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문화신문=김영조 푸른솔겨레문화연구소장] “버버리 찰떡”은 일제강점기부터 경북 안동지역 사람들의 주요 간식이자 한 끼 대용식으로 사랑받아왔습니다. 제주에 오메기떡, 경주에 황남빵, 강원도 횡성에 안흥찐빵이 있다면 안동에는 “버버리 찰떡”이 있는 것이지요. 이 떡은 일제강점기 김노미 할머니가 지금은 사라진 안동시 안흥동 경북선 철길 밑에서 빚어 판 것을 시작으로 안동시민들로부터 각별한 사랑을 받았었습니다. 그러나 2001년 불황으로 가게 문을 닫은 뒤 한때 명맥이 끊어졌었지요. 그러다 종종 사 먹던 찰떡의 맛을 잊지 못한 사람들이 지역의 대표적 먹거리가 사라진 것을 안타깝게 여겨 김동순(76) 할머니를 찾아가 "안동의 자랑인 버버리 찰떡이 후대에 전수되어야 하지 않겠느냐"며 권유하여 그때의 사라진 '버버리 찰떡' 맛을 되살렸다고 하지요. “버버리”는 벙어리의 안동 사투리입니다. 찰떡이 워낙 크고 맛이 좋아서 한 입 베어 물면 말을 잘할 수 없어 마치 벙어리처럼 된다고 해서 '버버리 찰떡'으로 이름 붙여진 것이지요. 이 떡은 떡고물을 떡 속에 넣지 않고 직사각형 모습의 찰떡 양쪽에 콩이나 팥고물을 듬뿍 묻힌 특이한 모양입니다. 버버리떡은 재료의 절반이 건강에
[우리문화신문=김영조 푸른솔겨레문화연구소장] 지금은 우리가 음악을 듣는 것은 어렵지 않습니다. 공연장도 많고 시디플레이어를 통해 듣기도 하고, 더더구나 요즘은 USB 등을 써서 컴퓨터로 즐기기도 하지요. 그러나 예전엔 음악 듣기가 무척이나 어려웠습니다. 조선시대 후기에 오면 판소리가 유행하는데 이때는 명창을 불러와서 들을 수밖에 없었지요. 그러다가 1860년대 독일 상인 오페르트를 통해서 축음기라는 것이 들어와 처음 소개되었습니다. 축음기(蓄音機)는 말 그대로 “소리를 쌓아두는 기계”인데 이를 처음 본 조선 관리는 이 축음기를 “귀신소리 나는 기계”라고 했다 하지요. 명창 박춘재는 우리나라에 축음기가 들어온 지 얼마 안 되어 고종 황제 앞에서 축음기에 소리를 녹음해 즉석에서 들려주었습니다. 그리고 1887년에는 미국의 빅터레코드사로 건너가 음반을 녹음하기도 하였지요. 그 뒤 1930년대 이후 대중가요가 크게 유행하자 덩달아 축음기도 인기를 끌었습니다. 그러나 이때 축음기는 회사원이 몇 달 치 월급을 모아야 살 수 있었기에 축음기를 “방탕한 자의 사치품”이라 하였지요. 그래서 축음기를 가진 총각에게는 딸을 시집보내지 않았다고 합니다. 그렇게 부유한 사람 외에는
[우리문화신문=김영조 푸른솔겨레문화연구소장] 영남지방에는 일제의 강압으로 맥이 끊겼던 ‘호미씻이’와 비슷한 ‘꽹말타기’라는 민속놀이가 있었습니다. 이 꽹말타기는 ‘징, 장구, 북, 꽹과리’ 외에 ‘딩각’을 더해 ‘오물놀이’를 즐겼다고 합니다. ‘딩각’은 나무로 길게 만든 나팔 모양인데 울산광역시의 반구대 암각화에도 ‘딩각’을 의 형태로 보이는 그림이 새겨져 있어 딩각은 선사시대부터 쓰였던 악기라고 짐작할 수도 있지요. 그런데 민속놀이인 꽹말타기가 사라지면서 ‘딩각’도 자취를 감추었습니다. 또 경상북도 상주에는 콩나물을 삶아 콩가루에 버무려 만든 ‘콩나물히찝’이란 음식이 있는데 그것도 사라질 위기에 처했습니다. 그뿐만이 아닙니다. 군사정권 시절 사투리를 쓰면 안 되는 것처럼 분위기가 형성돼 점차 사투리가 사라졌습니다. 다른 나라 음식과 문화가 물밀듯 들어오는 것과 함께 군사정권과 산업화 속에서 미신이라고 치부되고 표준말 정책에 떠밀려 그렇게 오랫동안 우리 겨레와 함께했던 많은 민속놀이나 음식 그리고 사투리가 사라졌습니다. 그러나 ‘판소리’를 한번 생각해봅니다. ‘판소리’는 걸쭉한 전라도 사투리 잔치입니다. 판소리의 중요한 구성 요소인 ‘추임새’도 잘헌다, 아먼
[우리문화신문=김영조 푸른솔겨레문화연구소장] 음식을 얹어 나르거나 방에 놓고 식탁으로 쓰는 상(床)의 종류를 소반(小盤)이라고 합니다. 소반에는 다리 모양새에 따라 여러 종류로 나뉩니다. 다리가 하나뿐인 상은 “외다리 소반[獨脚盤, 單脚盤]”이라 하고, 다리가 셋인 것은 “삼각반(三脚盤)”이라 하며, 다리 모양이 개의 발같이 조각한 것은 “개다리소반[狗足盤]”이라 합니다. 또 호랑이의 발같이 조각한 것은 “호족반(虎足盤)”, 말의 발같이 조각한 것은 “마족반(馬足盤)”, 대나무 마디같이 조각한 것은 “죽절반(竹節盤)”이라고 하지요. 그런데 여기 관가로 출장 다니던 소반이 있습니다. 바로 공고상(公故床)이 그것인데 옛날 높은 벼슬아치가 궁중이나 관가에서 숙직할 때 집의 노비들이 이 상에 음식을 얹어서 머리에 이고 날랐다고 하지요. 지금처럼 구내식당이나 외식할 수 있는 곳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기번(番) 곧 숙직이나 당직을 할 때 자기 집에서 차려 내오던 밥상이라 하여 “번상(番床)”, 바람구멍을 냈다고 하여 “풍혈상(風穴床)”이라고도 합니다. 양옆에 손을 잡을 수 있도록 “亞(아)” 자나 “卍(만)” 자로 된 뚫새김(투각) 구멍이 있으며, 앞쪽에는 내다볼 수
[우리문화신문=김영조 푸른솔겨레문화연구소장] “저 서구열강을 보라. 학술의 발달이 저 같으며 도덕의 진보가 저 같으되 그 나라가 기운차게 일어나 날로 강성해가니 이는 그 문화가 동양 고대처럼 인민을 몰아서 전제하(專制下)에 굴복하게 하던 문화가 아니라 자유를 구가하며 모험을 숭상하는 문화인 까닭이니 한국의 뜻있는 군자여! 자국 고유의 장점을 보존하며, 외래 문명의 정화(精華)를 채취해서 신국민을 양성할만한 문화를 진흥할지어다.” 이는 월남 이상재 선생이 ‘대한매일신보’ 1910년 2월 19일 자에 쓴 ‘문화와 무력’이란 제목의 논설 일부입니다. 내용을 보면 국수주의나 사대주의가 아닌 우리 고유문화의 장점 위에 다른 문명의 우수한 것을 더하여 국민을 이끌 새로운 문화를 창조하자고 주문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지금 이 시대에도 진정 우리가 취해야 할 태도일 것입니다. 월남 이상재 선생은 일본의 거물 정치인 오자키가 찾아왔을 때, 뒷산 아름드리 소나무 아래에 돗자리를 편 뒤 '우리 응접실'에 앉을 것을 권했다는 이야기가 전해집니다. 오자키는 일본으로 돌아가 “조선에 가서 무서운 영감을 만났다. 그는 세속적인 인간이 아니라 몇백 년 된 소나무와 한 몸인 것처럼 느껴졌
[우리문화신문=김영조 푸른솔겨레문화연구소장] 빈 절 - 김상아 승(僧)이라 하여 다 비울 수 있겠는가 숨을 쉬는 한 가슴은 뛰고 뛰는 가슴엔 사랑이 깃든다 질기디 질긴 화두 산문 밖에 내놓고 가시지 않는 분 냄새에 목탁소리 산란(散亂)터니 법당문 걸어 매고 소지공양* 하더니 풍경마저 낮잠 든 고요한 날에 마지막 독경 방울 떨구고 동그란 동자승 미소로 허물을 벗었다 승이라 하여 비웠는가 비우려고 숨결도 지웠는가 주저앉은 지붕 위로 칡 순 새로 돋았는데 이끼 낀 돌담 가에 구릉대꽃* 피었는데 * 소지공양 : 손가락을 불태워 자신의 몸을 공양하는 수련방법 * 구릉대 : 뱀꽃을 이르는 사투리. 대매이꽃이라고도 한다. “가난하다고 해서 사랑을 모르겠는가 / 내 볼에 와 닿던 네 입술의 뜨거움 / 사랑한다고 사랑한다고 속삭이던 네 숨결 / 돌아서는 내 등 뒤에 터지던 네 울음 / 가난하다고 해서 왜 모르겠는가 / 가난하기 때문에 이것들을 / 이 모든 것들을 버려야 한다는 것을” 신경림 시인은 그의 시 <가난한 사랑 노래>에서 이렇게 노래했다. “가난하다고 해서 왜 모르겠는가”라고 되뇐다. 어디 그뿐인가? 신라시대의 고승 원효(元曉 617∼686년)는 요석공
[우리문화신문=김영조 푸른솔겨레문화연구소장] 옛사람들은 뒷간을 맡는 귀신인 ‘변소각시’가 있다고 믿었습니다. 곳에 따라 측신(厠神), 칙간조신, 부출각시, 칙시부인, 칙도부인이라고 하며, 젊은 여자귀신이라고 생각했지요. 이수광의《지봉유설》에는 매달 음력 6일, 16일, 26일에 측신이 뒷간을 지키는 날이므로 뒷간 출입을 삼가라고 되어 있습니다. 이를 지키려면 음식도 적게 먹어야 했겠지요. 우암 송시열(宋時烈 1607~1689)의 《송자대전(宋子大全)》에 보면 자고신(紫姑神)의 이야기가 나옵니다. ‘자고라는 여인은 남의 첩이 되었는데 그 정실부인의 시기를 받아 늘 측간 청소하는 일을 하다가 그만 죽게 되었다. 훗날 사람들은 이를 측신이라 부르며 그 신이 영험하다 하여 그가 죽은 1월 15일 측간에 제사하고 모든 일을 점쳤다.’라는 기록이 보입니다. 이 측신각시는 머리카락이 길어서 그것을 자기 발에 걸어놓고 세는 것이 일인데 그러다가 사람이 뒷간에 올 때 자기를 놀라게 하면 그 머리카락을 뒤집어씌우는데 그러면 그 사람은 병이 든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밤에 뒷간에 갈 때는 헛기침한다고 하지요. 강원도에서는 뒷간을 지으면 길일 밤을 택해서 뒷간에 불을 켜고, 그
[우리문화신문=김영조 푸른솔겨레문화연구소장] 나무로 된 가구를 오랫동안 쓰려면 각 모서리와 여닫이문 손잡이에 쇠붙이로 덧대야 했습니다. 그래서 경첩, 들쇠(서랍이나 문짝에 다는 반달 모양의 손잡이), 고리, 귀장식(가구의 모서리에 대는 쇠붙이 장식), 자물쇠 같은 것들을 만들어 붙였지요. 이런 것들을 통틀어 장식(裝飾)이라고 부르는데 보기 흉한 못 자국을 가려주고 옷장의 품위를 지켜주지요. 이 가운데 경첩은 여닫이문을 달 때 한쪽은 문틀에, 다른 한쪽은 문짝에 고정하여 문짝이나 창문을 다는 데 쓰는 철물을 이릅니다. 잘 깨지지 않도록 대개 구리에 주석과 아연을 섞어 만들었는데 쓰임새와 가구 종류에 따라 모양이 매우 다채롭지요. 경첩은 신라시대의 유물에서 있는 것으로 보아 삼국시대 이전부터 널리 사용되었을 것으로 추정되며, 고려시대에는 목관장식, 금속제품, 목공품의 장식에 세련미를 더하여 생활전반에 널리 쓰였습니다. 경첩은 겉으로 드러나지 않는 부분도 있지만 드러날 때는 섬세한 무늬가 바라다보기만 해도 신기하고 아름답지요. 경첩 이름은 모양새에 따라 동그레, 이중병풍, 제비추리(아래쪽이 제비 꼬리 모양), 구름, 난초, 나비, 호리병, 박쥐 따위로 불렀습니다.
[우리문화신문=김영조 푸른솔겨레문화연구소장] “사람이 셰상에 나셔 무릇 모든 일에 의심 있는 것은 행하지 않는 것이 당연하거니와 가히 믿을 만한 것을 보고도 행치 안으면 대단히 어리셕은 일이라 아이 기르는 데, 역질 일관으로 말 할진대 슈쳔년 이래로 사람마다 지낸바 위태함을 이로 말할 슈 업는 재앙이더니. 다행히 하느님 보살피는 덕으로 우두법이 나셔 일백 여달 피 동안에 텬하만국에 사람 건진 것이 가위 부지기슈요 우리 대한으로 말하더래도 이십 오년 지간에 그 효험 본 사람이 또한 몇십만 명이 될 것이니 이는 죡히 의심을 파하고 믿을 만한것이오. 하물며 나라에셔 마을을 셜시하고 관원을 두어 아모됴록 백셩의 역질을 예방하게 하시니 츄후라도 미신함이 업거날 슬푸다 엇지 이러틋 생각지 아니하난고” 위는 의생이며, 국어학자였던 송촌(松村) 지석영(池錫永)이 황성신문 1903년 03월 24일 자에 발표한 “권종우두설(勸種牛痘設)” 일부입니다. 여기서 지석영은 “우두법이 나셔 우리 대한으로 말하더래도 이십 오년 지간에 그 효험 본 사람이 또한 몇십만 명이 될 것”이라며 그런데도 믿지 못하고 우두를 맞지 않는 사람이 있다고 개탄합니다. 이는 요즘 코로나19 백신에 관해 나
[우리문화신문=김영조 푸른솔겨레문화연구소장] “나의 병세가 심상치 않게 감각되오. 만일 내가 살아난다면 다행이거니와 그렇지 못하면 우리 동포에게 나의 몇 마디 말을 전하여 주오. 첫째, 독립운동을 하려면 전 민족적으로 하나 되어야 하고, 둘째, 독립운동을 으뜸 운동으로 하여 독립운동을 위하여는 어떠한 수단 방략이라도 쓸 수 있는 것이고, 셋째, 독립운동은 우리 민족 전체에 관한 공공사업이니 운동 동지 간에는 사랑과 미움이나 친하거나 친하지 않음의 구별이 없어야 합니다.” 이 말은 1923년 오늘(3월 23일) 대한민국임시정부 제2대 대통령이 된 박은식(朴殷植, 1859~1925) 선생이 1925년 11월 1일 67살을 일기로 숨을 거두기 직전 동포들에게 고한 말입니다. 박은식 선생은 황성신문 주필, 독립신문사 사장으로서 애국계몽운동을 하였으며, 1925년 3월 21일 임시정부 의정원이 <임시대통령 이승만 탄핵안(臨時大統領李承晩彈劾案)>을 통과시킨 다음 3월 23일 제2대 대통령으로 취임하였습니다. 특히 박은식 선생은 《한국통사(韓國痛史)》라는 한국근대사의 첫 번째 고전이 된 책을 쓴 분입니다. 《한국통사》는 한국근대사를 ‘국혼’이 담겨 있으면서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