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문화신문 = 이윤옥 기자] 동풍신 열사님! 열사님을 어떻게 불러야 할까요? 아무래도 ‘열사’라는 호칭은 조금 거리를 두고 부르는 것 같아, 처음에는 ‘동풍신 할머니’로 부르고 싶었습니다. 그런데 17세 꽃다운 나이에 순국하신 열사님을 할머니라고 하려니까 아무래도 제게 떠오르는 동풍신 열사의 이미지와는 잘 맞지 않는 것 같고, 그렇다고 ‘동풍신 누나’라고 하려니 조금은 불경스러운 것 같네요. 그런데 열사님과 비슷한 나이에 순국하신 유관순 할머니에 대해 유관순 열사라고 많이 부르고, 또 유관순 열사 기념관도 있어, 저도 ‘동풍신 열사’라고 부르렵니다. 동풍신 열사님! 제가 처음 열사님을 만난 것은 이윤옥 시인의 시를 읽으면서입니다. 천안 아우내장터를 피로 물들이던 순사놈들 함경도 화대장터에도 나타나 독립을 외치는 선량한 백성 가슴에 총을 겨눴다 그 총부리 아버지 가슴을 뚫어 관통하던 날 열일곱 꽃다운 청춘 가슴에 불이 붙었다 이윤옥 시인이 열사님에 대한 뜨거운 가슴을 토해낸 시입니다. 이시인은 동풍신 열사와 유관순 열사가 3.1 만세운동으로 순국하였고, 또 순국할 때 나이가 비슷했던 점 등으로 두 분을 같이 놓고 시를 썼더군요. 저는 이시인의
[그린경제=이윤옥 문화전문기자] 자장면 값이 오백 원에서 육백 원으로 올라가던 때였나? 나는 덕천동에서 청요릿집 배달을 했다. 면을 치는 소리를 들으면 왠지 후련했다. 교복도 자율화가 되어 공부에 대한 미련도 조금 옅어져 그냥 되는 대로 살고 싶었다. 그날따라 반주로 막걸리 반통을 먹어서 그랬는지 빈 그릇을 찾아오기 위해 '고바위'(언덕)를 자전거를 끌고 올라갔다. 시원스럽게 내리닫던 자전거에서 브레이크가 튕겨지던 느낌. 도로 가에서 손님을 기다리던 택시에 자전거가 대신 죽고 살아남긴 했지만 처음으로 죽음의 냄새를 뜨거운 짬뽕 국물처럼 뒤집어 쓴 것이다. - '내 마음속의 이곳'(부산일보) - 고바위를 흔히 언덕배기쯤으로 잘못 알고 쓰는 경우가 많다. 예문을 찾다보니 어느 시인의 글이 올라와있다. 이 시인은 고바위라 써놓고 안심이 안 되는지 괄호 속에 언덕으로 다시 보충하고 있다. 시인 자신은 고바위로 많이 쓰고 있는 모양이다. ▲ 1934년 4월 21일 남회선의 구배(코-바이) 기사 (북선일보) 이 말은 일본말 코-바이(勾配, こう‐ばい)에서 온 말로 이 말이 와전되어 고바위가 된 것이다. 언뜻 보면 고(高)+바위 같아 순 우리 토박이말 같
이른 아침 잔디에 이슬이 촉촉이 맺혀있는 인원왕후 무덤 명릉(明陵)에 다녀왔다. 고양시 서오릉(西五陵) 안의 명릉에 잠들어 있는 인원왕후 무덤을 찾은 데는 특별한 까닭이 있다. 그의 친정아버지 김주신이 머물던 대자동의 영사정(永思亭)과 관련된 기사를 쓰다가 인원왕후를 알게 되었고 공부를 하다 보니 이 집안사람들의 인품이 사람을 매료하게 하는 점이 있어 인원왕후를 좋아하게 되었다. 인원왕후는 숙종의 두 번째(실제로는 민경왕후 김씨, 인현왕후 민씨에 이어 3번째)왕비이다. 나이 16살에 왕비가 되어 숙종과 19년을 살았지만 소생이 없었다. 그러나남편 숙종 사후 경종과 영조가 인원왕후의 아들로 국왕이 되었다. 특히연잉군을 왕세제로 책봉하는데 결정적인 힘을 발휘했다. 연잉군은 훗날의 영조임금이다. 숙종과 최무수리 사이에서 태어난 영조는 인원왕후의 적극적인 후원으로 국왕이 된 이래 인원왕후를 친어머니만큼 극진히 모셨으며 인원왕후 사후에는 눈물을 흘리며 친히 대왕대비행록(영조 33년,1757년)을 짓기도 하였다. ▲ 인원왕후 무덤(왼쪽 아래 언덕에 작게 보이는 무덤이 숙종과 인현왕후 무덤) 한 번 바람이 불거나 한 번 비가 내리는 것도 한결같이 지나쳐 버리신 적이
▲ 휴먼북이 되어 학생들에게 '일본이야기'를 들려주는 기자 ‘일본 문화에 관심이 많다’는 고2 남학생을 만나러 가면서 무엇을 말해줄까 하는 생각에 어느새 노원정보도서관에 도착했다. ‘일본 문화’도 워낙 폭이 넓다보니 어떤 말부터 꺼낼지 염려스러웠지만 그 보다는 필자를 신청한 학생이 어떤 학생일까 궁금했다. 2012년 12월 22일 토요일 오전 11시. 필자는 노원휴먼라이브러리에서 독자와의 만남을 가졌다. 휴먼라이브러리란 말 그대로 인간이 책이 되어 나를 신청한 신청자와 대화를 나누는 것이다. 조금 생소할지 모르는 분들을 위해 노원휴먼라이브러리(관장, 양시모)의 누리집에 있는 의미와 유래를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 ‘Living Library'라는 이름으로 시작된 이 도서관은 덴마크 출신의 사회운동가 로니 에베겔이 2000년 덴마크에서 열린 한 뮤직페스티벌에서 창안한 것으로 유럽에서 시작되어 빠른 소도록 전 세계로 확산되고 있는 신 개념의 이벤트성 도
“도시코시소바(年越しそば, 해넘이국수)를 먹는 풍습은 전국 각지에서 볼 수 있으며 지역 특색을 살린 다양한 국수가 선보이고 있다. 해마다 12월 31일에 해넘이국수를 먹는 사람들은 57.6%에 달하며 이러한 풍습은 일본의 문화로 깊이 정착되어 있다.” 네트리서치 DIMSDRIVE에서 “연말연시를 보내는 방법”을 설문조사한 결과(조사기간 2010년12월28일~2011년1월13일) 해넘이국수를 먹는다는 사람은 57.6%였으나 젊은 층은 거의 무관심한 것으로 나타났다. 이제 슬슬 일본 주부들은 12월 31일 밤에 가족과 함께 식탁에 둘러 앉아 먹을 메밀국수를 장만 하느라 분주할 것이다. 메밀국수 판매의 최대 대목인 요즈음 일본의 상점이나 백화점, 인터넷 통신판매처에서는 쇄도하는 메밀국수 주문에 즐거운 비명을 올릴 시간이기도 하다. 올해로 250년째 메밀국수를 만드는 나가노현(長野縣)의 고즈마야(小妻屋)의 누리집(홈페이지)에는 “12월 28일에 한정해서 판다”는 안내문을 큼지막하게 써놓고 있는데 미리 주문을 받아서 당일 날 일제히 발송한다고 하니 이 가게의 해넘이국수 값은 대관절 얼마나 될까? 오래된 가게답게 메밀국수 5~6인분은 송료포함 3,500엔(44
“어제 백악관 앞에서 내셔널 크리스마스트리 점등식이 있었는데 버락 오바마 대통령이 가족과 함께 행사에 참석해 골치 아픈 정치, 외교 문제를 잠시 잊고 크리스마스 분위기를 즐겼다”는 기사가 보도되었다. 올해로 89년의 역사를 자랑하는 이 거대한 트리는 1923년 캘빈 쿨리지 당시 대통령이 시작한 이래 미국의 전통이 되었다고 한다. 서양에서 시작된 성탄트리는 한국에도 뿌리(?)를 내린 듯 호텔이나 크고 작은 건물은 물론 서울거리 곳곳에 어김없이 그 찬란한 트리가 등장했다. 서양의 성탄트리를 연상 시키는 장식물이 일본에도 있는데 보통 연말연시에 집 대문이나 회사, 상점, 관청의 건물 입구 등에 매달아 두는 장식물로 외국인들의 사진기 세례를 받기도 한다. 대표적인 것으로는 시메카자리(注連飾り)를 들 수 있는데 12월 25일에서 28일 사이에 대문에 매다는 장식물로 시메카자리의 재료는 요즘처럼 수확을 하고난 지푸라기로 만드는 것이 아니라 원래는 수확 전의 파릇파릇한 벼이삭을 베어 말려 사용했었다. 이러한 장식을 하는 까닭은 농사의 신(稻作信仰)을 받드는 의식에서 유래한 것이다. 이는 풍년을 기원하고 나쁜 액운을 멀리하려는 뜻으로 신도(神道)가 지향하는 바와 같다고
“일본인들은 11월만 되면 모두 문을 꽁꽁 걸어 잠그고 연하장을 쓴다.”고 일본에 있을 때 나는 친구에게 농담을 건넨 적이 있다. 회사에 다니는 사람들은 백여 장 이상, 평범한 사람이라도 적게는 십여 통, 많게는 수십 통 씩 쓰는 일본인들을 보면서 힘들지 않느냐고 물어 본 적이 있다. 대답이 재미나다. 그만 보내고 싶지만 상대가 보내니까 어쩔 수 없이 보내고 있다는 고백을 살짝 귀에 대고 하던 친구들 모습이 떠오른다. 무소식이 희소식이라는 말이 있는 한국인들에게 “유소식이 희소식”인 일본인들의 연하장 풍습은 이해하기 어려울 것이다. 물론 한국에서도 연하장을 주고받지만 본인의 글씨가 아닌 규격화된 연하장을 보내거나 대필을 시킨 듯한 연하장은 별로 인기가 없다. 일본인들의 연하장은 반드시 자신의 빛깔로 자신의 향기를 담아 보낸다는 게 특징이라면 특징이다. 연하장은 대개 연하엽서를 이용하는데 판에 박힌 우체국 엽서가 아닌 자신만의 독특한 엽서를 만들어 보내는 것이 일본 연하장의 묘미다. 자녀가 결혼을 했으면 결혼사진을, 아기가 태어나면 방긋 웃는 아기사진을, 파리여행을 했으면 에펠탑 아래서 찍은 사진 등을 엽서에 아로 새겨 마치 ‘저희는 한해를 이렇게 살았습니
날씨가 추워짐에 따라 따뜻한 국물이 있는 음식이 그리워지는 계절이다. 포장마차 안에서 김이 모락모락 나는 오뎅(표준말 어묵) 한 그릇은 추운 몸을 녹이기에 그만이다. 겨울이 되면 필자는 일본에서 먹었던 오뎅이 생각난다. 고춧가루를 쓰지 않고 간장이나 소금 간을 해서 먹는 일본음식을 몇 끼니 먹어 본 사람은 누구나 한국의 매콤한 음식을 그리워한다. 닝닝했던 일본 음식 가운데 가장 맛나게 먹은 음식이 바로 이 오뎅이다. 한국에도 오뎅을 팔고 있는데 대개 포장마차 수준으로 맛이 천편일률적이지만 일본의 오뎅은 ‘오뎅정식’으로 꽤 괜찮은 식당에서도 맛볼 수 있는 음식이다. 와세다대학에서 만난 케이코 씨는 겨울만 되면 자신의 집으로 나를 불러 정성스런 오뎅 요리를 대접했는데 안타깝게도 몇 해 전 암으로 세상을 떠났다. 비교음식문화연구가인 아라이요시미(新井由己) 씨가 지은 《일본 전국 오뎅 이야기(日本全おでん物語)》에 따르면 오뎅의 출현은 무로마치시대(室町時代1336~1573)로 거슬러 올라간다. 당시의 뎅가쿠(田樂)를 궁녀들은 오뎅(御田)이라 불렀는데 뎅가쿠는 꼬치에 낀 야키뎅가쿠(燒き田樂)와 꼬치에 끼지 않고 끓여낸 니코미뎅가쿠(煮み田樂)두 가지였다. 그러나 오늘날
엊그제 11월 17일은 제73회 순국선열의 날로 전국 곳곳에서 나라를 위해 순국하신 분들을 기리는 행사를 가졌다고 신문과 방송에서 보도했다. 이러한 국가 행사에서 빠지지 않고 하는 것이 있는데 “국민의례”가 그것이다. 국민의례란 국립국어원의 표준국어대사전에 정의 하기를 “국민의례(國民儀禮): 공식적인 의식이나 행사에서 국민으로서 마땅히 갖추어야 할 격식. 국기에 대한 경례, 애국가 제창, 순국선열에 대한 묵념 따위의 순서로 진행한다.”라고 정의하고 있다. 그러나 결론부터 말하자면 이 말은 일본에서 유래 한 것으로 일본 위키피디어 사전에는 그 출전을 《영남판교회100년사,南坂100年史》로 밝히면서 “國民儀禮(こくみんぎれい)とは、日本基督團が定める儀禮樣式のことで、具體的には宮城遙拜、君が代齊唱, 神社參拜」である。” 곧 이를 우리말로 번역하면 “국민의례란 일본기독교단이 정한 의례의식으로 구체적으로는 궁성요배, 기미가요제창, 신사참배이다”라고 밝히고 있다. 일본의 국민의례를 표준국어대사전이 그대로 베끼면서 스리슬쩍 “국기에 대한 경례, 애국가 제창, 순국선열에 대한 묵념”으로 바꿔 놓은 것이다. 더 황당한 일은 필자가 국립국어원 온라인가나다에 질문한 국립국어원 쪽 답변이
[우리문화신문 = 이윤옥 기자] “일본요리는 눈으로 먹는다.”라는 말이 있다. 내가 볼 때는 일본과자도 그런 것 같다. 흔히 일본전통 과자를 화과자(和菓子, 와가시)라고 한다. 명치유신 이후 일본엔 과자를 비롯한 서양문물이 봇물처럼 밀려들어 왔는데 이때 들어온 과자를 양과자(洋菓子, 요가시)라고 부르고 일본 전통 과자를 화과자라 부르는 것이다. 우리로 치면 한과(韓菓)에 해당한다. 특히 다도(茶道)가 발달한 일본에서 화과자는 차를 대접하는 자리에 빼놓을 수 없는 과자이다. 화과자는 모양과 색이 다양하여 거의 예술작품에 가까운 과자도 수두룩하다. 대개 기름지지 않고 담백하지만 설탕을 많이 써서 그런지 매우 달다. 설탕이 흔치 않던 시절에는 주로 감이나 화삼분(和三盆, 와삼봉)이라고 해서 사탕수수로 만든 정제되지 않은 흑설탕 덩어리를 사용했는데 특유한 향이 있어 지금도 고급 화과자의 재료로 사용된다. 화과자를 예술작품으로 생각해 여름엔 청량감을 느끼도록 과자를 투명하게 만들고 가을에는 단풍을 연상케 하는 등 화조풍월 모양 과자도 만들어 내고 있다. 특히 화과자 중에서 천년 수도였던 교토에서 만드는 과자를 경과자(京菓子, 쿄가시)라고 부르며 2~3백년 된 과자점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