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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문화편지

밀양경찰서에 폭탄을 던진 최수봉 열사

[얼레빗으로 빗는 하루 4694]

[우리문화신문=김영조 푸른솔겨레문화연구소장]  1920년 7월 29일 동아ㆍ조선ㆍ매일 3개 신문은 일제히 호외를 내고 ‘밀양폭탄사건’이라는 제목으로 대서특필 보도했습니다. 바로 이틀 전인 12월 27일 아침 9시 40분 무렵, 경남 밀양경찰서에 최수봉 열사가 폭탄을 던진 사건에 관한 기사입니다. 물론 이때 던진 두 발의 폭탄은 위력이 약하여 순사부장에게 타박상을 입혔을 뿐 큰 타격을 주지 못했지만, 이날 의거는 영남 일대의 항일 민심을 다시금 격동시켰고, 전투적 독립운동 진영을 고무시킨 것은 물론, 일제 경찰은 언제 또 그런 양상의 폭탄거사가 터질지 몰라 불안감에 떨게 한 큰 사건입니다.

 

 

최수봉 열사는 순사들이 우왕좌왕하는 사이 경찰서를 빠져나가 내달리다가 길가 한 집에서 칼을 가져다가 자기 목을 찔러 큰 상처가 난 채 실신하였지요. 이때 일본 순사들이 최수봉 열사를 병원에 옮겨 치료한 끝에 회생하였지만, 일제는 재판에 넘겨 부산지방법원에서 무기징역을 선고받았고, 대구복심법원에 상소되어 1921년 4월 사형을 선고받았습니다. 그러자 이 판결은 불법이라며 열사는 변호사를 통해 경기고등법원에 상고하였지만 기각당하고, 7월 대구형무소에서 사형이 집행되었지요.

 

최수봉 열사는 재판정에서 “세계 대세나 동양 대국상(大局上) 조선의 독립은 가능할 뿐 아니라, 이러한 행동은 조선 국민 된 자의 당연한 의무”라고 당당히 외쳤음은 물론 2심 판결에 불복하고 상고하면서 “우리 3천리 강토와 2천만 동포가 자유를 빼앗겼으니, 강토의 사용과 민족의 자유를 회복하려는 의사로 투탄한 것이다.”라며, 폭탄을 던진 것이 정당함을 만천하에 외쳤습니다. 열사는 확정판결 한 달 보름만인 7월 8일, 대구감옥에서 사형이 집행되었지요. 최수봉 열사는 1963년 건국훈장 독립장이 추서되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