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문화신문=최우성 기자] 해질무렵 국보289호 익산왕궁리오층석탑에 섰다. 노을과 석탑이 절묘한 조화를 이룬다. 왕궁리란 지명은 바로 이곳에 옛마한시대 왕궁이 있던 곳이기에 붙여진 이름이다. 그러나 기자가 어릴 때만 해도 지명이 왕궁리 일뿐 이곳이 왕궁터가 있었을 것이라는 기대는 하지 못했다. 대신 왕궁리 낮은 언덕 위에는오층석탑만이 있었다. 그때만해도 석탑이 있던 절의 이름조차 알 수없는 상태였으나 지금도 절이름은 여전히 오리무중이다. 다만, 이 탑이 왕궁리라는 동네에 서있기에 왕궁리오층석탑으로 불리고 있는 것이다. 안타까운 일은 이렇게 아름답게 잘지어진 탑이 있건만 지금도 석탑이 있던절 이름조차 모르고 있다는 사실이다. 이 탑의 역사를 알기 위하여 탑을 완전 해체하여 땅속에 묻혀있던사리장엄구까지도 발굴조사했지만,절 이름이 새겨진 기와조각 하나 나오질 않아서, 지금도 왕궁리오층석탑이라는 이름을 쓰고 있는 것이다. 이 탑은 백제계의 조형성을 갖춘 고려시대 초기의 탑이라는 것이 지금까지 밝혀진 탑의 내력이다. 백제시대 석탑양식은 근처에 있는 익산 미륵사탑과 부여 정림사지석탑과비슷하기에 그렇게 보는 것이고, 돌을 마치 나무로 집을 짓듯이 기둥모양과 처
[우리문화신문=최우성 기자] 무덥던 여름이 한풀 꺾이고 서늘한 가을 바람이 불어 땅속에도 그 바람이 들면 어김없이 피어나는 꽃이 있다. 꽃무릇이다. 꽃무릇은 땅속에서 무더운 여름을 견디다 찬기운이 땅으로 스며들면 그 찬기운을 알아차리고두껍고 딱딱한흙을 뚫고푸른 꽃대를 솟아올리고 그 꽃대 끝에 열정으로 가득한빨간 꽃을 피운다. 이렇게 피어나는 꽃무릇은 꽃대는 올라오지만 다른 풀처럼 잎은 보이지 않는다. 특이하게도꽃을 피우기 위해서 솟아나는 줄기는 꽃만 피우고 시들어버린다. 그리고 그 꽃이 진 다음 뿌리에서다시 푸른 잎이 자라나 추운겨울동안 푸르게 있다가 봄에 다른 초목이 푸르게 싹을 티우면 꽃무릇의 푸른 잎마저시들어버린다. 그리고 아무런 자취도 남기지 않고 여름내 땅속에 잠들어 지낸다. 보통 초목과는 반대로 살아가는 꽃무릇의 정체가 이해하기 힘들지만, 그 독특한 생태는 삭막하게 변해가는 가을 한철을 꽃세상으로 바꾸어주고, 그 붉게 피어나는 열정적인 색과 독특한 꽃송이는 많은 사람들을 매혹시킨다. 그것도 몇송이가 아니라 온 절주변과 계곡을 뒤덮어 버리는 꽃무릇 세상은 남쪽 지방 고창 선운사와 영광 용천사, 영광 불갑사를 물들이는데, 앞
[우리문화신문=최우성 기자] 충남 아산시 염치읍 산양리에 작지만 아담하고 품격이 있는 사찰 세심사가 있다. 세심사는 중생들의 찌든 마음의 때를 싯어낸다는 의미가 있으니, 삶에 지친 현대인들이 한 번쯤은 방문해 보고 마음의 안정을 찾는데 도움이 될 수 있는 곳이라 생각된다. 세심사는 염치읍의 산에 자리 잡은 절인데 염치읍(鹽峙邑)이란 이름이 지금 보기에는 대부분 평지인 이곳에 무슨 고개가 있나 싶은 생각에 의아하게 생각되지만, 옛날에는 봇짐장수들이 서해안에서 생산된 젓갈이나소금을 이고 지고 넘나들던 소금고개인 것이다. 영인산 자락에 안겨있는 세심사는 전각으로는 대웅전, 영산전, 산신각, 종각 그리고 누각이 있고, 스님이 거하는 요사채가 있는 아담한 절인데, 아담한3칸짜리영산전에는 석가모니부처님이 영축산에서 법화경을 설법하는 장면을 재현한 탱화가 있고, 소조상으로 석가삼존불과 깨달음을 얻었다는 16아라한이 조성되어 있다. 영산전이란 영축산에서 법화경을 설법했다는 것에서 따온 전각의 이름이고, 법화경을 설법하는 과정에서 많은 제자들이 깨달음을 얻었다는 것을 의미하기도 한다. 법화경은 많은 제자들에게 깨달음을 얻어 부처가 되리라는 수기를 주
[우리문화신문=최우성 기자] 무덥던 여름이 지나가고 어느덧 서늘한 기운이 감도는 가을의 문턱에 이르렀다. 더위가 기승을 부릴 때에는 숨이 막히고 기운도 빠져 하루하루가 지겹게 느껴지고, 제발 빨리 여름이 지나가기만을 고대하였다. 그러나, 갑자기 바뀐 날씨에 아침 저녁 서늘한 기운이 돌고보니, 이제는 살만하다는 느낌과 더불어 앞으로 다가올 추위가 문득 걱정이 된다. 이렇게 바뀌는 겨절의 변화를 실감하면서, 오백나한전의 전설이 있는 무등산 증심사를 찾았다. 증심사 대웅전 앞마당과 뒷뜰에는 이제 마지막 열정을 불태우는 배롱나무꽃이 화사하게 피어 있었다. 배롱나무꽃에는 그동안 백일 가까운 여름내 화사하게 경내를 장식하였고, 이제가을을 재촉하는 빗방울이 맺혀있어 함초롬하기도 하였다. 증심사는 광주 무등산 남쪽자락에 있는 아담한 절인데, 본래 개창은 통일신라 후기 헌안왕 때인 860년 철감선사가 창건했다고 한다. 이후 1094년 고려 선종때 혜조국사가 중수하였다고 하나. 이후 차츰 쇠락하게 되었다. 조선으로 왕조가 바뀌고세종시절 전라관찰사 김방이 인근에 저수지를 만들어 농사에 필요한물을 공급하여 계속된 가뭄을 극복하고자 2년 여에 걸쳐 저수지
[우리문화신문=최우성 기자 ] 특별한 더위로 곤역을 치른 올 여름이었다. 그래도 세월은 어김없이 흐르고 흘러서 이제 더위는 한풀 꺾이고, 아침 저녁서늘한 바람이 불어오고 소나기가 몇 차례 내리더니 하늘에는 새털구름이 몰려 다니고 공기도 상쾌하고 하늘은 청명해졌다. 바야흐로 가을이 성큼 다가온 것이다. 화순 만연사는 800년의 역사를 품은 절로 절 경내에 심어진 배롱나무 거목에 여름내 경내를 아름답게 장식하여 많은 사람들이 찾는 곳이다. 작지만 붉은꽃이 오랫동안 피는배롱나무는 나무 줄기가 미끄럽다하여 원숭이도 미끄러지는 나무라고도 하며, 그 붉은꽃이 100일동안 핀다고 하여 목백일홍이라고도 한다. 하지만 한 번 핀 붉은 꽃이 백일을 가는 것이 아니라 연달아서 피고 지고 피고 지고 포도송이처럼 한송이의 꽃이 아래 꽃송이 아래 부터 위까지 피는데 한송이가 며칠씩 피어있으니 전체적으로는 백일동안 붉은 꽃들이 계속해서 피어있음으로 백일동안 화사한 꽃으로 장식하는 것이다. 한국절 대웅전 앞에는 이 목백일홍인 배롱나무가 많이 심어져 있는데, 그 중에서도 이곳 화순의 만연사의 백일홍이 꽤 유명하다. 만연사의 배롱나무에는 특별히 백일홍이 피어나
[우리문화신문=최우성 기자] 과학과 의학이 무척 발달하여 인간의 수명이 많이 길어졌지만,지금도 사람은 100년을 살기어려운 세상이다. 그런데상상조차하기 어려운시간을 거슬러 올라가면 적어도 6,500만년 이전에는공룡들의 세상이 있었다. 지구의 나이가 45억년 정도 되었다고 하지만, 지구에 생명이 나타나기 시작한 것은 지구가 태어난 후 40억년의 세월이 흐른 뒤었다. 그리고 그렇게 나타난 생명체가아주 작은 생명체로부터 서서히진화를 거듭하고 변화를 거듭하여 처음물속에서만 살던 생명들이육지로 나오고 미생물이 식물로 진화하고식물에서 동물로 진화하면서 다양한 생명체들이 나타나 수억년의고생대를 거치고 다시 수억년 후중생대에 이르러 공룡이 나타났다. 중생대는 지금으로부터 2억 3천만년전부터 6천 5백만년 전까지의 시기를 말하는데, 2억3천년 전부터1억 8천만년전 의 시기를 중생대의 처음시기인 트라이아스기라고 부른다.그 때 지구는 거대한 판게아가 분열하여 아프리카와 북미대륙이 나뉘어지기 시작하였고 기후는 초기에 따듯하다가 후기로 가면서 더워지고 건조한 기후로 변하였다. 이 시기에 지상의나무는 은행나무, 침엽수, 소철류 등이 나타나고초본류로는 포자식
[우리문화신문=최우성 기자] 임진년(1592년) 4월 14일 부산포에 침입한 왜적은 상주 충주를 거쳐 한양에 이른게 불과 18일 만이었다. 5월 2일 한양을 점령한 뒤 6월 13일에는 평양'까지 접수하고 전 조선국토는 살인과 방화로 초토화 되어 갔다. 그러나 이들의 전쟁물자는 왜군이 점령한 육로로는 너무 힘들어 해상으로 길을 내야 했다. 그리하여 해상으로 길을 내기 위하여 경상우수사인 원균을 공격하자, 원균은 전라좌수사였던 이순신에게 구원요청을 하였다. 이때는 4월 29일 이었다. 이순신 장군은 원균의 구원요청을 즉시 받아들여 5월 4일 축시에 판옥선 24척과 협선 15척 포작선 46척을 거느리고 경상해안으로 출전하였다. 깜깜한 새벽에 출전하였으나 소비포 앞바다에 이르자 날이 저물었고, 5월 5일 당포 앞바다에 머물다 5월 6일에야 원균으로부터 왜적의 정세를 자세히 듣고 남해현령을 비롯한 경상도 전선 6척을 증편하고 거제 남단 송미포에서 밤을 지세웠다. 7일 아침 송미포를 출발하여 왜적이 머무르는 천성과 가덕도를 향하여 오시(午時=111~12시)에 옥포앞바다에 이르고 적의 동태를 살폈다. 이순신 장군은 적의 진영을 살피며
[우리문화신문=최우성 기자] 1950년 한국전쟁이 발발하자 남한 정부는 부산으로 임시수도를 정하고 행정조직을 이전하여 임시업무를 보았다. 그 임시수도정부청사를 보았던 곳이 이제는 동아대학교가 되었고, 그 임시수도정부청사로 쓰이던 건물은 동아대학교 박물관이 되었다. 이제는 겉모습만이 옛날 모습이고, 내부는 개조되어 대학교 행정업무를 보는 건물이 되었고, 2층은 동아대학교 박물관이 되어 고대 신석기시대부터 출도된 부산을 포함한 남해안 한민족의 출초유물들이 전시되어 있었다. 신석기시대부터 발굴과정에 출토된 유물 위주의 전시품들을 돌아보면서 많은 아쉬움도 있었다. 한민족의 기원이 적어도 5,000년은 된다고 하면서도, 그 5,000년 이전에는 어떤 나라가 있었는지 알수도 없고, 최초의 고대국가인 고조선에 대하여는 별 설명도 없었다. 또 한민족의 활동영역은 본래 만주가 그 주 무대였는데, 신석기 청동기의 유물을 표기하면서도 정작 그 본류지역인 만주지역은 아예 지도에서 표현조차 하지 않고 있었다. 이는 스스로 만주와는 아무런 관계가 없는 것으로 보고 있다는 역사학자들의 견해를 갖고 있음을 은연중 나타내고 있는 것이라 하니 할 수
[우리문화신문=최우성 기자] 이 비석은 부산 동래읍성 앞에 세워진 송상현을 비롯한 임진왜란에 전사한순국자들의 비다. 1592년 임진왜란이 발발하자 싸우지도 않고 도망친 관군들이 부지기수였다. 그러나 동래부사 송상현을 비롯한 부산지역의 부사 첨사등은일본군과 첫 교전에서 싸우면 반드시 죽을 줄 알면서도 도망치지 않고 싸우다 죽었다. 이들은 동래부사 송상현과 양산군수 조영규, 동래향교 교수 노개방, 유생 문덕겸 등이다. 이 제단은 임진왜란이 끝난 후 곧 세운 것이 아니라, 죽은지 150년이 지난 후 임진왜란으로 불귀의 객이 되어버린 사람들을후세들이 잊지 말게 하고자영조 18년 당시 동래부사 김석일이 세웠다. 이 단이 세워지기 전에는 동래읍성 남문밖 농주산에 송상현을 비롯한 임진왜란 당시 순절한 분들을 모셔져 있었으나 김석일이 이곳에 송공단이 세워 이곳으로 옮겼다고 한다. 송공단에는 여러분의 비석이 서있는데, 가운데 가장 큰 비석이 동래부사 송상현의 비석이고 좌우로는 당시 함께 순절한 관리들의 비석이 있으며, 그 앞쪽에비석들과는 별도로 한쪽 구석에 담장을 달리하고 신분이 낮은 사람들이 함께 모셔져 있다. 송공단에는 해마다 음력 4월 15일 관에서 제사
[우리문화신문=최우성 기자] 민족의 최대 전란인 임진왜란의 처음이자 최대 격전장에서 장렬히 전사한 부산 동래 다대포 양산지역의 송상현 동래부사, 부산포 첨사 정발장군 다대포 첨사 윤흥신 등을 비롯하여 죽음을 마다하지 않고 장렬히 싸우다승화한 많은 군관들과 민간인들의 영령을 추모하기 위하여 모신 동래 충렬사를 찾았다. 태평세월을 보내고 있던 조선에 불어닥친 일본의 침략은 태평세월을 보낸 만큼이나 더욱 혹독하게 밀려왔다. 한민족 전란의 역사를 모두 뒤져 보아도, 이보다 더한 치욕과 상처는 없었을 것이며, 그 전란을 극복하고 살아남은 것은 기적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러나 그 임진왜란이 끝난 뒤 거의 300년 즈음에 조선은 다시금 일본의 침략으로 식민지로 전락하고 말았으니... 슬픈 역사의 반복을 개탄해 마지 않을 수가 없다. 동래 충렬사는 임진왜란이 끝난 후, 현재의 왼쪽 기슭에 작은 사당형태로 있어왔으나, 이를 1978년 현재와 같은 모습으로 확장하고 더욱 크게 성역화 하였다. 그 당시 대통령 이었던 박정희의 뜻이 반영되었으며, 선열들의 숭고한 뜻과 희생을 받들어이를 국란극복과 국론통일의 장으로 삼고자 했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