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문화신문=김영조 푸른솔겨레문화연구소장] “장장채승(長長彩繩:오색의 비단실로 꼰 긴 동아줄) 그넷줄 휘늘어진 벽도(碧桃, 선경[仙境]에 있다는 전설상의 복숭아)까지 휘휘 칭칭 감어 매고 섬섬옥수(纖纖玉手) 번듯 들어 양 그넷줄을 갈라 잡고 선뜻 올라 발 굴러 한 번을 툭 구르니 앞이 번 듯 높았네. 두 번을 구르니 뒤가 점점 멀었다. 머리 위에 푸른 버들은 올을 따라서 흔들 발밑에 나는 티끌은 바람을 쫓아서 일어나고 해당화 그늘 속의 이리 가고 저리 갈제” 이 구절은 판소리 <춘향가> 가운데서 춘향이가 그네 타는 장면인데, 그네뛰기는 단옷날의 대표적 민속놀이다. 우리 겨레는 예부터 설날, 한식, 한가위와 함께 단오를 4대 명절로 즐겼지만 이제 그 명맥이 끊길 위기에 놓였다. 단오의 이름들과 유래 단오는 단오절, 단옷날, 천중절(天中節), 포절(蒲節 : 창포의 날), 단양(端陽), 중오절(重午節, 重五節)이라 부르기도 하며, 우리말로는 수릿날이라 한다. 단오의 '단(端)'자는 첫 번째를, '오(午)'는 다섯으로 단오는 '초닷새'를 뜻한다. 중오는 오(五)의 수가 겹치는 음력 5월 5일을 말하는데, 우리 겨레는 이날을 양기가 왕성한 날이라 생각했다
[우리문화신문=김영조 푸른솔겨레문화연구소장] 문화체육관광부 국립한글박물관(관장 김일환)은 6월 호국보훈의 달을 맞아, 한글로 나라를 지키고 한글을 통해 세상을 일깨운 ‘한글보훈인물’을 기린다. 한글로 문화독립을 이루어 낸 수많은 위인 가운데 시대와 분야에 따라 안배하여 정리한 10여 명을 기린다. 새로운 문자문화 시대를 연 사람들 조선의 제4대 임금 세종(世宗, 1397-1450)의 훈민정음 창제는 말과 글이 하나 된 풍요로운 세상을 열었고, 정인지(1396-1478), 박팽년(1417-1456), 신숙주(1417-1475), 성삼문(1418-1456) 등의 집현전 학사는 세종을 도와 훈민정음의 해설서 《훈민정음 해례본》을 만들어, 새로 만든 문자인 한글을 사람들이 익히고 쓸 수 있도록 널리 퍼뜨리는 데 이바지했다. 이들은 조선은 물론 지금의 한국을 풍요로운 문자문화 사회로 이끈 주역들이다. 한문 중심 사회에 한글로 맞선 사람들 한글문학 확산에 이바지한 허균(1569~1618)과 한글로 외국어를 가르친 역관 최세진(1468~1542)은 당시 지식사회의 근본을 이루었던 한자나 중국어가 아닌 한글을 써서 한글의 대중화와 보편화에 이바지했다. 한자문화권인 동아시아
[우리문화신문=김영조 푸른솔겨레문화연구소장] 국가무형유산엔 없지만, 시도무형유산에는 ‘필장(筆匠)’이 있는데 필장은 문방사우(文房四友)의 하나인 붓을 만드는 사람 또는 기술을 말합니다. 붓은 털의 품질이 가장 중요한데, 붓끝이 뾰족해야 하는 첨(尖), 가지런해야 하는 제(濟), 털 윗부분이 끈으로 잘 묶여서 둥근 원(圓), 오래 써도 힘이 있어 한 획을 긋고 난 뒤에 붓털이 다시 일어나야 한다는 건(健)의 네 가지 덕을 갖추어야 한다고 하지요. 털의 재료로는 염소(백모)ㆍ여우ㆍ토끼ㆍ호랑이ㆍ사슴ㆍ이리ㆍ개ㆍ말ㆍ산돼지ㆍ족제비 등의 털을 쓰며, 특히 노루 앞가슴 털로 장식용 붓을 만들기도 하는데 이를 ‘장액붓’이라고 합니다. ‘제작과정은 우선 털을 고르게 한 뒤에 적당량을 잡아 말기를 한 다음 털끝을 가지런히 다듬는 ‘물끝보기’ 과정을 거친 뒤 대나무와 맞추고 마무리 작업을 하는 등 100여 번의 손이 가야만 하지요. ‘능서불택필(能書不擇筆)’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글씨를 잘 쓰는 이는 붓을 가리지 않는다는 뜻으로, 경지에 오른 사람은 도구나 재료에 구애받지 않고 자기 실력을 충분히 발휘할 수 있다고 하지요. 선무당이 장구 나무란다는 말도 있고, 훌륭한 목수는 연장
[우리문화신문=김영조 푸른솔겨레문화연구소장] “유성룡은 조정에 선 지 30여 년, 재상으로 있은 것이 10여 년이었는데, 임금이 특별히 사랑하여 귀를 기울여 그의 말을 들었다. 경악(신하들이 임금에게 유교의 경서와 역사를 가르치는 일)에서 선한 말을 올리고 임금의 잘못을 막을 적엔 겸손하고 뜻이 극진하니 이 때문에 상이 더욱 중히 여겨 일찍이 말하기를 ‘내가 유성룡의 학식과 기상을 보면 모르는 사이에 진심으로 기뻐하며 정성을 다하여 따를 때가 많다.’라고 하였다.” 위는 《선조실록》 211권, 선조 40년(1607) 5월 13일 기록으로 ‘전 의정부 영의정 풍원 부원군 유성룡의 졸기’ 부분으로 “임금이 유성룡의 학식과 기상에 진심으로 기뻐하며 정성을 다하여 따를 때가 많다.”라고 한 부분이 소개되어 있다. 백성을 버리고 의주를 건너 명으로 도망가려 했다가 유성룡의 간곡한 만류로 국경을 넘지 않았음을 물론 조선시대 최악의 임금 가운데 한 명으로 꼽히는 선조도 류성룡을 이렇게까지 칭찬하지 않을 수 없었나 보다. 그 서애 유성룡이 재상이었을 당시 그의 생가가 있었던 서울 중구 필동 서애길에서는 어제(6월 7일) 저녁 4시 ‘남촌문화포럼’(대표 김복규) 주최, ‘(
[우리문화신문=김영조 푸른솔겨레문화연구소장] 제주도 서귀포시 안덕면에는 ‘카멜리아힐’이 있습니다. ‘카멜리아힐’은 주로 동백꽃으로 많이 알려졌지만, 최근엔 수국꽃으로도 유명합니다. 우리의 토종 동백꽃은 모두 붉은 홑꽃잎이며, 분홍동백과 흰동백은 아주 드물게 만날 수 있습니다. 겹꽃잎에 여러 가지 색깔을 갖는 동백도 흔히 볼 수 있지만, 이는 자연산이 아니라 일본인들이 만든 고급 원예품종이 대부분입니다. 동백은 서남해안 지방은 물론 우리나라 섬 지방 어디서든 우리를 반갑게 맞아주는데 한국과 대만, 일본, 중국 등에 분포하는 동아시아 원산 꽃입니다. 문헌 가운데 고려 말 이규보의 《동국이상국집(東國李相國集)》에 등장하는 것으로 보아 우리나라에서는 오래전부터 동백을 좋아했던 것으로 보입니다. 동백나무는 정부가 지정한 나라 밖 반출 승인 대상 생물자원으로 몇몇 자생지가 천연기념물로 지정돼 있을 정도로 우리 토종 꽃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동백(冬柏)으로 부르는 것을 학명이 ‘Camellia japonica L.’이라 하여 ‘카멜리아힐’이라고 부르는 것은 오히려 멋이 없어 보입니다. 물론 ‘카멜리아힐’에는 곳곳에 “동백 기념품은 여기”, “꽃 한 송이, 풀 하나가 모여
[우리문화신문=김영조 푸른솔겨레문화연구소장] 지난 5월 26일 서울남산국악당에서는 이애주한국전통춤회의 ‘법열곡(法悅曲)’ 공연이 열렸습니다. 특히 이날 본 승무는 그동안 많은 무대에서 보아온 모든 승무를 잊게 만든 거대한 춤이었지요. 승무가 느린 염불부터 빠른 당악까지 다양한 장단에 추는 춤과 북놀음까지 담고 있는 전통춤 중의 기본이자 법무이기 때문만은 아니었습니다. 또한 한성준에서 한영숙으로, 한영숙에서 이애주로, 이애주에서 그의 제자들로 이어진 전 과장 춤사위를 모두 담은 완판 승무였기 때문만도 아니었습니다. 이날 승무는 삶의 온갖 몸짓이 함축적으로 표현된 춤일 뿐만이 아니라 하늘과 땅과 그 사이 인간이 추는 춤은 삼재(하늘ㆍ땅ㆍ사람) 사상의 토대 위에 과거ㆍ현재ㆍ미래의 삼세를 연결하는 힘이 있어 춤 자체가 단순히 어떤 행위를 표현하기 위한 몸짓이 아니라, 우주 만물의 원리를 몸소 깨닫는 과정이기 때문이어서 그랬을 것이란 생각이 들었습니다. 보통의 승무에서는 짧은 시간 한 사람의 춤꾼이 한삼을 뿌리며, 북채를 들고 북을 두드리면서 무대를 사른다면 이번 무대는 7인의 춤꾼이 긴 시간 진리를 깨달아 마음속에 기쁨을 느끼며 법열을 뿜어내고 있었지요. 흔히 보는
[우리문화신문=김영조 푸른솔겨레문화연구소장] 정오의 꽃 - 오시영 동자승이 부처님 귀에 대고 물었다 왜 항시 웃으세요 부처님이 대답했다 네가 내 귀를 간지럽히니 웃지 어렸을 적부터 종교에 뜻을 두는 아이는 예나 지금이나 드물어서, 동자승은 보통 자기 뜻과는 상관없이 되기도 한다. 곧, 부모에게 버림받거나 전쟁이나 돌림병 때문에 부모를 잃고 죽어가는 아이들을 스님이 거두어 동자승으로 키우는 경우도 많다. 전 근대 때도 고아원이 있었기는 했지만, 아이들을 무제한 보육할 여건이 안 되기에 동자승이 되는 경우도 흔했다. 과거 중세 유럽에서 갈 곳 없는 아이들이 수도원에 들어가 자라다가 수도자가 되는 것과 비슷한 경우다. 요즘은 부처님오신날 행사를 앞두고 일반 어린이들이 짧게는 며칠에서 길게는 1주일 정도 삭발하고 단기출가 체험을 해보는 사례로 동자승이 돼보기도 한다. 지난 2022년에는 어린이들에 희망과 용기를 선사했다는 어린이 영화 ‘액션동자’가 개봉되기도 했다. <불교신문> 2023년 5월 11일 자에는 “‘머리 깎으니까 어떠냐?’는 총무원장 스님 질문에 한 동자승이 ‘땀이 안 나서 좋다’고 해서 좌중에 폭소가 터지기도 했다.”라는 기사가 뜬 적이 있
[우리문화신문=김영조 푸른솔겨레문화연구소장] “얼마 전 연휴에 재수할 때 인연을 맺은 친구들과 환갑을 기념하기 위해 태국의 파타야를 다녀왔습니다. 여행 첫날 시차 적응을 할 겸 여독을 풀기 위해 파타야 해변을 1시간 30분 정도를 걸으면서 몸 상태를 점검해 보았죠. 당시 파타야 낮 기온은 대략 30℃로 걷기 시작하니 바로 땀이 비 오듯 흘렀습니다. (가운데 줄임) 계속 걷다 보니 대략 1시간쯤 지나자 더 이상 땀이 나지 않고 더위가 느껴지지 않으면서 몸이 상쾌해졌습니다.” 위는 《유용우 한의사의 맨발걷기 처방전》 책 앞부분에 나오는 내용이다. 이런 ‘처방전’ 류의 책들은 그저 논리에 치우친다는 느낌을 받기가 일쑤인데 이 책은 직접 유용우 한의사가 환자를 치료하고 자기 건강을 위한 목표에 도달하기 위해서 위처럼 실제 몸으로 체득한 내용을 풀어 놓았다는 데 매력이 있다. 유용우 한의원을 방문해 보면 원장실에 맨발걷기를 해볼 수 있는 도구들을 준비해 놓고 수시로 걷는 모습을 목격할 수도 있다. 책에서 유용우 한의사는 “맨발걷기는 마라톤의 ‘러너스하이(runners’ high)‘ 같은 일체감을 가장 쉽고 자주 느낄 수 있는 운동법입니다. 몸과 마음이 완전히 하나가
[우리문화신문=김영조 푸른솔겨레문화연구소장] 며칠 전 유인촌 문화체육관광부 장관의 말 "세종대왕 동상이 앞에 있는데 그 뒤편에 보이는 한자로 쓰인 현판은 이상하다는 생각이 든다."라고 한 말에 누리꾼 가운데는 “수도 서울 한복판 광화문 현판 한글로 바꿉시다.“라고 댓글을 단 사람이 있는가 하면 ”힘들게 복원한 거 그냥 둬라, 한자로 쓰여있다 해서 한국 역사가 사라지는 것도 아니다.“라고 부정적인 댓글을 쓴 사람도 있었습니다. 여기서 반대 댓글을 단 누리꾼들을 보면 유 장관의 뜻을 제대로 헤아려 볼 생각 없이 무조건 반대만 한 것도 있어 보여서 안타까웠습니다. 분명히 해야 할 것은 지금 달려있는 광화문 한자 현판은 세종 때의 원형도 아니고 고종 때 훈련대장 임태영이 세종 때 ’원형‘을 모른 채 썼는데 그것도 훈련대장이 직접 썼던 것이 아닌 복제품이어서 그 현판을 붙이는 것은 일반적으로 말하는 문화재로의 복원이 아닌 것입니다. 광화문은 한문에 능통했던 세종임금이 자기 기득권을 버리고 백성을 위해 훈민정음을 창제했던 경복궁의 정문인데 한자로 복제품을 만들어 붙이는 것은 문제입니다. 한글은 작은 중화를 벗어난 자주 문화를 상징합니다. 많은 세계인이 광화문을 배경으로
[우리문화신문=김영조 푸른솔겨레문화연구소장] 원컨대 이 향과 꽃이 법계에 두루 하여 미묘한 광명의 토대가 되게 함으로써 모든 하늘의 음악과 하늘의 보배 향 모든 하늘의 좋은 음식과 하늘의 보배로운 옷 헤아릴 수 없는 묘한 법의 티끌이 되어 하나하나의 티끌에서 일체의 부처가 나오고 하나하나의 티끌에서 일체의 가르침(법)이 나오니 걸림 없이 돌면서 보기 좋게 장엄되어 두루 일체의 불국토 가운데 이르고 시방법계의 삼보님 앞에 이르러 그곳에 이 몸이 있어 공양을 올리게 하옵소서 무대에서는 나비춤을 추고 ‘향화게(香花偈)’를 게송한다. 불자가 아니어도 나비춤과 게송에 나도 모르게 빨려 들어간다. 민속학자 임동권은 이애주춤 법열곡에 대해 “좋은 춤이란 남에게 보여주기 위한 춤이 아니라 스스로 내면의 감춰진 세계를 밖으로 내뿜는 춤이어야 한다고 생각한다.”라고 했다나. 바로 어제(5월 25일) 저녁 5시 서울 남산국악당에서 열린 <법열곡(法悅曲)> 공연은 바로 그러했다. 이 공연은 고 이애주 선생의 <법열곡>이 세상에 선보인 지 30년이 지난 2024년, 그의 제자들이 마음을 모아 스승이 남기고 간 춤의 원리를 탐색하는 자리를 만든 것이다. “스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