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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보] 가평군 유서깊은 적멸보궁 현등사의 가을



















[우리문화신문=최우성 기자] 경기도 가평의 운악산에는 깊은 골짜기에 유서 깊은 고찰 현등사가 있다. 현등사는 천오백년된 절로  그 창건 연대는 신라의 불교 공인 때로 거슬러 올라간다고 한다.


신라가 불교를 공인한 연대는 서기 528년 으로 법흥왕은 불교를 받아들이고 싶었지만, 대신들의 반대로 불교를 공인하지 못하고 있었다. 고구려, 백제가 150여년 전 불교를 받아들여 발전을 하고 있었지만, 신라는 토착 귀족들의 반대로 불교를 받아들이지 못하고 있었다. 그 때 신라 하급관리였던 이차돈은 주변국으로부터 불교를 알게된 후 불교신자가 되어있었다. 이차돈은 신라가 발전하기 위하여는 보다 더 크고 넓은 세계와 접해야하고 국가의 부흥과 백성들의 교화를 위하여 좋은 종교인 불교를 신라가 받아들여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리하여 이차돈은 불교를 공인받는데 도움이 된다면 기꺼이  자신의 몸을 바치기로 마음 먹고 왕에게 건의하였다. 자신은 죽어도 좋으니 자신이 죽을 때 분명 이적이 일어날 것이니, 그 이적을 본 뒤 불교를 받아들이도록 하라는 것이었다. 그의 말처럼 왕은 많은 대신들 없에서 이차돈의 목을 쳤다. 그런데 그의 목을 치고 나서 이차돈이 예언한 대로 기이하게도 이차돈의 목에서 흰 피가 솟구치자 대신들은 기이한 현상에 놀라 자빠지고,  그기 믿었던 종교인 불교를 더이상 거역할 수 없어 신라도 불교를 받아들이게 되었다고 한다.


그런 뒤 얼마 안되어 신라에는 인도의 스님인 '마라하미'가 인도에서 부처님의 '진신사리'와 '대장경'을 모시고 왔고, 그가 모셔온 불사리와 대장경을 모시기 위하여 이곳에 절을 지었다고 전한다. 이것이 운악산 절의 첫번째 창건이나 그당시 절이름은 알수 없다.  이후 기록은 신라말 898년 효공왕 2년 도선국사가 전국의 비보사찰을 찾던 중 이곳에 이르러 중창하고 '운악사'라 이름하였다. 이것이 두번째 이곳에 절이 들어선 중창이다.


이후 고려 희종2년(1210년) 고려시대 해동의 선종을 번창게 했던 보조국사 지눌이 어느 날 잠을 자다가 등불이 보이는 꿈을 꾸고 기이하게 생각하던 중 이곳 운악산을 지나게 되었는데 옥등(玉燈)이 영롱하게 밝혀져 있음을 보고  이곳이 좋은 터임을 알고 다시 절을 중창하니 이것이 현등사의 삼창이다.  그런데 지눌은 기존에 있던 절의 이름인 운악사에서 이름은 산에 주고 절이름은 현등사로 바꾸었다.


이후 초선초 1411년 '함허득통화상'이 금강산으로 가던 중 이곳 운악산에서 길을 잃고 헤메다가 흰사슴을 만나 사숨을 따라 현등사로 인도되어 이곳에 주석하게 되었다. '함허득통화상'은 이곳에서 자신보다 200년 전 이곳에 자취를 남긴 보조국사 지눌의 숨결을 느끼며 '현정론'과 '금강경오가해'등 불교 경전해설서를 저술하였다. 이후 함허의 상좌였던 혜각존자 '신미'가 1447년 세종대왕의 명으로 한글로 석보상절을 지었으며, 이후 1461년 세조 때에는 간경도감을 설치하고 불교경전  '능엄경' '묘법연화경' '원각경' '목우자수심결' 등을 한글로 펴냈다. 


일설에  따르면 신미대사는 한글창제에도 깊이 관여했다는 이야기가 있다.  한글 창제당시 신미대사는 속리산 복천암에 거하고 있었는데 어려서부터 유교경전에도 달통하였을 뿐 아리라 과거에 합격하여 집현전 학사로도 있었다. 그러나 벼슬에 뜻을 두지 않고 우연히 알게된 불교경전에 심취하여 출가하였으며, 불교와 관계된 많은 언어들인 티벳어 몽골어 인도어 등에도 통달했었다고 한다. 그런 신미대사에게 세종은 많은 조언을 들었고, 그런 결과 한글이 창제되었다는 이야기다.


이후 조선 후기에는 '화담당 경화'스님이 주석하면서 불교 경전계율론장(불경주석) 삼장을 통달하고 불교의 탄압으로 그 맥이 끊기려는 불교의 학맥을 이었다고 한다.  현등사는 경기도 내 유서 깊은 기도절로 경내에는 '보광전' '극락전' '만월보'전 '지장전'' 영산전' '삼성각'과 맨 위에는 부처님의 진신사리를 모신 '적멸보궁'이 있다.


해발 935m 험하고 높은 산 운악산에 깊은 골짜기에 깃들어있는 1,500년 고찰의 향기가 가을 단풍에 더욱 고즈넉한 하루였다. 되돌아보면 많은 우여곡절속에 인연과 염원으로 이루어진 오늘의 현등사다. 창건과 퇴락과 또 중건으로 흥성하다 다시 전쟁으로 폐사를 겪는 등 몇 차례 부침의 역사. 마치 운악산의 깊은 골짜기 처럼 굴곡이 선명한 현등사다. 가을이 깊어가는 오늘 고즈넉한 아름다움은 역사의 상처위에 피어난 한송이 연꽃과도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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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우성 기자

최우성 (건축사.문화재수리기술자. 한겨레건축사사무소 대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