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문화신문=김영조 푸른솔겨레문화연구소장] 이팝나무 오월에 찾아온 이팝나무 내 어머니도 함께 오셨네 하얀 쌀밥 주렁주렁 매달고 오고 가는 길손 깊은 시름이라도 달래주려는 듯 하얀 쌀밥 고봉으로 퍼나르네 푸르런 오월에 인정 많으셨던 어머니 하얀 꽃잎 사랑 안겨 주시네 지난 5월 5일 월요일은 24절기 ‘입하(立夏)’였다, 입하 무렵부터 6월까지는 산과 들에 가보면 하얗고 탐스러운 이팝나무꽃을 본다. 요즘은 도심의 가로수로도 인기를 끈다. 이팝나무란 이름은 입하 무렵 꽃이 피기 때문에 ‘입하목(立夏木)’이라 부른 데서 유래했다고 하며, 또 이밥은 하얀 쌀밥을 뜻하는데 조선을 개국한 이성계가 '정전제(井田制)'를 시행하여 일반 백성들도 쌀밥을 먹게 되었고, 그래서 백성들이 이 쌀밥을 '이성계가 준 밥'이란 뜻으로 '이밥'이라 불렀는데 이것이 변하여 이팝나무가 되었다고도 한다. 실제 흐드러진 이팝나무꽃을 보면 마치 쌀밥(이밥)을 고봉으로 담아 놓은 것 같은 모양으로 보인다. 예전 가난한 백성은 그저 밥이나 배부르게 먹는 것이 소원이었다. 논에서 종일 허리를 제대로 펼 틈도 없이 일하다가 뱃가죽과 등짝이 서로 들러붙는 듯한 허기에, 눈에 들어오는 이팝나무꽃이 마치
[우리문화신문=김영조 푸른솔겨레문화연구소장] "인묘조에 여러 신하들을 추복(追復, 빼앗았던 벼슬을 죽은 뒤 회복시킴)시켰을 때와 선묘조에 군흉(群凶, 흉악한 무리)을 추삭(追削, 죽은 사람의 벼슬을 깎아 없앰)하였을 때를 참고하여 옛글과 교문(敎文, 죄인을 사면하기 위해 임금이 내리는 글)을 지어 올리도록 하라. 이와 같이 처분한 후에도 이 일을 다시 제기하는 자가 있을 것 같으면 마땅히 멀리 유배라도록 하는 법을 시행할 것이다. 아! 가까운 신하들은 나의 이 분부를 조정과 민간으로 하여금 모두 분명히 알게 하여야 할 것이다.“ 위는 《영조실록》 5권, 영조 1년(1725년) 4월 10일 기록으로 영조 임금이 즉위하고 반년이 지난 뒤 탕평책을 대내외에 밝힌 것입니다. 노론ㆍ소론ㆍ남인ㆍ북인 등이 휩쓴 붕당정치의 폐해를 겪었던 영조는 왕권 강화를 위해 붕당 타파를 위한 탕평을 적극 추진했습니다. 또 영조에 이은 정조는 외척을 정권에서 배제하고 명분과 절의를 지키는 깨끗한 신하를 등용했으며, 규장각을 개편하고 인재를 양성하여 자신의 측근으로 삼아 왕권 강화를 꾀했지요. 탕평정치는 필연적으로 왕권의 신장과 임금을 중심으로한 정국의 안정을 가져왔으며 백성을 위한 정책
[우리문화신문=김영조 푸른솔겨레문화연구소장] 목련, 봄의 문을 두드리다 - 이정호 (앞줄임) 목련, 겨울의 침묵을 뚫고 첫봄의 언어를 피워낸다. 그 고요한 피어남은 누군가에게는 인사, 누군가에게는 위로, 그리고 나에게는 한 줄기 희망이다. (뒷줄임) “운조루 고택은 봄이 되면 장독대 옆에 피어나는 하얀 목련으로 더욱 빛이 납니다. 청아한 자태를 뽐내는 목련은 고택의 고즈넉한 분위기와 어우러져 방문객들에게 깊은 인상을 남깁니다. 이 목련은 단순한 꽃 그 이상으로, 운조루 고택의 며느리들에게 특별한 의미를 지녔습니다. 어린 나이에 시집와서 겪었던 고된 시집살이 속에서 하얀 목련은 그녀들에게 마음의 위안이 되어주었습니다.” 이는 지난 3월 26일 ‘오마이뉴스’에 실린 임세웅 기자의 기사 일부다. 나는 지난 2013년 운조루를 방문하고 <굴뚝을 섬돌 밑에 내어라 200년 이어온 '나눔의 정신'> 기사를 쓴 적이 있다. 기사 가운데는 “운조루에는 아주 희귀한 쌀뒤주가 있는데 “他人能解(타인능해)”라는 글씨가 쓰여 있는 뒤주가 그것이다. 이 뒤주는 말 그대로 양식이 떨어진 이들을 위한 것으로 누구든 쌀을 퍼가라고 조그마한 쌀 구멍이 뒤주에 뚫려있다. 이것은
[우리문화신문=김영조 푸른솔겨레문화연구소장] "서울에서는 쇠를 주조(鑄造)하여 기구(器具)를 만들어 이름을 ‘측우기(測雨器)’라 하니, 길이가 1척(尺, 33.33cm) 5촌(寸, 1치의 1/10)이고 직경(直徑)이 7촌입니다. 주척(周尺, 자)을 사용하여 서운관(書雲觀, 천문ㆍ역일(曆日)ㆍ측후(測候) 등을 맡아보던 관청)에 대(臺)를 만들어 측우기를 대(臺) 위에 두고 매양 비가 온 뒤에는 서운관의 관원이 친히 비가 내린 상황을 보고는, 주척(周尺)으로써 물의 깊고 얕은 것을 측량하여 비가 내린 것과 비 오고 갠 때와 물 깊이의 척ㆍ촌ㆍ분(尺寸分)의 수(數)를 상세히 써서 뒤따라 즉시 임금에게 아뢰고 기록해 둘 것이며,“ 위는 《세종실록》 96권, 세종 24년(1442년) 5월 8일 기록입니다. 583년 전인 1442년 조선에서 강수량 측정을 위해 세계 처음 측우기와 측우대를 만들었습니다. 서양에서는 영국의 건축가이자 천문학자인 크리스토퍼 렌에 의해 1662년 처음 서양식 우량계가 만들어졌는데 이는 우리나라보다 220년이 늦은 때입니다. 지난 2020년 국가유산청은 근대 이전의 강수량 측정 기구로 세계에서 유일하게 남아 있는 것으로 알려진 ’금영 측우기‘를
[우리문화신문=김영조 푸른솔겨레문화연구소장] 십이가사 가운데 하나로인 궁중음악 ‘춘면곡(春眠曲)’이란 노래가 있습니다. “춘면(春眠)을 느즛 깨야 죽창(竹窓)을 반개(半開)하니” 곧 “봄잠을 늦게 깨어 죽창(대로 살을 만든 창문)을 반쯤 여니”로 시작하는 춘면곡은 임을 여의고 괴로워하는 한 사내가 기생집에 들러 봄의 운치에 빠져서 모든 괴로움을 잊어버리려는 심리를 표현한 작품으로, 육감적이고 퇴폐적인 내용입니다. 《청구영언》을 비롯하여 《고금가곡(古今歌曲)》ㆍ《해동악부(海東樂府)》ㆍ《남훈태평가(南薰太平歌)》ㆍ《고금기가(古今奇歌)》ㆍ《가곡원류(歌曲原流)〉 등의 가집류에 실려 전하기 때문에 이로 미루어 300년 전부터 부른 노래로 짐작이 됩니다. 하지만, <춘면곡>은 그동안 지은이를 모른 것으로 알려져 왔습니다. 그런데 이지양 교수의 책 《홀로 앉아 금(琴)을 타고》에 보면 18세기 초의 문인 이하곤(李夏坤)의 문집 《두타초(頭陀草)》에서 '<춘면곡>은 진사 이희징(李喜徵)이 지은 것인데, 소리가 매우 슬프고도 청초하여 듣는 사람들이 모두 눈물을 흘렸다."라고 나온다며, <춘면곡>의 지은이는 이희정임을 맑혔습니다. <춘면곡&
[우리문화신문=김영조 푸른솔겨레문화연구소장] 내일이면 1922년 방정환이 이끄는 천도교 서울지부 소년회에서 ‘어린이날’을 선포하고, 이듬해 5월 1일을 ‘어린이날’로 정한 뒤 일제강점기 말에 중단되었다가 광복 뒤인 1946년 기념일로 지정하면서 5월 5일로 변경된 ‘어린이날’이다. 이날만 되면 어린이를 위한 온갖 잔치가 여기저기서 벌어지곤 한다. 여기 서울 영등포공원에서도 어김없이 ‘2025 영등포어린이축제’가 열린다. 그런데, 이곳 어린이날축제의 구호는 우리말과 영문을 섞어서 “잘 놀Go! 잘 웃Go! 잘 크Go!”로 했다. 우리나라 법 가운데는 <국어기본법>이라는 게 있는데 그 법 제14조 제1호에 “공공기관 등의 공문서는 어문규범에 맞추어 한글로 작성하여야 한다.”라고 돼 있다. 그것은 공공기관만의 공문서 뿐만 아니라 행사 이름 또는 밖에 내거는 펼침막도 한글로 쓰라는 얘기일 것이다. 그런데도 이렇게 한글에 영어를 섞어 써넣는 것은 무슨 까닭일까? 혹시 공무원들이 민족주체성이 빠진 채 영어를 섞어 써서 잘난 체하는 것은 아닌지 모른다. 하지만 쓸데없이 한글과 영어를 섞어 썼다고 유식하다고 생각해 줄 사람은 없다. 요즘 유아들부터 영어를 가르치
[우리문화신문=김영조 푸른솔겨레문화연구소장] 정산리 연가 - 정태춘 “나라구 왜 한 때 좋은 날들이야 없었을라구” 앞 산 진달래에 뒷산 뻐꾸기 애절한데 강물 반짝이며 봄날은 간다 언제적 청춘이냐, 언제적 사랑이냐 강물 소리 없이 봄날은 간다 1960년에 나온 백설희의 '봄날은 간다'라는 노래는 한국 대중음악사에 한 획을 그은 명곡이이란 평가를 받는다. 당시 으뜸으로 손꼽히는 작곡가 박춘석과 천재적인 가창력을 지닌 백설희의 만남이 이뤄낸 기적같은 작품으로 발매 직후부터 폭발적인 인기를 얻었다. 특히 서양 관현악과 국악적 요소를 절묘하게 조화시켜 음악 평론가들 사이에서 이 곡이 한국 대중음악의 새로운 장을 열었다는 평가를 받았다. 이 곡의 가사는 인생의 무상함과 시간의 흐름을 담았다고 해석된다. 가사에 담긴 '봄'이라는 계절은 단순히 자연의 봄이 아닌, 인생의 황금기를 상징하는 것으로 시간은 누구에게나 똑같이 흘러가고, 우리는 그 흐름 속에서 각자의 봄을 맞이하고 또 보낸다. 그런데 한국의 대표적인 음유시인으로 불리는 가수 정태춘이 최근 낸 ‘집중호우 사이’라는 음반에 수록된 <정산리 연가>는 이 시대에 새롭게 등장한 정태춘의 <봄날은 간다&
[우리문화신문=김영조 푸른솔겨레문화연구소장] 임금이 명하여 단오의 영상시(迎祥詩, 나라에 기쁜 일이 있을 때 짓는 시)를 그치도록 하였다. 그때 단오가 가까워졌으므로 승정원에서 세규(歲規)에 의하여 제술관(製述官)을 뽑아서 아뢰고 대제학 주문신(主文臣)을 불러 운자(韻字)을 내어 과거에 문제 내기를 청하니, 임금이 하교하기를, "가뭄 피해가 이러하니, 이번에는 시문을 지어 올리지 말게 하라." 하였다. 위는 《숙종실록》 61권, 숙종 44년(1718년) 5월 1일 기록으로 숙종은 가뭄이 심하므로 과거를 열어 시문을 지어 올리지 않도록 하라는 명을 내립니다. 조선시대 임금은 이렇게 가뭄뿐만이 아니라 물난리가 나고 벼락이 치고, 돌림병이 도는 등 천재지변이 일어나면 임금이 부덕하여 이런 재난이 생긴다고 하여 과거에서 시문을 짓는 것도 못 하게 하는 것은 물론 감선(임금이 근신하는 뜻에서 수라상의 음식 가짓수를 줄이는 일) 하거나 초가에서 생활을 하기도 했습니다. 《조선왕조실록》에서 “벼락”으로 검색하면 무려 1,239건이 나오는데 거의가 “아무 데서 아무개가 벼락을 맞았다.”입니다. 《세종실록》 세종 15년(1433년) 3월 13일에 보면 “삼각산의 소나무와 산
[우리문화신문=김영조 푸른솔겨레문화연구소장] “한 명의 소리꾼이 고수 장단에 맞추어 창ㆍ아니리ㆍ발림을 섞어가며 이야기를 엮어가는 극적 음악. 국가무형문화재다.” 이것이 《다음백과사전》에서 <판소리>를 한마디로 요약해 낸 말이다. 하지만, 판소리는 이 말 한마디만으로 밝히지 못하는 엄청난 우리 겨레의 보물이다. 판소리는 2003년 11월 7일 유네스코 제2차 「인류구전 및 무형유산 걸작」에 올랐다. 판소리 말고 온 세상 그 어떤 성악이 홀로 8시간을 노래하며 청중을 울리고 웃기는 것이 있다는 말인가? 판소리를 보존ㆍ전승하려고 1971년에 만든 단체가 바로 (사)한국판소리보존회다. (사)한국판소리보존회는 1902년 조선시대의 성악단체인 ‘협률사’와 '조선성악연구회'가 30년의 명맥을 이어오다가 일제에 의해 해산되고 40여 년 만에 재탄생한 것이다. 그 (사)한국판소리보존회가 지난 토요일(26일)과 일요일(27일) 이틀에 걸쳐 지하철 선정릉역에 있는 국가유산진흥원 민속극장 풍류에서 제29회 <전국판소리경연대회>를 성황리에 열었다. 지난 3월 18일 제18대 이사장으로 취임한 고향임 명창은 <전국판소리경연대회> 대회사에서 “본회는 1
[우리문화신문=김영조 푸른솔겨레문화연구소장] 《무예도보통지(武藝圖譜通志)》가 완성되었다. 무예에 관한 여러 가지 책에 실린 곤봉(棍棒), 등패(藤牌, 둥근 방패), 낭선(狼筅, 낭선창으로 하는 무예), 장창(長槍, 긴창으로 하는 무예), 당파(鎲鈀, 끝이 세 갈래로 갈라진 당파창으로 하던 무예), 쌍수도(雙手刀, 양손에 칼을 쥐고 하는 무예) 등 여섯 가지 기예는 척계광(戚繼光)의 《기효신서(紀效新書)》에 나왔는데“ 《정조실록》 30권, 정조 14년(1790년) 4월 29일 기록에 위처럼 《무예도보통지》가 완성되었다는 말이 나옵니다. 《무예도보통지(武藝圖譜通志)》는 정조 14년 임금의 명에 따라 이덕무, 박제가, 백동수 등이 군사의 무예훈련을 위하여 펴낸 무예서입니다. 4권 4책 목판본으로 《무예통지》ㆍ《무예도보》ㆍ《무예보》라고도 합니다. 서문에서는 정조가 이 책을 펴내게 된 동기를 밝혔습니다. 이를 보면 당시 우리나라에는 창이나 검의 병기는 없이 궁술(弓術, 활을 쏘는 무예)만 있었지요. 그런데, 임진왜란 뒤 선조 때 곤봉(棍棒)ㆍ장창(長槍) 등 여섯 가지 기예를 다룬 《무예제보》를 펴냈으며, 영조 때에는 여기에 죽장창(竹長槍, 대로 만든 긴창으로 하는 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