맑고 신중하며 충심으로 주인을 섬기고 효성으로 어버이를 섬기니 사대부들이 그를 사랑하는 이가 많았으며 시에 능했다.”라고 소개합니다. 미천한 신분이라 관직없이 시를 지으며 지내다가 부안지방에 이르러 명기 매창(1573~1610)을 만나 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