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문화신문=이동식 인문탐험가] 이틀 전 늘 가던 둘레길 산책을 마치고 내려오던 중 입구에 흰 테이프가 처져 있었고 등산로를 폐쇄한다는 표시가 있었다. 태풍 피해를 막기 위함이렸다. 그러고 오후 내내 안내방송이 이어졌다. 밤새 걱정도 했다. 얼마나 엄청난 태풍이 오는 것일까? 새벽 4시에 얼른 창밖을 보았다. 어! 바람도 비도 잦아졌네? 그리고 다시 보니까 부산과 경남, 그리고 울산과 포항을 지나면서 400밀리가 넘는 엄청난 비로 곳곳이 물에 잠기고 정전이 되고 길이 끊기고 했는데 초기에는 인명피해가 알려지지 않았지만 지하 주차장에서 주민들이 대거 실종되는 등 안타까운 인명피해도 많이 났다. 역사상 유례가 없이 강한 태풍이라고 해서 다들 긴장하고 조심했지만, 자연의 위력 앞에서 인간은 다시 무력한 존재임을 확인시켜 주었다. 다음 날 아침 다시 산에 올랐다. 역시 상처가 꽤 있구나. 등산로 입구부터 비바람에 떨어진 나뭇잎과 제법 굵은 가지들, 빗물에 쓸려 내려온 길 모래와 작은 자갈들이 길 위에 올라와 있다. 조금만 땅이 낮은 곳에는 빗물들이 졸졸 흐르다가 아래쪽으로 가서는 굵은 물줄기가 되어 평지 근처에서는 폭포처럼 쏟아진다. 그런 가운데도 누가 쌓았는지
[우리문화신문=이동식 인문탐험가] 딱 10년 전 우리는 은평뉴타운 5단지에 집을 사서 이사 왔다. 이곳에서 작은 고개 하나를 넘으면 바로 한옥마을 단지. 처음 이사 왔을 때는 2년 동안 아래 사진처럼 허허벌판, 공터였다. 그러다가 은평역사한옥박물관이 맨 처음 생기고 시범주택이 생기더니 일반 한옥들이 들어서기 시작했다. 이 과정에서 애초 예상과 달리 분양을 시작하고 1년 동안에 12필지만 분양되는 등 부진을 면치 못했는데, 이를 세분하고 또 일반 주택으로 집을 짓는 곳도 분양하는 정책전환으로 2018년에는 필지가 모두 분양되면서 한옥마을 조성사업이 활기를 찾았다. 물론 한옥과 양옥이 절반씩 나눠서 절름발이 한옥마을이 되긴 했지만, 수도권에서 처음 조성한 한옥마을이기에 새로운 주거단지이자 일종의 관광명소로 점차 부상하기 시작했다. 현재 진관사에서 가까운 쪽은 한옥단지로만 분양이 돼 제법 한옥마을로서의 면모를 갖추어, 현재는 공터가 거의 없을 정도로 한옥들이 꽉 들어서는, 이름 그대로 한옥마을이 되었다. 이 과정에서 사람들은 내가 은평뉴타운에 산다니까 한옥마을이 가까운 데 있냐며 관심을 표하기 시작했다. 이에 따라 손님들을 집 옆 한옥마을로 가끔 안내하기 시작했는
[우리문화신문=이동식 인문탐험가] 최근 우리에게 전해진 희소식 가운데 하나는 우리나라 방위산업 분야에서의 수출이 크게 늘고 있다는 것일 거다. 연초에 이집트와 호주에 우리가 생산하는 K-9자주포를 수출하는 계약이 성사된 데 이어 최근에는 폴란드에 K2 전차 천 대와 K-9자주포 600대의 공급계약을 맺었다는 소식이다. 이어 현대자동차그룹이 올해 상반기에 사상 처음으로 세계 자동차 판매량 3위에 올랐다는 소식도 있다. 우리나라 선박 건조가 세계 1위가 된 지는 상당히 오래전의 일이다. 이렇게 자동차, 선박, 방위산업 분야에서 잇따라 들려오는 좋은 소식은 우리나라가 품질 좋은 철강제품을 생산하는 능력을 갖추고 있기에 가능했다는 사실이 깔려 있다. 우리나라가 철강제품의 강국이 된 것은, 말할 것도 없이. 1970년대에 포항제철이 우리 기술로 철을 만들어내는 능력을 갖춘 것이 발판이 되었고, 그것을 성사시킨 것은 고 박태준 포항제철 전 회장의 지대한 공임을 우리는 안다. 그렇지만 이 제철 기술을 확보하기 위해 우리가 전 세계 중요 선진국에 읍소를 했을 때 어느 나라도 거들떠보지 않았는데, 오로지 이웃나라 일본이 이 기술을 우리에게 제공하면서 건설비용도 청구권 자
[우리문화신문=이동식 인문탐험가] 영국 런던에서 손님이 왔다. 한 사람이 아니라 부인과 두 아들 등 가족 4명이 함께 왔다. 런던은 2002년 2월까지 내가 특파원으로 있던 곳이어서, 감회가 새로운데 간간이 소식을 듣기는 했지만 직접 거기 사는 사람들을 손님으로 맞이하였고 또 손님 가운데 올해 대학에 들어가는 젊은이도 있고 해서 그들로부터 잘 듣지 못하던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다. 남자야 일한다고 밖으로 돌아다니니 자세한 사정이나 느낀 점을 이를 정리해서 전해줄 그런 DNA가 없다고 할 것인데, 부인과 아이들은 다르지 않은가? 실제로 실생활에서 가장 많은 것을 부딪치고 느끼고 하는 쪽이니깐 그들의 증언(?)은 과연 생생하고 따끈따끈한 것들이었다. 그러니까 딱 20년 세월의 차이를 말해주는 증언이다. 이들의 증언을 알기 쉽게 정리해보면 1. 한국인의 위상이 엄청나게 올라갔다. 영국인들이 한국인을 보는 눈, 대하는 태도가 친근하고, 말을 걸면 아주 반갑다는 듯이 친절하게 응대한다. 2. 아들들이 학교에 가면 영국 친구들이 가까이하고 싶어 하고 물어보고 싶어 한다. 물론 한류 아이돌 소식도 있지만 때로는 한국문화나 역사에 대해서도 물어본다. 아무래도 자연스레 한국
[우리문화신문=이동식 인문탐험가] 중복이 지나고 입추도 지나고 다음 주초에 말복이 지나면 무더위도 제풀에 꺾을 것으로 기대를 하지만 요즈음 하루하루를 넘기기가 쉽지 않다. 장마가 간 것도 같고, 가지 않고 미련스럽게 한반도를 덮으면서 큰비를 내리기도 하고 그렇게 한 여름이 진행되고 있는데, 이 와중에 힘든 것은 우리들 서민이다. 서민이라고 하면, 당신이 무슨 서민이에요? 하고 필자에게 항의하실 분들도 있겠지만 전기요금이 무서워 에어컨을 마음대로 원하는 만큼 틀지 못하는 가정은 다 서민이라고 할 수 있지 않겠는가? 그래도 요즈음 여름 나기는 옛날 임금이나 황제도 못누리는 편안함과 사치가 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니 그것은 얼음을 마음대로 쓰고 먹을 수 있다는 것 때문일 것이다. 웬만한 집 냉장고에 얼음을 만드는 장치가 달려 있으니 필요한 만큼 만들어 쓰면 되고 그게 아니면 마트에 가서 빙과류나 청량음료, 심지어는 주류도 얼음처럼 시원한 것을 선택해 먹거나 마실 수 있으니 말이다. 그런데 이럴 때 “우리 어릴 때는 말이야~~” 하고 말을 시작하는 것이 나이 든 사람들의 공통적인 화법인데, 사실 우리 어릴 땐 얼음이 그렇게 쉽게 쓰거나 먹고 마실 상황은 아니었고
[우리문화신문=이동식 인문탐험가] 요즈음 텔레비전 방송에서 많은 사람에게 인기 있는 스페인식 새우요리가 있는데 한 번 만들어주겠다는 우리집 안주인의 제의가 있었다. 기대를 잔뜩 하고 어떻게 만드나 지켜보니, 냉장고에서 새우살을 꺼내어 해동하는 것은 기본이지만 우선 생마늘을 그것도 거의 한 접시나 될 듯한 양의 마늘을 조각을 내어 프라이팬에서 올리브기름으로 서서히 익혀내고는 거기에 새우를 넣어 볶는다. 요리 이름이 감바스 알 아히요(스페인어: gambas al ajillo) 또는 감바스(gambas)란다. 말하자면 마늘 새우볶음인 셈인데, 맛은 그런대로 좋았다. 이 과정을 보면서 서양요리에 이렇게 많은 마늘을 한꺼번에 넣는 것을 처음 본 셈이어서, 나의 상식이 우르르 무너지는 경험을 했다. 서양 사람들이 마늘을 잘 안 좋아한다고 생각했는데 이처럼 한꺼번에 많은 마늘을 넣어 요리를 만든단 말인가? 며칠 전 중복 때 삼계탕을 먹으면서 닭고기 안에 놓은 마늘, 그리고 별도로 나온 접시에서 마늘 조각을 집어 고추장에 찍어 먹는 등 우리는 마늘을 꽤나 먹는다고 생각했는데 우리보다 더 많이 마늘을 먹고 있었단 뜻이 된다. 우리 겨레는 단군 신화에서 곰이 마늘이랑 쑥을
[우리문화신문=이동식 인문탐험가] 중복을 지나니 이제 올 더위도 막바지로 접어든다. 다시 엄청 더운 날씨, 이런 상태는 찌는 더위인지 찌는 듯한 더위인지, 어느 표현이 더 정확한지 잘 모를 정도로 덥기는 덥다. 요사이 선풍기다 에어컨이 있으니 몸은 시원해질 수 있지만(우리 집은 아직 에어컨을 안 켰다. 그 비싼 에어컨 사 놓고 왜 안 쓰는지 이것도 고집의 하나겠지) 정신이 문제다. 더위에 탁 지쳐 아무 생각도 하기 싫다. 이럴 때 머리까지 식혀줄 시원한 바람은 없을까? 지난 초여름 다녀간 경북 예천 봉양면 삼강리 마을의 한 집에 걸린 글씨가 생각났다. 이름하여 ‘백세청풍(百世淸風)’이다. 삼강마을은 이름에서 보듯 낙동강과 내성천, 금천의 세 물길이 만나는 곳, 이곳은 문경 새재와 예천 안동의 내륙지방, 그리고 상주로 이어지는 낙동강 유역사람과 물자들이 교차하는 곳이다. 이곳 나루에 주막마을이 조성돼 관광객들이 찾고 있거니와 거기서 멀지 않은 곳에 있는 마을에 임진왜란 직후 정승을 지낸 약포(藥圃) 정탁(1526~1605)의 셋째 아들 청풍자(淸風子) 정윤목(1571∼1629)이 세운 삼강강당이 있다. 청풍자는 나이 19살 때 중국 사신으로 가는 아버지를 따라
[우리문화신문=이동식 인문탐험가] 7월 한더위 불덩이 같은 해가 하늘에 덩그러니 걸렸고, 바람도 구름도 없었다. 이런 뙤약볕에 앞뒤 뜰이 마치 커다란 풍로처럼 달아오르는데 새 한 마리도 감히 얼씬하지 못한다. 온몸에 흐르는 땀이 이쪽저쪽으로 개울을 이루듯 하니 밥상을 앞에다 놓고도 먹을 엄두를 내지 못한다. 댓자리를 깔고 땅바닥에 풀썩 눕고 싶었지만, 촉촉한 바닥도 기름처럼 끈적였다. 게다가 파리가 덤벼들어 목에도 윙윙, 코끝에도 윙윙, 쫓아도 쫓아도 좀처럼 도망가지 않았다. 정말 어찌할 바를 몰라 쩔쩔매는데, 갑자기 하늘로부터 시커먼 수레바퀴들이 굴러오는 듯, 아니면 수백만 개의 북이 한꺼번에 울리듯 우르꽝꽝 천둥이 울리며 소나기가 내리퍼부었다. 처마 끝의 낙수는 폭포보다 요란했다. 땀이 걷히고 습기가 가시고 파리떼가 자취를 감추자 숟갈을 들었으니 이 또한 즐거움이 아닌가. 요즈음 우리 농촌의 무더위를 여실하게 그려낸 것 같은 이 문장은 명나라가 망하고 청나라가 일어나는 이른바 명말청초(明末淸初)를 살았던 중국의 지식인 김성탄(金聖嘆)이 쓴 글이다. 다른 게 있다면 목에도 윙윙, 코에도 윙윙하는 파리가 좀 많다는 정도이지만, 농촌의 한여름은 이렇게 사람을
[우리문화신문=이동식 인문탐험가] 비가 온다는 것은, 우산을 들고 있지 않은 사람에게는 가는 길을 멈추게 하는 힘이 있다. 며칠 전 구파발역 쪽 병원에 내려갔다가 구파발천 옆길을 따라 올라오는데 예보에 없는 비가 뚝뚝 떨어지기 시작하더니 제법 굵은 빗줄기로 바뀌어 내리기 시작한다. 우산이 없으니 우선 길 중간에 설치된 휴게시설의 한 의자에 앉아 비를 피하며 쉬다가 문득 뒤를 보니 의자 뒤편에 시가 하나 판에 새겨져 있는데 자세히 보니 윤동주 시인의 <새로운 길>이란 시이다. 내를 건너서 숲으로 고개를 넘어서 마을로 어제도 가고 오늘도 갈 나의 길 새로운 길 민들레가 피고 까치가 날고 아가씨가 지나고 바람이 일고 나의 길은 언제나 새로운 길 오늘도 내일도 길 내를 건너서 숲으로 고개를 넘어서 마을로 윤동주 하면 대충 '별을 헤는 밤'이라던가 '서시(序詩)'를 접해 온 우리에게 "아이구. 윤동주에게 이런 시가 있었나?" 하며 그의 시를 다시 보게 한다. 만주 용정에서 태어난 윤동주가 서울 연희전문을 다니면서 시를 많이 썼고, 이 시도 그때 써서 교지인 문우(文友)에 발표한 것이라는데, 청년 윤동주가 이런 소년 같은 감수성으로 새로운 길을 가고
[우리문화신문=이동식 인문탐험가] 사람은 망각의 동물이다. 아무리 중요하고 의미 있는 일이라도 금방 잊어버린다. 국수 한 그릇에 담긴 이야기도 그런 것 같다. 새 대통령이 취임한 뒤 얼마 되지 않아 집무실 근처에 있던 한 국수집에 들른 일이 있었다. 언론들은 곧 이 국수집이 10년 만에 한 번씩 언론에 주목을 받은 사실을 소환해내었다. 1998년 겨울 이른 오전, 초라한 옷차림의 한 40대 남성이 서울 삼각지에 있는 국숫집에 들어왔다. 가게 주인 배 할머니는 한눈에 그가 노숙자임을 알아차렸지만, 말없이 당시 2,000원 하던 온국수 한 그릇을 말아줬다. 그가 허겁지겁 그릇을 비우자 다시 한 그릇을 더 줬다. 식사를 마친 남성은 '냉수 한 그릇 떠달라'고 했고, 배 할머니가 물을 떠 오기 전 달아났다. 그러자 배 할머니는 가게를 나와 앞만 보고 뛰는 그의 뒷모습에 대고 외쳤다. 그리고 또 말해주었다. "뛰지 말어. 넘어져 다칠라!" “배고프면 담에 또 와!” 물론 이 이야기는 아무도 기억하지 못하고 묻혀질 뻔했었다. 그러다가 10년쯤 지난 뒤에 한 방송사에 제보편지가 왔다. 국수를 먹고 달아난 남성은 남미에 이민 가서 살고 있었는데 10년 뒤에 마침 이 국숫