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문화신문=김영조 푸른솔겨레문화연구소장] 며칠 전 ‘데일리안’에는 “올봄엔 '데님 셋업'이 유행하며 이른바 ‘청청 패션’이 재귀했다.”라는 기사가 올랐습니다. 1930년대, 서부극이 유행하며 영화 속 주연 배우들이 청바지를 입고 등장하여 유행했던 그 ‘청청패션’이 다시 돌아왔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런 옷의 유행이 조선시대 한복에도 있었습니다. 특히 여성의 저고리를 보면 조선 초기인 1580년 청주 한씨의 덧저고리 길이는 무려 81cm나 되어 엉덩이까지 내려갔는데 1670년대의 누비 삼회장 저고리를 보면 42cm로 짧아집니다. 그러던 것이 조선 후기로 오면 극단적으로 짧아졌지요. 1780년 청연군주의 문단 삼회장저고리는 19.5cm이며, 조선말 1900년대에 아주 짧아진 저고리는 길이가 12cm밖에 안 된 것도 있었습니다. 이렇게 짧아진 저고리는 젖가슴이 보일락 말락 하는 것은 물론 배래(한복의 옷소매 아래쪽 부분)도 붕어의 배처럼 불룩 나온 ‘붕어배래’가 아니라 폭이 좁고 곧은 ‘직배래’여서 이 정도 되면 누가 입혀주지 않으면 혼자는 도저히 입을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맵시를 위해 불편함을 감수했던 것이 1930년대에 오면 다시 저고리 길이가 길어져 현
[우리문화신문=김영조 푸른솔겨레문화연구소장] 불교에서의 탑은 원래 부처의 유골을 모신 것이기 때문에 매우 존귀하다. 따라서 탑은 반드시 절의 중심부 곧 법당 앞에 세우며, 공양의 중심으로 삼고 있다. 처음으로 탑이 세워진 것은 기원전, 석가모니가 세상을 떠난 뒤 석가모니의 사리를 똑같이 여덟 개로 나누어 인도 전역에 각기 탑을 세워 안치한 것이 처음이다. 우리나라에서는 중국 남북조 시대의 영향을 받아서 삼국 시대부터 건립하였다. 탑은 만드는 재료에 따라 목탑ㆍ석탑ㆍ전탑 등으로 나뉘며, 목탑은 나무, 석탑은 돌, 전탑은 벽돌, 모전 석탑은 돌을 벽톨 형태로 다듬어서 만든 탑이다. 지역에 따라 중국에서는 전탑이, 우리 나라에서는 석탑이, 일본에서는 목탑이 각각 발달해 왔다.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탑은 백제 후기에 세워진 익산 미륵사터 석탑이며, 남북국시대 세워진 불국사 다보탑과 불국사 3층 석탑, 고려 중기의 신륵사 다층 전탑ㆍ경천사 10층 석탑, 조선의 원각사터 10층 석탑이 대표적이다. 어제(5월 23일)부터 29일까지 사단법인 한국불교사진협회(이사장 최금란)는 경복궁 옆 법련사 불일미술관에서 불탑을 주제로 한 제28회 회원전을 열고 있다. 이번 전시에서
[우리문화신문=김영조 푸른솔겨레문화연구소장] 5월 18일 프랑스 파리에서 열린 제216차 유네스코 집행이사회는 〈동학농민혁명기록물〉을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UNESCO Memory of the World)으로 올렸습니다. 〈동학농민혁명기록물〉은 1894년~1895년 조선에서 일어난 동학농민혁명과 관련된 기록물로 썩은 지도층과 외세의 침략에 저항하며 평등하고 공정한 사회를 건설하기 위해 민중이 봉기한 사건입니다. 한국이 번영된 민주주의로 나아가는 발판을 놓았으며, 유사한 외국의 반제국주의, 민족주의, 근대주의 운동에 영향을 주었습니다. 또한 그 과정에서 동학농민군은 전라도 각 고을 관아에 치안과 행정을 담당하는 민ㆍ관 협력(거버넌스) 기구인 ‘집강소’를 설치하는 성과를 거두었지요. 이는 19세기 당시 전 세계에서 비슷한 사례를 찾기 힘들었던 신선한 민주주의 실험으로 평가됩니다. 이번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에 오른 「동학농민혁명기록물」은 조선 백성들이 주체가 되어 자유, 평등, 인권의 보편적 값어치를 지향했던 기억의 저장소로서 세계사적 중요성을 인정받았지요. 유네스코 집행이사회는 〈동학농민혁명기록물〉과 함께 〈4.19혁명기록물〉도 함께 세계기록유산으로 올렸습니다.
[우리문화신문=김영조 푸른솔겨레문화연구소장] 임사절명시(臨死絶命詩) - 성삼문(成三問) 擊鼓催人命(격고최인명) 북을 울리며 사람의 목숨 재촉하는데 回頭日欲斜(회두일욕사) 머리를 돌리니 해가 지려고 한다 黃泉無一店(황천무일점) 황천길에는 주막 하나 없다는데 今夜宿誰家(금야숙수가) 오늘밤은 누구 집에서 잘까? 이 한시는 세조(世祖)의 회유에 응하지 않아 능지처형(凌遲處刑, 죄인의 뼈와 살을 발라내어 죽이는 형벌)을 당한 성삼문(成三問, 1418~1456)이 죽음에 임하여 목숨이 끊어지기 전 형장(刑場)에서 지은 시다. 둥둥 북을 울리며 망나니가 사람의 목숨을 거두려고 하는데, 조금 있으면 이승에서의 마지막임으로 하직하려고 머리를 들어 산천을 돌아다보니, 해도 자신과 같이 서산으로 지려고 한다. 저승 가는 길에는 주막이 하나도 없다고 하는데, 오늘밤은 누구 집에서 자고 갈까를 성삼문은 걱정한다. 조선시대 형벌제도는 《경국대전》에 명시되었는데 회초리로 가볍게 때리는 것부터 시작하여 성삼문 같은 중죄인에게는 능지처형까지 처했다. 그런데 참 특이한 형벌로 ‘팽형(烹刑)’이라는 것이 있었다. 이는 탐관오리를 벌주는 것인데 곧 끓는 가마솥 속에 죄인을 넣어 삶는 공개처형을
[우리문화신문=김영조 푸른솔겨레문화연구소장] 신세계, 롯데 두 백화점은 오랫동안 우리나라의 백화점계를 석권해온 곳입니다. 그런데 요즈음 이 두 백화점은 영어로 광고하기에 혈안이 되어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한글이 한 자도 없는 영어만으로만 광고를 합니다. 마치 영어를 모르는 사람은 이 백화점엔 오지 말라는 것처럼 말입니다. 이 두 백화점 손님 가운데 영어권 사람이 과연 몇이나 될까요? 제발 이 백화점 사람들 정신 좀 차리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우리문화신문=김영조 푸른솔겨레문화연구소장] "이제 흙비가 내렸으니 하늘이 내리는 벌이 가볍지 아니하다. 예전에 수(隋)나라 황제가 산을 뚫고 땅을 파며 급하지 아니한 역사(役事)를 하자 마침 하늘에서 흙비가 내렸는데, 일관(日官)이 아뢰기를, ‘토목 공사(土木工事)를 번거롭게 일으키므로 백성의 원망이 ’흙비‘를 부른 것입니다.’라고 하였으니, 지금 숭례문(崇禮門)의 역사가 부득이한 데에서 나온 것이라고는 하지만, 또한 급하지 아니한 역사는 아니겠는가? 하늘이 꾸짖어 훈계하는 것에는 반드시 까닭이 있을 것인데, 경 등은 어찌하여 한마디 말도 없는가?“ 이는 《성종실록》 성종 9년 4월 1일(1478년) 기록입니다. 이런 흙비에 대한 《조선왕조실록》의 기록은 183번이나 나옵니다. 심지어 태종 6년(1406년)에는 동북면(東北面) 단주(端州, 함경남도 단천)에 흙비가 14일 동안이나 내렸다고 하고, 세종 1년(1419년) 3월 13일에는 흙비가 내려 젖은 곳이 새까맣게 되니 ‘먹비’라 하였다고 했으며, 세조 13년(1467년) 5월 28일에는 어유소(魚有沼)가 거느린 군사는 흙비로 인하여 군사의 복장과 장비는 물론 기계(器械)가 거의 쓸 수 없게 되었다는 기록
[우리문화신문=김영조 푸른솔겨레문화연구소장] 오늘은 스승의 날입니다. 1965년 청소년 적십자 중앙학생협의회(RCY)가 5월 15일을 '스승의 날'로 정한 이후에 모두가 따라 합니다. 그런데 이날을 ‘스승의 날’로 한 것은 바로 한글을 만들어주신 세종대왕이야말로 우리의 영원한 스승이라는 뜻이 있을 것입니다. 《세종실록》 1권 총서에는 “태조(太祖) 6년 정축 4월 임진에 한양(漢陽) 준수방(俊秀坊) 잠저(潛邸)에서 탄생하였으니”라는 세종임금의 탄생 기록이 보입니다. 세종이 태어났다는 준수방은 지금의 어디일까요? 준수방은 현재 종로구 통인동, 옥인동 일대로 경복궁 서쪽문인 영추문길 맞은편 의통방 뒤를 흐르는 개천 건너편인데, 청운동을 흘러내리는 한줄기 맑은 물과 옥인동으로 내려오는 인왕산 골짜기의 깨끗한 물줄기가 합쳐지는 곳입니다. 현재는 경복궁 전철역에서 북쪽으로 200여m쯤 가면 길가에 초라하게 “세종대왕 나신 곳”이라는 표지석 하나만이 달랑 있습니다. 별로 행적이 없는 사람들도 생가 하나쯤 복원해두는 세상인데 우리 겨레의 위대한 스승이신 세종대왕의 생가 복원이 안 되는 것은 매우 부끄러운 일이 아닐까요? 세종임금 탄신 기념관이 없으니 올해도 문화재청은 세
[우리문화신문=김영조 푸른솔겨레문화연구소장] 세종실록 5년(1423) 2월 10일 기록을 보면 당시 요리와 관련된 사옹원에 소속된 실제 노비는 250여 명이 넘었습니다. 또 조선시대의 기본법전인 《경국대전(經國大典)》에 보면 사옹원에서 궁에서 요리 관련 일을 하는 노비의 숫자는 400여 명이었지만 잔치가 있게 되면 그 수는 더 늘어났으며, 요즈음으로 치면 주방장이었을 숙수(熟手)가 있고 각 영역의 전문가들인 각색장(各色掌)이 있었지요. 이 기록에는 그 각색장의 이름들이 나오는데 고기 요리를 담당한 별사옹(別司饔), 찜 요리 전문가 탕수증색(湯水蒸色), 채소요리 전문가 채증색(菜蒸色), 굽는 요리 전문가 적색(炙色), 밥 짓는 반공(飯工), 술을 담그는 주색(酒色) 같은 이들이 있습니다. 특히 재미난 것은 물 긷는 수공(水工), 물 끓이는 탕수탁반(湯水托飯), 쌀을 고르는 미모(米母), 상차림 전문가 상배색(床排色), 상에 음식을 높이 괴는 앙련(仰聯), 음식을 보관하는 장자색(藏子色)도 있지요. 여기서 우리는 수라간에서 요리하는 일이 얼마나 분업화되고 전문화되어 있는지를 짐작할 수 있습니다. 또 각 수라간에 배치된 미모(米母)와 떡 전문가 병모(餠母)를 빼면
[우리문화신문=김영조 푸른솔겨레문화연구소장] 부산박물관은 5월 12일부터 7월 9일까지 59일 동안 부산박물관 기획전시실에서 2023년도 특별기획전 「조선의 외교관, 역관」을 열고 있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에는 역관(譯官)을 중국과의 사대(事大), 왜ㆍ몽골ㆍ여진과의 교린(交隣) 등 외교에서 주로 통역의 임무를 맡았던 관직이라고 풀이하면서 역어지인(譯語之人)ㆍ역어인(譯語人)ㆍ역인(譯人)ㆍ역학인(譯學人)ㆍ역자(譯者)ㆍ설인(舌人)ㆍ설자(舌者)ㆍ상서(象胥)로도 불리었다고 기술했다. 그렇다면 역관은 우리 역사에 있어서 종요로운 일을 했던 사람들이었다. 하지만, 그동안 국내 박물관들은 여기에 눈길을 주지 않아 역관만을 다루는 전시회를 연 적이 없었다. 그런데 이번에 부산박물관이 2030 부산세계박람회 유치를 기원하는 마음을 담아 특별기획전 「조선의 외교관, 역관」을 기획했고, 조선 사신단의 행차 속에서 역관의 외교적 역할과 그들의 활동이 조선 사회에 미친 다양한 이야기들을 150여 점의 유물을 통해 선보이고 있다. 특히 부산의 역사성 그리고 정체성과 연결되는 왜관 이야기, 동래(부산) 현지의 역관인 소통사(小通事)의 활약 등 관련 자료도 한자리에 모았다. 역관은
[우리문화신문=김영조 푸른솔겨레문화연구소장] 봄날은 간다 - 손로원 작사 연분홍 치마가 봄바람에 휘날리더라 오늘도 옷고름 씹어가며 산제비 넘나드는 성황당 길에 꽃이 피면 같이 웃고 꽃이 지면 같이 울던 알뜰한 그 맹세에 봄날은 간다 위 노래는 손로원 작사, 박시춘 작곡으로 뱍설희가 부른 <봄날은 간다>의 노랫말이다. 이 노랫말은 1953년에 쓰인 것인데 '시인들이 가장 좋아하는 대중가요 노랫말'(계간 《시인세계》 2004년 봄호) 1위에 꼽혔다. 또 여전히 이 시대에도 많은 사람이 이 노래를 좋아하고 있으며, 이미자, 배호, 조용필, 나훈아, 최헌, 김정호, 심수봉, 김도향, 이동원, 장사익, 한영애 등 유명 가수들이 이 노래를 자신만의 창법으로 다시 불렀을 정도로. 이 노래는 '치명적 매력'이 담겨 있다. 가사에서는 성황당 길에 옷고름 씹어가며 꽃이 피면 같이 웃었다고 노래한다. 지금이야 없는 서낭당이라고도 하는 성황당은 마을을 수호하는 서낭신을 모셔 놓은 신당을 말함이다. 예전 마을마다 있던 성황당 길에 한복의 아름다움으로 손꼽히는 옷고름을 씹어가며 임과 다시 만나자며 맹세하던 그 봄날은 지금 가고 있다. 그 임은 다시 올지, 말지 모른다. 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