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린경제 = 조기태 세종마을 가꾸기회 대표] ▲광화문을 배경으로 세종대왕이한글 선포식을 하는 모습 지난 10월 9일 567돌 한글날을 맞아광화문광장에서 세종마을가꾸기회 (대표 조기태)는 한글문화연대와 함께 한글날 567돌 기념식을 성대히 열었다. 이날 행사에서 종로구의회 오금남 전반기 의장이 세종대왕역을 맡아 붉은 곤룡포를 입고 훈민정음을 반포하는 장관을 연출하여 시민들의 눈길을 끌었다. ▲ 경복궁에서 세종생가터 까지 세종임금의 거리행진 이날 행사는 600여명의 시민들이 참석하여 경복궁을 거쳐 세종대왕 생가 터가 있는 세종마을까지 한글날 기념 걷기대회를 열었다. 이는 서촌일대가 거의 방치되다시피 하고 있는 현실을 되짚고 위대한 겨레의 스승 세종대왕 생가마을을 널리 알리는 뜻 깊은 행사였다.
[그린경제 = 조기태 기자] 청송당은 성혼(1535~1598)의 아버지인 청송 성수침(成守琛 1493~1564)의 별당이었다.청송당 이란 이름은 눌재 박상 (1474~1530)이 지어준 것이라고 한다. 그가 북악산과 인연을 맺게 된 것은 그의 부친 성세순(1463~1514) 때 부터로 성혼은 조부 성세순 행장인「조고 가선대부 사헌부 대사헌 시사숙공 행장」에서 백악산 아래 집을 정하였는데 숲이 깊고 땅이 외져 자못 산수의 멋이 있었다. 공무를 마치면 지팡이를 들고 신발을 끌며 왕래 하였다. 계곡마다 두루 찾아다니며 시를 읊조리고 돌아갈 줄 몰랐다 라고 사연을 밝혔다. 성수침이 본격적으로 이곳에 기거하게 된 계기는 1519년 기묘사화 때 스승이 처형 되고 선비들이 화를 입자 관직에서 물러나 이곳에 청송당을 짓고 제자 양성에 힘을 써서 많은 석학들을 배출하였다. 임억령(1496~1568)은「청송당기」에서 성수침의 청송당 생활을 이렇게 소개하였다. 의롭지 않은 명성과 공명,부귀 따위는 썩은 쥐나 똥으로 보았다. 고고하게 누워 몸을 일으키지 않고 이곳에서 10년을 살았다 성수침이 죽은 뒤 1668년에 외손 윤순거와 윤선거 등이 다시 중건하여 송시열,남구만 등과
[그린경제 = 조기태 기자]청계천은 인왕산과 북악산이 만나는 지점에서 발원하여백운동계곡을 시작으로 청풍계곡 물과 수성동계곡 물이 합류해서 세종마을을 관통하여 서울의 서쪽에서 동쪽으로 흐르는 서출동류(西出東流)이다. ▲ 청계천 발원지 표지석 28개의 지류가 본류에 흘러들어 청계천을 이루는데, 그중 가장 멀고, 가장 길며 가장 높은 곳에 있는 이 지점에 2003년 종로구에서 발원지 표지석을 설치하였다. 인근에 창의문과 윤동주문학관, 최규식 경무관 동상이 있다. ** 조기태 : 세종마을가꾸기회 대표
[그린경제=조기태 기자] 송강 정철은 1536년 서울 청운초등학교 터에서 태어났다. 청운초등학교 담장에는 정철의 관동별곡과 사미인곡. 성산별곡 등 그의 작품들로 시비를 만들어 놓았다. 정철하면 전남 담양 창평을 고향으로 알고 있으나 그는 이곳 청운동 에서 태어났다. 고조부가 병조판서를 지냈고 아버지 정유침은 정5품 돈녕부 판관 벼슬을 했다. 한마디로 집안이 좋아 상류층으로 잘 살았다. ▲ 종로구 청운초등학교 담장 주변에 세운 송강 시비 (관동별곡) 그러나 호사다마 라고나 할까 정철의 큰누이가 인종의 둘째 부인인 정귀인 이었으나 인종이 보위 8개월 만에 죽자 정철 집안은 이른바 대윤에 속해 집안은 풍비박산이 되어 아버지는 함경도 전평부로 귀양을 갔다가 영월에 머물게 되었다. 그 후 아버지가 전남 창평(담양)으로 이사했는데 그때 송강은 고봉 기대승의 문하생이 된다. 하서 김인후의 제자가 되면서 양송천과 임석천으로 학문을 이어받아 송강은 장원급제하여 벼슬길에 들어섰고, 여러 관직을 거쳐 1580년 45세 나이에 강원도 관찰사로 나가서 관동팔경을 유람한 후 유명한 관동별곡을 지었다. ▲ 담장을 따라 늘어 선 송강 시비 (성산별곡) 정철은 평소 술을 좋아하고
[그린경제=조기태 기자] 필운대는 선조 때 좌의정을 지냈던 백사 이항복의 집터로 여기에는 이항복이 썼다는 필운대라는 글자가 암벽에 새겨져 있고 중간에 필운대를 소개한 글이 있다. 이글은 고종 때 영의정을 지낸 이항복의 9대손인 귤산(橘山) 이유원(李裕元,18141888)이 고종 10년(1873) 이곳에 들러 조상의 자취를 보고 느낌을 적은 글이다. ▲ 종로구 필운동 산 1에 있는 이항복이 썼다는 弼雲臺 글씨 우리 조상 옛집에 후손이 찾으니 我祖舊居後裔尋 푸른 솔과 돌 벽에 흰 구름 깊네 蒼松石壁白雲深 남기신 풍모 백년 넘게 오래이니 遺風不盡百年久 노인장의 의관은 예나 지금이나 父老衣冠古亦今 (계유년 월성 이유원이 백사선생의 필운대에 제하다. 癸酉 月城 李裕元題 白沙先生 弼雲臺) ▲ 필운대 글씨 옆에는 이항복의 9대손인 귤산(橘山) 이유원(李裕元,18141888)이 고종 10년에 썼다는 시가 세겨져 있다. 이항복(李恒福, 15561618)의 본관은 경주(慶州), 호는 필운 외에 백사(白沙)라고도 했다. 고려 말의 대학자 익재(益齋) 이제현(李齊賢)의 방계 후손이며 참찬 이몽량(李夢亮, 14991564)의 아들이다. 뒤에 오성부원군(鰲城府院君)에 봉해졌
[그린경제=조기태 기자]지금의 청운동 경복고등학교 일대(종로구 청운동 89-9)는 조선시대의 지명이 유란동 난곡이었는데 겸재 정선(1676~1759)이 태어 난 곳이다. 정선은 이곳에서 52살까지 살다가 이후 인왕산 아래 인곡정사(인왕유거, 현재의 옥인동 20)으로 이사해서 84살로 죽을 때까지 그림의 완숙기를 살았다. 이곳은 1746년에 자신의 그림으로 남겼다. 2011년, 서울문화재단에서 군인아파트 앞마당에 자그마한 겸재정선 쉼터를 만들었다. ▲ 경복고등학교 경내에 있는 겸제 정선 집터 표지석 본관은 광주(光州), 호는 겸재 또는 난곡이다. 어렸을 때 집 근처에 살았던 농암 김창협, 삼연 김창흡, 노가재 김창업 문하에서 시서화를 배웠다. 14살 되던 생일에 아버지를 여의고 스승 김창흡이 낙향하자 그림의 길을 선택했다. 탁월한 그림 솜씨로 진경산수화의 새 경지를 개척하였다. 경상도 하양 및 청하 현감을 거쳐 65살에 경기도 양천 현령, 79살에 사도시 청정, 81살에 종 2품인 동지중추부사 따위를 지냈다. 겸재는 조선후기 가장 뛰어난 화가로 인왕산 주변의 명승지를 그린 장동팔경첩과 국보 제216호로 지정된 인왕제색도 등 불후의 명작을 남겨 화성으로 추
[그린경제=조기태 기자] 세종마을이란 인왕산과 경복궁, 청와대 사이에 있는 청운동, 신교동, 궁정동, 효자동, 창성동, 누상동, 누하동, 옥인동, 통인동, 통의동, 체부동, 필운동, 적선동일부, 사직동 일부 등 14개 법정동을 일컫는 별칭인데, 위대하신 세종대왕 탄생지라는 위풍당당한 역사적 공간이 있어서 붙여진 이름이다. 이 마을에서 겨레의 큰 스승 세종대왕께서 태어나시고 자라서 훗날 위대한 업적을 남기셨는데 그 역사적 의미를 오늘에 살려 세종탄신 614주년이 되는 2011년 5월 15일 종로구와 함께 이곳 주민들이 이 지역의 역사 문화적 가치를 높이고자 이곳을세종마을이라 이름하고 그 선포식을 성대하게 가진데서 비롯되었다. ▲ 지난 5월15일 세종탄신일 행사에서 종로구청장(김영종)이 세종이 되어 태어나신 곳에서 기념촬영 옆에는 정세균 국회의원 태조 5년(1396년)한성부 (서울)의 정식 행정 구역을 청계천을 기준으로 5부(동.서.중.남.북) 52방으로 편제할 때 이 지역은 북부로 구분하고 준수방, 순화방, 의통방 등으로 세분 하였으며 우대 또는 웃대, 상촌(上村)이라고도 불렀고 여기사는 사람들을우댓사람 또는 상촌인 이라 했다. 태조 6년 (1397년)
[그린경제=조기태기자] 통인동 154-10 에 천재 시인이자 소설가인 이상(1910-1937)이 살던 집이 있는데 문화유산 국민신탁에서 이 집을 매입하여 전시관으로 사용하고 있다. 아버지가 이발소를 운영하던 사직동에서 태어난 이상이 큰 아버지 김연필의 양자로 들어가던 세살 때부터(1912년) 1933년 까지 초,중,고교를 여기서 다니고, 총독부의 건축과 기사로 근무 할때까지 스물 두해를 살았던 곳이다. 본명은 김해경이다. ▲ 천재시인 이상의 집은 지금 기념관으로 쓰고 있다 이 곳에서 1930년 첫 장편소설 '12월 12일'을 발표하고, 1931년 조선미술전람회에 「자화상」을 출품해 입선 했으며, 1932년 시 '건축무한육면각체' 를 발표했다. 이때 처음으로 필명 '이상'을 사용했다. 1933년 종로에 제비다방을 개업하고 1934년에 이르러 구인회 소속으로 활동했다. 제비다방은 1935년 폐업했다. 1936년에 결혼하나 결혼생활은 순탄치 않았고 10월에 도쿄로 떠났다. 1937년 사상 불온 혐의로 일제 경찰에 검거 감금 되었다가 건강악화로 풀려나지만 회복되지 못하고 1937년 4월 17일, 28세의 젊은 나이에 도쿄대 부속병원에서 천재 시인은 요절했다.
[그린경제= 조기태 기자] 쌍홍문은 조선 선조때 임천 조씨인 조원의 아들 희정과 희철 두 형제가 임진왜란 때 어머니를 구하려다가 목숨을 희생한 효행을 기리기 위하여 나라에서 내린 두 개의 정려를 말한다. 조희정과 희철은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어머니와어린 조카들을 데리고 강화도에 피신 하였는데 왜적이 들이닥쳐 그의 어머니를 능멸 하려하자 이를 맨손으로 제지하던 큰아들 희정이 왜적의 칼에 맞아 숨졌다. 곧 이어 작은아들 희철이 달려들어 왜적의 창과 칼을 꺾어 싸워 이긴 후 어머니를 산속으로 피신 시켜 초근목피로 봉양 하였으나 왜적과 결투하다 생긴 상처가 악화되고 굶주려서 숨을 거뒀다. 주변 사람들은 이 두 형제의 효행을 칭송하고 조정에 효자문을 세워 줄 것을 요청하니 조정에서는 조원의 본가 (지금의 효자동 100번지) 앞에 쌍홍문을 세웠고 이것이 효자 이름의 유래가 되었다. ** 조기태 : 세종마을가꾸기회 대표
[그린경제 =조기태 기자] 김가진(金嘉鎭1846-1922) 은 김상용의 12세 손으로 지금의 신교동 세종마을 푸르메 센터 근처에서 태어 났다. 호는 동농(東農)이다. 김가진의 집터 백운장 영역은 지금의 청운동 1번지 부터 10번지까지 10.000여평에 이르는 매우 넓은 터였다. 자하문터널 남쪽 입구 바로 위에 예수그리스도 후기성도 교회와 청운동 벽산빌리지 등이 있는 곳이다. 규장각참서관(奎章閣參書官)으로 관직 생활을 시작하여 1880년 사헌부감찰(司憲府監察), 1881년 장례원주부(掌禮院主簿)가 되었다. 그 뒤 인천항 통상사무아문주사(通商事務衙門主事)부수찬(副修撰)주차일본공사관참찬관(駐箚日本公使館參贊官)과 장령(掌令)사복시정(司僕寺正)동부승지 등을 역임하였다. ▲ 동농 김가진 선생의 글씨이며 이 바위 밑 자락에 선생의 집터가 있었다. 마흔한살이 되던 1886년 정시문과에 급제한후 개화 관료로서의 정체성을 분명히 했다. 천진 주재 종사관과 일본국 주재 판리대신 등으로 외교 일선에서 외국문물을 보고 배웠으며 1894년 갑오개혁때는 군국기무처의 의원으로서 각종 개혁안을 기초했다. 독립문의 한글과 한자 현판을 썼다. 공조판서,농상공부 대신, 중추원의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