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문화신문=최우성 기자] 임하동 경사진 지형의 계단식 논 가운데에 4기의 석탑이 있는데 오늘 소개하는 탑은 '임하동중앙삼층석탑'이다. 이곳에 절이 들어선 이래 여래 개의 석탑들이 세워졌을 뿐 아니라 석탑 주변에도 많은 건물들이 있었을 것으로 추정되지만 지금은 절의 이름조차 알 수가 없어, 석탑이 서있는 마을 이름을 앞에 붙이고 층수와 동서남북 위치를 구분하여 현재의 이름으로 부르고 있는 실정이다. <임하동중앙삼층석탑>은 임하동에 있는 4기의 석탑 중 위치상으로 가운데 있다는 것과, 탑의 층수가 3개층이라는 것을 나타내는 이름이다. 하지만, 현재의 모습이 3층일 뿐이고, 탑신과 옥개석(지붕돌)을 살펴보면, 이 탑은 3층보다는 더 많은 층수로 이루어졌을 것으로 보인다. 적어도 5층 또는 7층이었을 수도 있다. 왜냐하면 현재의 3층 지붕돌 위에 탑의 상부를 마무리하는 상륜부를 둘 수 없기 때문이다. 탑을 마무리 하기 위해 상륜부를 두는데 상륜부는 탑의 맨 윗쪽 옥개석 기와지붕과 같은 경사진 지붕돌의 가운데에 상륜을 세우기 위한 기초로 세우고, 그 위에 쇠로 기둥을 만들어 상륜부를 세운다. 따라서 상륜부는 아래서부터 순서대로 보면 노반 - 복발 - 앙
[우리문화신문=최우성 기자] 이 탑은 임하동에 흩어져 있는 4기의 석탑 가운데 현재상태로 보기에는 유일하게 5층으로 보이는 탑이다. 석탑의 기본형식은 불국사 석가탑과 같으나, 그 층수가 높아진 것으로 고려시대에 세워진 것으로 추정된다. 이 탑은 4기의 임하동 석탑 가운데 방향으로는 남쪽에 있지만, 주변의 지형은 남쪽이 높고 북쪽이 낮아 절이 있었다면, 배치 형상으로는 북향으로 건물들이 들어섰을 것으로 보인다. 이 탑은 임하동의 다른 3기의 석탑과는 달리 층수는 높으나, 탑의 주변에는 별다른 조각상이 보이지 않아 매우 단순한 탑이다. 이 탑의 높이는 현재 5.2m 이며, 5층 옥개석 위로는 탑의 상륜부가 있었을 것이나, 탑의 상륜부는 찾지 못하여 없는 상태다. 주변의 다른 탑들과 견줘 볼 때, 이 탑은 비교적 늦은 시기에 조성된 것으로 생각되는데, 그 까닭은 통일신라시대에 완성된 3층석탑들이 시대가 지나면서 조금씩 변해가며 고려시대에 이르러 5층, 7층, 9층으로 높아지는 과정에서 5층은 고려시대 초기의 탑 형식이기 때문이다. 탑의 형상을 분석해보면 탑의 기초인 기단은 2단으로 불국사 석가탑과 같으며, 기단 위에는 5개의 건물층수로 셀수 있는 탑신석은 목조건축
[우리문화신문=최우성 기자] 안동 임하면 임하동 폐사터의 또다른 석탑이다. 이 석탑 또한 신라 불국사석가탑과 같은 형식의 석탑인데, 신라말 고려초기에 세워진 것으로 추정되는 석탑으로 4기의 석탑 중에서는 서쪽의 논가운데 서있다. 석탑의 윗부분을 찾지 못하였으나, 삼층석탑이었을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하지만 지금은 2층지붕돌까지만 남아있는데, 석탑의 1층부분의 몸돌(탑신석)에서 부처님의 사리장치가 발견되어 현재는 국립중앙박물관에 소장되었다. 이 석탑의 기단 1층 에는 12지신상을 새기고, 기단 2층 벽면에는 팔부신중을 새겼었으나, 현재는 8개의 조각상 가운데 4곳만 남아있다. 이 탑은 규모는 작지만 12지신상과 8부신중이 새겨진 매우 희귀한 석탑으로 그 중요성을 인정받고 있다. 12지신상은 옛한국 중국을 중심으로 한 방위별 수호신이며, 해마다 순서대로 띠를 나타내는 동물들의 모습을 표현한 것이고, 8부신중은 불교의 방위별 수호신으로 인도의 신화에서 유래한 천상 천, 용, 야차, 건달바, 아수라, 가루라, 마후라가, 긴나라라는 상상의 신들로 부처님의 진신을 모신 탑을 수호한다는 의미에서 탑에 새겼던 것이다.
[우리문화신문=최우성 기자] 경북 안동 지역에는 지금도 유서깊은 많은 불교유적들이 있다. 그 가운데 한국의 목조건축물로 가장 오래된 봉정사의 극락전이 있는데 이는 1972년 보수 당시 발견된 상량문을 추정해 본 결과, 처음 건립연대는 1200년 이전으로 추정하고 있다. 현재 한국에서 가장 오래된 목조건축물이 있어 유명한 봉정사지만, 안동지역은 이 밖에도 수많은 불교유적이 즐비하다. 지금은 논으로 변해버린 임하면 임하동 마을의 논 가운데에는 마을 반경 500m 이내에 4기의 석탑이 여기 저기 흩어져 남아있어 매우 특이하다. 이곳은 현재 안동호 아랫쪽 임하호 서쪽에 자리하고 있고, 논 주변으로는 농가들이 흩어져 있으며 논 한 가운데 석탑들이 서있다. 석탑이 남아있다는 것은 이곳에 절 전각들이 있었다는 이야기다. 그것도 한두동이 아니라 여러 동의 불전과 스님들이 살았던 요사채들이 있었을 것으로 추정해본다면 임하동 일대는 대궐 건축물과 같은 대규모 가람이 빽빽하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안타깝게도 어느 시기에 절이 폐사되었는지 건축물은 다 사라져 버리고, 주춧돌과 기단 등 돌로 이루어진 것들만 땅속에 묻혀 남아있을 뿐이다. 더구나 부처님 사리를 모셨던 탑들은 허물어져
[우리문화신문=최우성 기자] 위 작품은 국보로 지정된 청동정병으로 절에서 매우 귀하게 사용했던 주전자다. 이 정병은 기본적인 형태는 목이 길고 몸통이 길쭉한 원통형의 병에 물이 나오는 주둥이를 붙이고, 물병의 뚜껑은 마개위를 길게 늘여 붙여 한층 멋스럽게 꾸민 것인데, 물병을 잡는 손잡이가 따로 없는 것이 특징이다. 기본형태는 평범한 물병인데 물이 나오는 주둥이와 물을 넣는 뚜껑을 이러한 모양으로 만들어서 붙이니 그 전체 형태가 매우 독특한 모양이 되었고, 그 겉모양에는 다양한 상징성을 띠는 그림을 새겨넣어서 더욱 아름답게 만든 것이다. 이 정병은 감로수 곧 아주 깨끗한 물로 부처님이나 보살에게 바치는 정화수를 담는 주전자인데, 관세음보살이 중생들의 병을 고쳐주는 약수를 보관하는 주전자이기도 하다. 고려시대에 제작된 다양한 수월관음보살도에는 절벽위에 앉아 있는 수월관음보살이 이러한 정병을 옆에 두고 대나무가 있는 해안가 절벽에 걸터 앉아 있는 그림이 그려져 있는 것을 보면 잘 알 수 있다. 정병의 몸통에는 물가의 풍경들이 다양하게 그려져 있는데, 이를 자세히 살펴보면 언덕 위로 길게 늘어진 버드나무가 있고, 물 위로는 노를 저어가는 어부와, 갈대숲이 있으며,
감은사 동탑 사리내함-지붕장식 3(왼쪽), 감은사 동탑 사리내함-지붕 상부장식 [우리문화신문=최우성 기자] 신라가 삼국을 통일한 뒤 조성한 경주 감은사에는 통일을 완수한 문무왕이 스스로 동해의 용이 되어 나라를 지키겠다는 염원에 따라 문무왕의 수중왕릉이 보이는 곳에 감은사를 조성하였다. 신문왕은 감은사를 지으면서 용이된 문무왕이 감은사의 금당까지 들어올 수 있는 구조로 절을 짓고, 금당 앞에는 삼층석탑 2기를 세웠다. 절의 석탑은 본래 인도에서 기원한 것인데, 인도에서는 전탑(벽돌을 구워서 만든 탑)이었으나 한국에서는 석탑으로 정착하였다. 인도의 전탑이 중국을 거쳐서 한국에 와서 한국만의 석탑으로 변하였고, 한국의 삼층석탑의 원형이 된 것이 바로 감은사 삼층석탑이다. 이탑이 있기 이전에 백제의 익산 미륵사 구층석탑이 있었다. 절의 석탑은 절의 중심건물인 금당 앞에 조성하는데, 탑속에 불교의 창시자인 석가모니의 사리를 모시기 위하여 조성하였다. 그 까닭은 불교의 창시자인 석가모니의 모습을 조성하여 금당에 모시고 예불을 하고, 그가 남긴 사리를 모신 석탑을 금당 앞에 세우고 그의 가르침을 따르면서 수행하기 위함이었다. 따라서 금당 앞에 세운 탑에는 석가모니 부처
[우리문화신문=최우성 기자] 이 탑은 강릉시 성산면 관음리에 있는 오층석탑으로, 그 높이는 약 3.3m 정도다. 이 석탑은 2층의 기단 위에 5개층의 탑신이 놓여져 있으며, 온전하지는 못하지만 비교적 탑신과 옥개석들이 남아있다. 탑의 상륜부(탑신 위 탑의 장식부분)는 부분적으로 손상되었지만, 이정도의 온전한 모습의 석탑은 보존상태가 좋은 편이다. 이 탑이 있는 곳은 관음리지만, 옛 기록에 따르면 근처에는 안국사라는 절이 있었다고 하니 본래는 안국사라는 절의 석탑이 아닌가 추정된다. 그렇지만 마을의 이름이 관음리 인것을 보면, 관음사가 아니었나 하는 생각도 든다. 이 탑은 주변에 흩어지고 땅속에 묻혀있던 것을 발굴하여 복원하였으며, 복원한 뒤 문화재위원회의 심의를 거쳐 1992년 강원도 유형문화재 제112호로 지정되었다. 이 탑을 찾아가기 위하여 네비게이션에 "관음리오층석탑"을 찍고 길안내를 받으며, 이리저리 구불구불 오르는 길은 강릉고속도로의 인터체인지 주변으로 매우 복잡하였다. 고속도로를 피하여 구불구불 돌고 돌아 찾아가니, 산마루가 바로 보이는 곳에 한적한 기와집 앞에 이르렀다. 이집 주차장은 개인집 주차장이었지만 그집 앞에 차를 세우고 올려보니, 100
[우리문화신문=최우성 기자] 계묘년 1월, 호남 충청지역에 많은 눈이 내렸다. 겨울이면 앙상한 가지를 드러낸 산천 풍경이 매우 쓸쓸하고 삭막하다. 특히 융성했던 시절 빽빽하게 들어섰던 건물들은 없어지고 너른 절터에 석탑만이 솟아있는 모습을 보면 더욱 그런 생각이 든다. 하지만 이 겨울에도 눈이 내려 절터를 덮으면, 비록 날씨는 춥지만 황량해 보이던 절터도 포근한 이불을 덮은 듯 따스하게 느껴진다. 충청지역 해안에서 멀지 않은 이곳 보령지역은 신라 선종의 하나로 구산선문의 성주산문을 개창했던 낭혜화상 무염(801~888)이 선불교를 펼쳤던 절터가 있다. 구산선문이란 통일신라시대에 번창했던 불교종파로, 중국의 당나라 시절에 선불교를 개창했던 육조 혜능대사의 제자들이 중심이 되어 중국에서 크게 융성했던 종파이다. 선종은 불교의 여러 종파 중에서 팔만대장경에 기록된 수많은 불교경전을 무시하지는 않지만, 부처님의 마음을 깨닫는데는 경전공부 보다도 오히려 참선을 통하여 깨달음을 얻으면 된다는 것으로, 이는 중국의 육조 혜능대사에서 새롭게 자리잡았다. 혜능대사는 본래 나뭇꾼 출신으로 공부를 하지 못했으나 어느 날 시장에 나뭇단을 팔러 갔다가 어떤 스님의 말 한마디에 깨달
[우리문화신문=최우성 기자] 내일이면 계묘년 새해가 떠오른다. 온 나라 곳곳의 찬란한 해돋이가 신비스럽고 아름답기만 하다. 낙산사 의상대 해돋이부터 제주 형제바위까디의 해돋이 사진을 올려본다.
[우리문화신문=최우성 기자] 청자 기법을 중국의 도자기에서 받아들여 이를 투각과 삼감기법등으로 발전시키고, 고려인들만의 미적감각을 표현하여 천하의 명품으로 세상을 놀라게 하였던 고려시대 상감청자들이다. 전시품들을 보면서 황홀함을 느꼈으며, 선조들이 이룩하였던 문화유산들이 얼마나 귀하고 자랑스러운 것인지 충분히 느낄 수 있었다. 또 고려시대와 더불어 발전하였지만, 후기에는 전성기와는 다른 변형되거나 쇠퇴해가는 모습도 볼 수 있었다. 어느 것 하나도 허투루 여길만한 것이 없이 고귀한 작품들을 이렇게 한데 모아 볼 수 있기는 쉽지 않을 것으로 생각되는 고쳐청자 모듬전시회였다. 청자전시회는 지금 국립중앙박물관 본관 3층에서 현재 전시중에 있다. 아울러 조선시대 명품이었던 백자전도 함께 본다면 한국의 청자와 백자에 대하여 제대로 볼 수 있는 전시일 것으로 생각된다. 많은 독자님들의 관람을 추천하며 시리즈를 마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