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들하 노피곰도다샤”로 시작하는 ‘정읍사’를 우리는 국어시간에 접할 수 있었습니다. 정읍사는 멀리 떠나보낸 남편을 그리는 여인의 애절한 사랑의 노래입니다. 그 정읍사를 바탕으로 만들어진 음악 수제천(壽齊天)이 있습니다. 국악과 출신인 문성모 목사가 독일의 한인교회에서 대학생들에게 '한국적인 자각을 위한 질문'이라는 제목으로 서양음악과 국악을 견주는 질문을 던졌습니다. 그 물음 속에는 서양 클래식을 대표한다는 “운명 교향곡”과 우리의 수제천“을 대비합니다. 그만큼 수제천은 우리 음악을 대표하는 음악이라 해도 지나치지 않습니다. 수제천 악기 편성은 당초 삼현육각(三絃六角)인 향피리 2, 젓대(대금) 1, 해금 1, 장구 1, 좌고 1 등 6인 편성이었으나 지금은 장소나 때에 따라 아쟁ㆍ소금이 더해지는 등 달라지기도 하지요. 향피리가 주선율을 맡고 있으며 대금과 해금이 향피리가 쉬는 여백을 받아 연주하는 연음 형식으로 장중함과 화려함을 더해 줍니다. 수제천을 처음 듣는 사람들은 곡의 느린 속도에 우선 놀라게 됩니다. 메트로놈으로 측정하기조차 힘들다는 이러한 속도는 인간의 일상적인 감각을 크게 초월해 있습니다. 그뿐만 아니라 수제천은 한 박 한 박의 길이가 또한 불
7세기 일본 아스카시대의 유물인 나라 호류지 옥충(비단벌레)주자는 2,563장의 비단벌레 날개를 깔아 만든 작품입니다. 이 옥충주자는 지금 남아있는 600년 무렵 유물 중 가장 귀한 것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이 작품이 일본 것이냐 한국 것이냐 하는 논란 속에 일본과 한국 미술사를 깊이 연구한 미술사학자 존 코벨은 옥충주자에는 일본에 없는 호랑이 그림이 있고, 사천왕상이 있는 등 한국인이 만들었다는 분명한 증거가 있다고 강조했습니다. 호류지 옥충주자처럼 비단벌레로 만든 유물이 경주에도 있습니다. 1973년 경주 황남대총 남분(임금 무덤)의 부곽에서 출토된 ‘비단벌레 장식 금동 말안장 뒷가리개’가 그것이지요. 비단벌레 날개를 촘촘히 깔아 붙인 이 말안장 뒷가리개는 눈이 부실 정도입니다. 말안장 뒷가리개 말고도 비단벌레로 장식된 유물은 화살통도 있습니다. 그렇다면 고대사회에서 왜 비단벌레를 장식물에 자주 사용했을까요? 비단벌레 날개가 화려하고 아름답다는 것 외에 또 다른 까닭이 있습니다. 명·청시대 편찬된 중국 광동 지방 지리지인 광동통지에는 금화충(비단벌레)이라는 곤충을
중국인들은 신라시대 때부터 우리 종이를 ‘계림지(鷄林紙)’, ‘고려지’, ‘조선지’로 부르며 좋아했습니다. 그래서 송나라부터 청나라에 이르기까지 고려나 조선 사신들이 들고 가는 선물 목록에는 꼭 ‘종이’가 들어있었다는 데서 우리 종이가 대단했음을 알 수 있지요. 더구나 당시 중국 사람들은 우리 종이의 질이 비단으로 만들었다고 착각하기까지 했는데, 명나라 "일통지(一統志)" 때 와서야 비로소 닥나무로 만들었다는 것을 알았을 정도입니다. 일본의 경우도 오십보백보였습니다. 조선왕조실록에는 일본이 조선정부에 대장경을 달라는 기록이 80여 차례 있습니다.이러한 잦은 일본의 대장경 요구에 조선 정부는 “지금 찍어 놓은 게 바닥이 났다. 종이를 보내면 찍어 주겠다”고 한 적이 있는데 1416년 (태종 16년) 10월 13일자에 일본에서 종이와 먹을 가지고 와서 대반야경을 인쇄해 달라고 요청했는데 그 종이가 대장경을 인쇄할 수 없을 만큼 조잡하고 형편 없었다는 기록이 보입니다. 그러나 지금은 오히려 일본 종이가 세계적인 한지로 인정받습니다. 우리가 입으로 세계화를 부르짖으며 우리
바둑은 오랜 옛날부터 우리 겨레가 즐겼던 놀이의 하나으로 한중일 세 나라가 모두 좋아합니다. 그래서 바둑판을 아끼는 이들도 많았고, 대단히 아름다운 바둑판도 전해져 옵니다. 특히 백제 마지막 임금인 의자왕이 일본에 선물한 바둑판과 알이라고 알려진 “목화자단기국(木畵紫檀碁局)”은 그 화려함이 대단하지요. 목화자단기국은 일본 왕실의 보물을 보관 하는 곳인 나라 정창원에 보관 중인데 상아로 새겨진 옆면의 그림이 너무도 아름다워 일본 왕실 보물이자 최고의 예술품으로 꼽힙니다. 그밖에 일본 도쿄 국립박물관에 소장된 용과 호랑이 무늬 바둑판 용호문나전기반(龍虎文螺鈿碁盤)도 그 우아한 자태를 뽐냅니다. 또 재일동포가 정조문 선생이 운영하는 교토의 고려미술관에도 아름다운 바둑판이 있습니다. 바로 나전장생문기반(螺鈿長生文碁盤)이 그것인데 바둑판에는 십장생 무늬를 새겨 넣었습니다. 특히 이 바둑판은 16개 돌을 미리 놓고 두는 한국 고유의 바둑인 순장바둑판으로 요즘의 바둑판(45㎝×42㎝)과는 달리 45㎝×45㎝로 정 사각형입니다. 그리고 이 바둑판은 바둑돌을 놓을 때마다 맑고 경쾌한 소리가 난다니 가히 예술작품이 아니고 무엇일른지요. 바둑의 다른 이름은 혁(奕)·혁기(奕棋)
오늘은 24절기의 네 번째 춘분(春分)입니다. 춘분을 즈음하여 농가에서는 농사준비에 바쁜데 농사의 시작인 애벌갈이(논밭을 첫 번째 가는 일)을 엄숙하게 행하여야만 한 해 동안 걱정 없이 풍족하게 지낼 수 있다고 믿었습니다. ≪고려사≫ 사한조(司寒條)에 “고려 의종 때 의식으로 맹동과 입춘에 얼음을 저장하거나 춘분에 얼음을 꺼낼 때 사한단(司寒壇)에서 제사한다.”라는 기록이 있는 것으로 보아 이날부터 얼음을 꺼내 썼던 것 같습니다. 춘분날은 농사가 시작되는 시기로 "하루 밭 갈지 않으면 한해 내내 배고프다"라고 했습니다. 이때는 겨울철에 얼었다 땅이 풀리면서 연약해진 논두렁과 밭두렁이 무너지는 것을 막으려고 말뚝을 박기도하고 하늘바라기논(천수답)처럼 물이 귀한 논에서는 물받이 준비도 했지요. 또 춘분 때 날씨를 보아 그 해 농사의 풍흉, 가뭄과 홍수를 점치기도 했습니다. ≪증보산림경제≫ 권15에 보면 춘분에 비가 오면 병자가 드물다고 하고, 해가 뜰 때 정동(正東)쪽에 푸른 구름 기운이 있으면 보리에 적당하여 보리 풍년이 들고, 만약 청명하고 구름이 없으면 만물이 제대
우리 겨레는 뛰어난 문화재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동안 임진왜란 등 전란에다 일제강점기를 거치면서 수많은 문화재가 나라밖으로 빠져나갔습니다. 문제는 이렇게 빠져나간 문화재가 거의 도둑맞거나 빼앗긴 것이라는데 있습니다. 그렇게 빠져나간 문화재를 국립문화재연구소에서는 꾸준히 확인 작업을 해왔습니다. 그동안 확인되었던 나라밖 문화재는 116,896점이었는데 지난해만 2만3천여 점이 늘어나 이제 모두 140,560점(20개국 549개 기관과 개인)이 있는 것으로 확인됐습니다. 특히 그 가운데는 일본이 65,000여 점으로 가장 많고, 그 다음이 미국으로 38,000여 점, 독일 10,000여 점 순으로 나타났지요. 국립문화재연구소에서는 나라밖에 흩어져있는 한국문화재의 현황파악을 위해 각국 소재 한국문화재 목록화 작업과 학술조사 사업을 지속적으로 추진하고 있는데 지난해 미국 98개, 독일 지역 16개 박물관 및 도서관 등 한국문화재 소장기관의 협조를 받아 그동안 그 존재가 알려지지 않았던 한국문화재에 대한 목록 작업을 했습니다. 국립문화재연구소는 앞으로도 알려지지 않
자격루(自擊漏)를 백과사전에서 찾아보면 “자동으로 시보를 알려주는 장치가 되어 있는 물시계”라고 나옵니다. 요즘말로 하면 바로 자명종물시계가 되는 것이죠. 다시 말하면 자격루는 물의 흐름을 이용하여 만든 것인데 자동시보장치까지 갖춘 물시계로 세종 16년(1434년)에 장영실 등이 주관하여 만든 것입니다. 이 자격루는 세종임금이 펼친 천문기구와 시계를 만드는 사업 곧 “간의대사업(簡儀臺事業)”의 중요 품목이지요. 자격루는 대파수호에서 중파수호로 중파수호에서 소파수호로 물을 흘려보내 시간을 가늠케 합니다. 그런 다음 24시간 동안 두 시간에 한번 종을 치게 하고, 해가 진 다음 부터 해가 뜰 때까지는 20분마다 북과 징도 치게 했습니다. 동시에 시간마다 子, 丑, 寅, 卯 등 12지신 글씨 팻말을 쥔 인형들이 나와 시간을 알려주기도 하지요. 파루를 치는 군사가 격무에 시달려 깜빡 조는 바람에 파루 치는 시간을 놓쳐 매 맞는 것을 본 세종이 자격루를 만들라고 한 것이 계기가 되었습니다. 자명종시계를 만들면 군사가 꼬박 시계만 들여다보는 수고로움을 덜 수 있다고 생각한 세종
치욕의 역사입니다만 명성황후는 일제의 흉계에 의해 무참히 죽어간 조선의 국모입니다. 명성황후 시해 사건 이후 일제는 조선을 강제병합했고 식민지로 만들었기 때문에 명성황후 유물은 남은 게 거의 없습니다. 그런데 지난해 10월 국립고궁박물관에서 펴낸 ≪명성황후 한글편지와 조선왕실의 시전지≫를 보면 명성황가 쓴 많은 한글편지와 아름다운 시전지(시나 편지를 쓰는 종이)가 소개되어 있습니다. 여기 실린 고려대학교 한국학연구소 이기대 학술연구 교수 글에 따르면 현재까지 찾아진 명성황후 편지는 모두 134점 정도이며 이 편지글은 오늘날 귀한 유물입니다. 그동안 실물이 확인된 황실 여성 최초의 한글편지는 인목대비 김씨(선조) 것이있으며, 이밖에 남아있는 것은 장렬왕후 조씨(인조), 인현왕후 민씨(숙종), 인선왕후 장씨(효종), 혜경궁 홍씨, 순명효황후 민씨(순종) 등이 쓴 편지가 있습니다. 이들의 공통점은 당시 천대 받던 언문을 살려 편지를 썼고, 교지 글도 한글로 쓰는 등 글줄께나 하던 학자들 대신 우리글을 사랑하였으며 이것은 그동안 한글 연구와 발전에 큰 도움이 되었습니다. ≪
매화보다도 더 일찍 눈을 뚫고 꽃소식을 전하는 얼음새꽃을 아십니까? 얼음새꽃은 눈 속에서도 꽃을 피우며 숲 속 습기가 많은 그늘에서도 자라는 꽃으로 키는 보통 10~30cm입니다. 쌓인 눈을 뚫고 나와 꽃이 피면 그 주위가 둥그렇게 녹아 구멍이 난다고 하여 눈색이꽃이라고도 하는데 보통은 생명력이 강하다하여 한자말 복수초(福壽草)로 알려졌습니다. 설날에 핀다고 원일초(元日草), 눈 속에 피는 연꽃 같다 하여 설련화(雪蓮花), 꽃이 황금잔처럼 생겼다고 측금잔화(側金盞花)라고 하며 눈송이꽃이라고도 불리는 등 꽃이름도 참 여러 가지입니다. “모진 겨울의 껍질을 뚫고 나온 / 핏기 어린 꽃의 날갯짓을 봐 / 햇살 한 모금에 터지는 神의 웃음을 / (중략) 모두들 봄이 아니라 할 때 / 어둠 속 깨어나지 않는 벽을 넘어 / 나긋나긋 세상을 흔들고 있구나 / 낙엽더미의 굳은 목청을 풀어 / 마른 뼈들 살아 굼틀하는 소리 / 산을 들어 올리는 저 생기를 봐.” 한현수 시인은 얼음새꽃(복수초)을 이렇게 노래합니다. 모두들 봄이 아니라 할 때 나긋나긋 세상을 흔들며 꽃을 피는 얼음새꽃에는 산을 들어 올리는 생기가 엿보입니다. 아직 꽃샘추위가 오는 봄을 시샘하고 있지만 얼음새꽃
지금 강도 8.8의 지진이 난 일본은 그야말로 “초토화”되었고, 사람들을 구해내기 위한 사투에 들어갔습니다. 우리나라는 역사적으로 볼 때 다행히 그런 큰 지진은 없었지만 세종 때 한성에 큰 불이 난 적이 있었습니다. 세종실록 31권, 8년(1426년) 2월 15일 기록에 보면 “한성부에 큰 불이나 행랑 1백 6간과 중부 인가 1천 6백 30호와 남부 3백 50호와 동부 1백 90호가 불에 탔고, 남자 9명, 여자가 23명이 죽었는데, 타죽어 재로 화해버린 사람은 그 수에 포함되지 않았다.”라는 기록이 보입니다. 이 일 이후 세종임금은 명을 내려 소방관청 금화도감(禁火都監)을 설치했습니다. 그리고는 집 사이에 방화장(防火墻, 불을 막는 담)을 쌓고, 곳곳에 우물을 팠으며, 초가지붕을 기와지붕으로 고쳤지요. 이 금화도감은 수성금화도감(修城禁火都監)이 되었다가 성종 12년에는 수성금화사(修城禁火司)로 고쳤습니다. 수성금화사(修城禁火司)에는 멸화군(滅火軍)이란 상근소방대원이 있었는데 불을 없애는 군사라는 말이 재미있습니다. 정원은 50명이었고 24시간 대기하고 있다가 불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