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문화신문=우지원 기자] (p.64) 견훤은 절영마를 왕건에게 바쳤다. 그런데 미래를 예언하는 책에서 다음과 같은 구절을 읽고 무척 후회를 했다. ‘절영마를 보내면 백제가 망한다.’ 고민하던 견훤은 왕건에게 사람을 보내 돌려받기를 청했다. 왕건은 웃으면서 허락했다. 《해동악부》 중에서 어떤 보물이든, 보물에는 그 시대 사람들의 애환과 사연이 녹아있다. 그러나 그 어떤 귀중한 보물이라도 세월을 견디기란 쉽지 않다. 천 년이 넘는 세월과 함께 전설로 묻혀버린 보물도 많다. 그렇게 사라진 보물은 입에서 입으로 전해지며 후대 사람들의 귀한 이야깃거리가 되었다. 설흔이 쓴 이 책, 《지금은 사라지고 없는 역사 속 보물 이야기》는 낙랑의 자명고, 신라의 만파식적처럼 한 번쯤 들어보았을 법한 보물과 함께 그림자보다 빠른 말 ‘절영마’, 책을 으뜸가는 보물로 여겼던 책장수 ‘조신선’처럼 생소한 보물과 인물도 다룬다. 그 가운데 특히 눈길을 끄는 부분은 ‘절영마’다. 절영마 이야기는 조선의 대학자 이익이 쓴 《해동악부》에 나온다. 《해동악부》는 우리나라의 역사적인 사실들을 시의 형식으로 쓴 글이다. 이익은 절영마 이야기를 통해 견훤의 어리석음을 비판한다. (p.65) 말
[우리문화신문=우지원 기자] (p.81) 장다리는 한철이요, 미나리는 사철일세 미나리는 사철이요, 장다리는 한철이라 메꽃 같은 우리 딸이 시집 삼 년 살더니 미나리꽃이 다 피었네 표독한 장희빈, 천사 같은 인현왕후, 사랑에 눈멀어 부인을 내치는 숙종… 어느덧 역사를 단순하게 이분법적으로만 바라볼 수 없다는 것은 알게 되었지만, 그래도 이 선명한 선악의 구도는 어쩔 수 없는 흡인력이 있다. 인현왕후와 장희빈의 대립이 수많은 사극에서 무수히 변주되는 까닭이다. 인현왕후 폐비는 당대에도 참 충격적인 사건이기는 했다. 조선 개국 이래 왕후가 폐출되어 사가로 나가게 된 것은 처음이었으니, 당시 지식인들과 관료들은 군주의 독주를 막기 위해 필사적으로 저항하였으나 젊은 임금 숙종의 혈기를 막기에는 역부족이었다. 조임생이 쓴 이 책, 《인현왕후전》은 계축일기나 한중록과 더불어 대표적인 궁중문학으로 꼽히는 소설이다. 작자는 인현왕후를 모시고 있던 궁인이라는 설도 있고, 왕후 폐출에 반대하던 박태보의 후예나 왕후의 친정 가문에서 지은 것이라는 설도 있다. 줄거리는 대체로 다 아는 바다. 인현왕후 민씨는 숙종 당시 병조판서이던 민유중의 딸로 태어나, 어릴 때부터 아름답고 덕이
[우리문화신문=우지원 기자] (p.10) 옛집 새로 옮겨 이 물가에 지으니 그대 허술한 집 찾아와 어찌 견디냐 묻네 만 권 책의 훈기를 내가 경모하니 한 바가지의 물로 사는 삶에도 진정한 기쁨을 느끼네 스물여섯 해 전 마음먹었던 것을 오늘 되새겨 보매 근심은 동해물로 달려와 측량할 수가 없구나 퇴계 이황이 풍기군수를 끝으로 공직생활을 일단락짓고, 자기 고향에 ‘계상서당(溪上書堂)’을 짓고 읊은 시다. 20대 후반부터 꿈꿔 왔던 소망이 이제야 실현된 것을 기뻐하며, ‘만 권 책의 훈기’와 ‘한 바가지의 물’에도 감사하는 마음을 노래했다. 이황은 대학자이자, 문과에 급제하고 ‘직장생활’을 오래 한 관료이기도 했다. 그러나 그의 마음은 항상 학문 쪽에 더 있었던 것 같다. 마침내 온전히 학문에 집중하려 정계 은퇴를 결심하고 지은 서당이 계상서당이었다. 이 책, 《퇴계 이황》은 2,500년 유교 역사를 소설로 그려낸 최인호 작가의 《유림》을 청소년용으로 각색한 책이다. 동화작가 표시정이 쉽게 풀어쓰고 최인호가 머리말을 붙였다. 조광조, 공자, 이이 등 유교 사상계의 걸출한 인물을 다룬 최인호의 《유림》 6부작 가운데 여섯 번째 책이다. 이황이 정계 은퇴를 결심한 데
[우리문화신문=우지원 기자] 정도전. ‘조선개국’이라는 역사적 과제를 이뤄낸 인물로 첫손에 꼽히는 인물이 정도전이다. 조선 개국은 사실상 정도전이 이성계를 택해 이뤄낸 업적이라는 시각이 있을 정도로 정도전은 이방원과 더불어 개국의 일등 공신이었다. 이런 이방원과 정도전이 왕권과 신권(臣權)을 두고 힘겨루기를 하는 과정에서 결국 정도전이 패배하며 가문이 몰락하고 말았다. 그 뒤 정도전은 오랜 세월 잊혔다가 정조가 정도전의 글 《삼봉집》을 읽으며 조선 건국의 의미를 되새기고, 자신이 추구해야 할 개혁 과제를 찾으며 다시 부상했다. 마침내 흥선대원군 이하응이 통치하던 고종 8년(1871년) 3월, 정도전은 약 오백 년간 이어진 역적의 누명을 벗고 ‘문헌(文憲)’이라는 시호를 받았다. 조선 왕조를 개창한 공으로 후손 대대로 복록을 누릴 수 있었으나 한순간 몰락해 버린 아픔을 오백 년 뒤에야 떨쳐낸 것이다. 민병덕이 쓴 이 책, 《재상 정도전》은 새로운 시대를 꿈꾸던 한 풍운아가 겪은 삶의 부침을 알기 쉽게 풀어낸 책이다. 정도전의 인생은 순탄치 않았다. 굴곡진 어린 시절을 보내며 열과 성을 다해 공부해 고려왕조의 신하가 되었지만, 친원 정책에 반대하고 명나라와 가까
[우리문화신문=우지원 기자] 이황과 이이. 이름도 비슷한 두 사람은 조선 중기 비슷한 시기에 살면서 조선의 사상사를 한 단계 발전시킨 거목들이다. 지금도 천 원권과 오 천원권 지폐의 주인공으로 왠지 모를 친근함을 주지만, 두 사람이 어떤 생각을 하고 있었고 어떤 길을 걸었는지 견줘서 살펴본 일은 드물 것이다. 이황과 이이는 관직에 나아가 현실정치에 참여하는 경세가이기도 했지만, 조선 지성계를 주름잡는 학자이기도 했다. 특히 이황은 분주한 관료 생활보다 오늘날의 대학 총장과 흡사하게 후학을 양성하는 교육자의 역할을 더 만족스러워했던 것 같다. 조남호가 쓴 이 책, 《이황 & 이이, 조선의 정신을 세우다》는 비슷한 듯 다른 두 사상가의 모습을 견줘 보여주는 책이다. 둘은 ‘리(理)’에 대해 서로 다른 해석을 하며 사상적으로 대결하기도 했지만, 나라를 생각하는 마음으로 임금의 공부를 힘껏 돕기도 했다. 이황은 1501년에 태어나 1570년에 70살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고, 이이는 1536년에 태어나 1584년에 49살의 나이로 눈을 감았다. 이황의 사상적 스승은 중국 송나라 시대 학자인 주희였다. 주희를 평생 흠모했던 이황은 주희의 문집인 《주희대전》을 들
[우리문화신문=우지원 기자] 얼굴 좋은 것이 (相好) 몸 좋은 것만 못하고 (不如身好) 몸 좋은 것이 (身好) 마음 좋은 것만 못하다 (不如心好) 마음 좋은 사람, 호심인(好心人). 마음 좋은 사람은 어떤 사람일까? 여러 가지 정의가 있을 수 있겠지만, 김구 선생은 이렇게 생각했다. 무슨 일을 할 때든, 그 일이 ‘곧고 옳은 일인지 잘 판단하고, 실천하며, 또 그 일을 꾸준히 계속하는 사람’. 말은 쉬워도 지키기는 어려운 법. 마음 좋은 사람이 되기란 참 어렵다. 이 책, 현상선의 《나의 소원》은 백범김구기념관에서 펴낸 그림책이다. 김구가 평생토록 추구한 가치, ‘마음 좋은 사람’에 초점을 맞추어 어릴 때의 일화를 풀어낸다. 메시지가 단순한 것 같아도 독자가 ‘나는 어떤 사람이 되고 싶은가,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를 생각해 보게 한다. 이야기는 ‘창암’이 겪은 일에서 시작한다. 창암은 김구의 어릴 적 이름이다. 창암의 집안은 상민이었다. 그가 살던 해주의 양반들은 뿌리 깊은 선민의식이 배어있어서인지, 상민을 무시하고 천대했다. 창암의 할아버지가 양반들이 쓰는 갓을 쓰자 옆 마을 양반들이 갓을 뺏어 찢어놓기도 했다. 신분의식이 비교적 희미해진 구한말이었는데도
[우리문화신문=우지원 기자] 《무량수전 배흘림기둥에 기대서서》의 지은이, 그리고 제4대 국립중앙박물관장. 세간에 알려진 최순우의 가장 대표적인 업적이다. 오늘날 최순우, 라는 이름 석 자는 우리 박물관 역사에 깊숙이 새겨져 있다. 그러나 그의 인생은 굵직한 이력 몇 줄로 쉽사리 설명되지 않는다. 한국 문화유산의 아름다움을 알아보고 알리는 데 온 힘을 기울인 세월이 그만큼 무겁고 두터운 까닭이다. 그래서 이혜숙이 쓴 이 책, 《무량수전 배흘림기둥의 아름다움을 전한 혜곡 최순우》는 더욱 반갑다. 책에 실린 최순우의 박물관 외길 인생을 천천히 따라가다 보면, 자신이 좋아하는 일에 인생을 건 한 사람의 열정과 그 열정이 빚어낸 열매에 잔잔한 감동을 하게 된다. 그와 문화유산과의 인연은 송도고보 5학년 시절로 거슬러 올라간다. 개성에 살던 그는 송도고보 5학년 여름방학 때, 우리 문화유산에 대한 빼어난 감식안으로 이름난 우현 고유섭을 만나 스승과 제자의 인연을 맺는다. 고유섭은 우리나라 사람들에게 겨레 문화를 알리고 긍지를 심어 주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 깨우쳐 주었다. 글쓰기를 좋아하는 문학청년이었던 최순우에게 이런 격려는 천군만마와 같았다. 가난한 집안 형편으로
[우리문화신문=우지원 기자] (p.206) 임금을 어버이처럼 사랑하였고 나라를 내 집처럼 근심하였네 해가 아랫세상을 굽어보니 붉은 충정을 밝게밝게 비추어 주리 조광조가 사약을 마시기 전 남긴 절명시(絶命詩)다. 조광조의 죽음을 알자, 머리를 풀고 통곡하는 선비들이 적지 않았다고 한다. 조광조는 중종 재위 당시 조정에 출사하여 중종의 무한 신임을 받고 초고속 승진을 거듭하다가, 중종이 마음을 바꿔 갑자기 제거된 인물이다. 그의 행적을 두고 ‘정말 아까운 인물’이라는 평과 ‘지나치게 급진적이어서 적이 많았던 인물’이라는 평이 공존한다. 둘 다 맞는 말이다. 개혁을 부르짖는 ‘젊은 피’였으나, 10년에 한 번 추진하기도 어려운 개혁들을 3~4년 안에 완수하려는 조급증이 화를 불렀다. 신송민이 쓴 이 책, 《조광조》는 역사학자 33인이 고대에서 현대에 이르기까지 꼭 알아야 할 역사인물 60인을 골라 펴낸 ‘인물 이야기’ 가운데 20번째 책이다. 조광조는 중종 시대를 다룬 사극이나 한국 역사에 남을 선비를 다룰 때 빠지지 않을 만큼 비중 있는 인물이다. 조정에 화려하게 출사한 유림의 기대주였던 조광조는 명문대가 출신으로 짐작하기 쉽지만, 생각보다 증조부나 조부, 아버
[우리문화신문=우지원 기자] 청백리(淸白吏)! ‘청백’은 ‘청렴결백’을 줄인 말로, 마음이 깨끗하고 욕심이 없다는 뜻이다. 맑고(淸), 깨끗한(白) 그 이름처럼 청백하게 살다 간 이들이 있다. 조선시대 수많은 이들이 벼슬을 거쳐 갔지만, 그 가운데 청백리로 뽑힌 인물은 200명 안팎에 지나지 않는다. 그만큼 청백리가 된다는 것은 가문의 영예요 자랑스러운 일이었다. 예로부터 공직자의 으뜸 덕목은 청렴이었다. 지금이야 공직자도 재테크를 잘해야 기를 편다고 하지만, 조선시대에는 공직자가 가난한 것을 오히려 멋스럽게 여기는 풍조가 있었다. 공직자가 지나치게 윤택한 삶을 사는 것은 어떤 방식으로든 백성의 고혈이 녹아있다 보았던 까닭이다. 임영진이 쓴 책, 《어린이를 위한 청백리 이야기》는 비교적 자료가 풍부하게 남아있는 조선 시대 청백리들을 중심으로, 고려와 신라 때 청렴했던 관리들의 미담까지 모두 34인의 이야기를 담고 있다. 이 책이 소개하는 청백리의 미담을 읽다 보면 진정 어려운 길을 걸은 이들의 기백에 새삼 머리가 숙어진다. 자신이 조금만 손을 뻗으면, 조금만 눈을 감으면 금전적 이득을 볼 수 있는 순간들이 너무나 많기 때문이다. 자리가 올라갈수록 그런 유혹은
[우리문화신문=우지원 기자] 문화유산을 지키는 것은 쉽지 않다. 외세의 침략이 전혀 없었던 나라도 세월의 힘을 견디기 쉽지 않은데, 하물며 우리나라처럼 갖은 침입에 식민지 시절까지 겪었던 경우라면 옛 유산을 잘 보전하기란 하늘의 별 따기다. 실제로 많은 유산이 무관심 속에 잃어버리고, 도둑맞고, 팔려나갔다. 이렇게 우리가 잃어버린 유산들은 지금도 세계 곳곳에 흩어져 있다. 물론 문화유산의 나라 밖 반출이 꼭 나쁜 것만은 아니다. 적법한 경로로 판매된 것이라면 엄연한 소유권 이전으로 그 또한 존중되어야 한다. 다만 안타까운 것은 우리가 그 값어치를 알아보지 못하는 사이 너무나 많은 유산이 알 수 없는 방식으로, 때로는 난폭한 방식으로 없어져 버린 것이다. 중학교에서 역사를 가르치고 있는 안민영이 쓴 이 책, 《문화재를 지킨 사람들》은 이렇게 우리가 잃은 문화유산을 되찾아 오기 위해 노력한 사람들, 그리고 멋진 용기를 발휘해 돌려준 사람들에 관한 이야기다. 빼앗긴 입장에서야 당연히 돌려주는 게 맞지 않느냐고 할 수 있지만, 반출 경로가 어찌 되었든 돌려주기로 하는 것은 큰 용기다. 이해관계가 복잡하게 얽혀있는 현실에서는 한번 잃어버린 문화유산은 좀처럼 되찾기 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