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붓을 잡고 글을 쓰려 하니 눈물과 콧물이 얼굴을 뒤덮는다(涕泗被面). 옛날을 추억하노니 이내 감회가 곱절이나 애틋하구나.”라는 글은 영조임금이 어머니 숙빈 최씨 무덤의 돌비석에 쓴 “숙빈최씨소령묘갈 (淑嬪崔氏昭寧墓碣)” 내용입니다. 영조임금은 이렇게 묘갈문을 직접 썼을 뿐만 아니라 어머니 무덤가에 여막을 짓고 시묘살이를 한 효성이 지극한 임금으로도 알려졌습니다. 어린이날, 어버이날, 스승의 날 등이 자리한 5월은 흔히 가정의 달이라고 합니다. 특히 5월은 어버이날이 들어 있어 평소 부족했던 효심을 되돌아보는 달이기도 하지요. 효자이야기로 빼놓을 수 없는 분이 조선 21대 영조(英祖) 임금인데 어머니가 무수리 출신으로 알려진 숙빈 최씨입니다. 당시 무수리는 궁중 하인 중에서도 직급이 가장 낮아서 흔히 “궁녀의 하인”으로 불렸는데 어머니의 천한 신분 때문에 영조는 같은 왕자이면서도 이복형이었던 훗날 경종임금이 되는 왕세자와는 전혀 다르게 주위의 은근한 멸시를 받으며 자랐습니다. 1724년 병약하던 경종이 후사 없이 33살에 죽자 그의 뒤를 이어 조선 제21대 임금이 된
“겨울내내 목이 말랐던 꽃들에게 / 시원하게 물을 주는 고마운 봄비 / 봄비가 내려준 물을 마시고 / 쑥쑥 자라는 예쁜 꽃들 / 어쩜 키가 작은 나도 / 봄비를 맞으면 / 키가 쑥쑥 자라지 않을까? / 봄비야! 나에게도 사랑의 비를 내려서 / 엄마만큼, 아빠만큼 크게 해줄래?” -홍가은/강릉 남강초교 3년- 파릇파릇한 새싹을 키우는 봄비는 대지를 촉촉이 적시고 가은이의 꿈도 쑥쑥 자라게 합니다. 우리 토박이말 중엔 비에 관한 예쁜 말이 참 많습니다. 봄에는 ‘가랑비’, ‘보슬비’, ‘이슬비’가 오고 요즘 같은 모종철에 맞게 내리는 ‘모종비’, 모낼 무렵 한목에 오는 ‘목비’ 따위가 있지요. 여름에 비가 내리면 일을 못하고 잠을 잔다는 ‘잠비’, 더위가 기승을 부릴 때 내리는 시원한 소나기, 비가 갠 뒤에 바람이 불고, 시원해지는 ‘버거스렁이’란 말도 비와 관련이 있지요. 그러나 여름의 폭우인 ‘무더기비’는 달갑지 않습니다. 가을에 비가 내리면 떡을 해먹는다고 ‘떡비’가 있고 겨우 먼지나 날리지 않을 정도로 찔끔 내리는 ‘먼지잼’도 있습니다. 또한, 비가 오기 시작할 때 떨어지는 ‘비꽃’이란 말도 예쁘며, 볕이 난 날 잠깐 뿌리는 ‘여우비’, 아직 비올 기미는
49 아버님 가시고 어머님 또 가시고 꽃내음 밀어오는 아름다운 봄밤에 한 송이 진달래 꽃을 올려드린 이 마음 52 길가다가 여우비에 어머님 생각나고 무지개는 옷이니 입혀드릴 때도 없이 머나먼 나그넷길을 가시었다 하느냐.
우리나라 음악가 세 사람을 꼽는다면, 가야금의 우륵, 거문고의 왕산악, 이론의 박연 선생을 꼽습니다. 흔히 3대 악성이라고 하죠. 가야금의 우륵 선생은 나라가 망하게 되자, 가족을 이별하고 모든 재산을 내던지면서 오직 가야금 한 대를 가슴에 안은 채 신라로 망명하게 됩니다. 신라 조정에서는 당시 제2 서울이었던 지금의 충주 지방에 편하게 살게 했죠. 나라 잃은 설움을 달래려고 우륵 선생은 날마다 가야금을 탔습니다. 특히 달 밝은 밤이면 뒷산에 올라 두고온 고향 하늘을 그리며 애절한 마음을 가야금에 실었던 것이죠. 그러던 어느 날 진흥왕을 만나게 되는데 이때 진흥왕의 부탁으로 신라의 세 제자에게 그가 가진 모든 것 곧 가야금뿐만이 아니라 노래와 춤까지 가르치게 됩니다. 그런데 그걸 다 배운 제자들이 선생님에게 배운 열두 곡을 다섯 곡으로 줄이는 일을 저질렀습니다. 선생은 이에 처음엔 무척 화를 냅니다. 하지만, 고친 곡을 다 듣고 나더니 “매우 훌륭한 음악이다.”라면서 눈물을 흘렸다고 하지요. 악보 없이 전해오는 우리나라 민속악 대부분은 선생의 가락에 제자의 음악이 덧
“나는 무량수전 배흘림기둥에 기대서서 사무치는 고마움으로 이 아름다움의 뜻을 몇 번이고 자문자답했다.” 위는 최순우 선생의 ≪무량수전 배흘림기둥에 기대서서(학고재)≫에 나오는 글 일부입니다. 최순우 선생은 “배흘림기둥”이 얼마나 아름답기에 사무치는 고마움을 얘기했을까요? 한국 전통집들은 백성집으로부터 궁궐에까지 모두 나무집 곧 목조건축입니다. 목조건축의 기둥은 원통기둥, 배흘림기둥, 민흘림기둥의 3가지 모양이 있습니다. 먼저 원통기둥은 기둥머리ㆍ기둥몸ㆍ기둥뿌리의 지름이 모두 같은 기둥을 말합니다. 이게 보통 집의 일반적인 형태일 것입니다. 그와는 달리 민흘림기둥은 기둥머리 지름이 기둥뿌리 지름보다 작게 마름질(옷감이나 재목 등을 치수에 맞추어 마르는 일)한 기둥인데 구조적이기보다는 시각적인 효과를 위해 그렇게 했다고 하지요. 해인사 응진전(應眞殿), 화엄사 각황전(覺皇殿), 수원 화성의 장안문에서 볼 수 있습니다. 그런가 하면 배흘림기둥도 있습니다. 배흘림기둥은 기둥의 중간 곧 기둥몸이 굵고 위(기둥머리)ㆍ아래(기둥뿌리)로 가면서 점차 가늘게 되어가는 모양의 기둥입니다. 배흘림기둥은 영주 부석사 무량수전(無量壽殿)과 강진 무위사 극락전 ·구례 화엄사 대웅전에
“붉은 해 푸른 하늘 품고 나온 / 3대 독자 영식이 주려고 / 어머니 손 놀려 저고리 지었지 / 한 땀 한 땀 바늘 지나간 자리 / 어머니 마음자리 / 희고 고운 새 옷 입고 / 곱게곱게 크라고 / 어머니 호롱불 밑에서 / 마음 새겨 만든 저고리.” - 이고야 ‘배냇저고리’ - 아기가 태어나서 처음 입는 옷, 배냇저고리. 오희문이 쓴 임진왜란 때 9년 3개월에 걸친 피란일기 『쇄미록(尾錄)』에 “오늘이 곧 새로 난 아기의 삼일이다. 몸을 씻기고 비로소 새 옷을 입히고 이름을 창업이라고 지었으니…"라는 대목이 있는데 여기서 새 옷이 바로 배냇저고리를 뜻합니다. 태어난 지 이레 만에 입힌다고 하여 일안저고리, 이레안저고리, 이란저고리라고도 하였고, 배안의 옷, 첫돈방이라고 했으며, 제주도는 특이하게 삼베로 지어 봇뒤창옷라고 했지요. 배냇저고리는 품을 넉넉히 하고 길이를 길게 해 배 아래까지 덮었으며, 소매도 길게 해서 손을 완전히 감쌌습니다. 깃과 섶을 달지 않고, 아기의 수명이 실처럼 길게 이어지라는 뜻에서 고름 대신 길게 무명 실끈을 꼬아 붙여 앞을 여며줍니다. 갓
“동북면(東北面) 길주(吉州) 명간령(明間嶺)의 잉읍암(仍邑巖)에 돌이 있는데, 그 우는 소리가 종소리와 같았다. 사신을 보내어 해괴제(解怪祭)를 지내게 했다.” 태종실록 3권, 2년(1402) 1월 1일 자에 있는 기록입니다. 이렇게 옛 사람들은 이해할 수 없는 일이 생기면 ”해괴제“라는 제사를 지내 신들을 달래려고 했지요. 조선왕조실록의 기록을 보면 지질·해일 같은 재앙은 물론 노루나 표범이 한양 도성 안에 들어오거나 벼락이 떨어져 사람이 죽었을 때 또는 바닷물이 붉어지는 적조현상이 생겼을 때도 해괴제를 지내고 있습니다. 그뿐만 아니라 기형 소가 태어나거나 부엉이가 울어만대도 해괴제를 지냈으며 태종 5년(1405년) 4월 19일에는 삼사동 구리정에서 나흘 동안 맷돌 가는 소리가 난다해서 해괴제를 지냈다는 기록이 있습니다. 고려사(高麗史) 현종 14년(1023) 5월조에 “금주(金州:김해)에 지진이 있었다. 이때부터 지진이 발생한 지역에 해괴제 지내기 시작했다.”라는 기록을 보면 이미 고려 때부터 해괴제는 시작되었던 것으로 생각됩니다. 조선 성종 때는 “이달 9일에
해바라기를 그린 화가 고흐는 자신의 귀를 잘랐지만 조선시대 때 자신의 눈을 찔러 애꾸가 된 화가가 있습니다. 벗과 함께 금강산에 유람갔다가 아름다운 구룡연 호수에 빠져 죽겠노라고 성큼성큼 걸어 들어간 일화가 있는 화가 최북(崔北, 1712~1786?)은 자신의 그림에 자부심이 강했던 만큼 권력자의 비위에 맞는 그림을 그리지 않은 화가로 유명합니다. 그런 최북의 그림에 호계삼소(虎溪三笑)가 있습니다. 는 중국 동진 시대의 고승 혜원 법사가 친한 벗을 만난 즐거움을 묘사한 그림이지요. 혜원 법사는 동림사라는 절에서 오로지 수행에만 전념하던 수행자로서 한 번도 동림사 앞을 흐르는 시내를 벗어난 적이 없었습니다. 손님 배웅 길에도 이 시내를 건넌 적이 없을 정도였습니다. 그런 그에게 어느 날 시인 도연명과 도사 육수정이 찾아옵니다. 이들과 지내다 배웅 길에 그만 시냇물을 건너고 말았지요. 얼마나 이야기에 빠졌으면 시내를 건넌 사실조차도 잊다가 호랑이 소리가 들리자 그때야 시내를 건너지 않는다는 원칙을 깬 것을 알고 세 사람이 모두 웃었다는 그림이 호계삼소입니다. 이 이야기에
흙물에는 못 살고 맑아야만 산다니 너야말로 둔갑해서 사대부가 되어얀대 세상이 하 어지러워 낚시없이 나꾸련다 재일본 한국문인협회 회장 김리박
차라리 뒷간 속의 구더기 되어서도 내 맘은 내 맘이요 왜(倭) 속은 안 되리라 천년을 두고 살아도 한 얼만을 지니리. 좋으료 시정살이 무명도 죽살이니 냉대가 만년이건 괄시가 천년이던 내 삶은 내 삶인 것을 울고불고 할까나. 한흙 48호(2010) -한 길, 셋째가름의 둘과 셋- *죽살이 : 죽고살기 / 시정: 市井(인가가 많이 모인 곳) 무명 :無名 / 냉대 :冷待 재일본 한국문인협회 회장 김리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