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서울 은평구에 있는 역촌시장 ▲ 시장건물에 교회와 함께 있는 선원 ▲ 천도재, 크리스마스 축하에 모인 열린선원 신도들 ▲ 바라춤을 추는 스님 ▲ 바라춤을 추는 스님 ▲ 부처님께 드리는 인사 ▲ 크리스마스 케익을 앞에 둔 스님들과 목사님 ▲신도들 앞에서 설교하는 목사님 ▲ 윤회금지 액자가 눈을 사로잡는다 ▲조상님께 술을 올리는 의식 ▲ 조상신위를 반야용선에 태워 부처님께 고하는 의식 ▲ 천도재를 마치고 조상의 극락왕생을 기원하는 모습 ▲ 조상의 극락왕생을 빌며 조상의 영혼을 모셨던 종이를 태워서 다시 보내드린다. [우리문화신문=최우성 기자] 서울 은평구 역촌동에는 시장 건물 2층에 열린선원이라는 조그마한 절이 있다. 보통 절은 고요한 산사를 생각하지만, 열린선원은 가장 북적이는 시장 가운데 그것도 시장건물의 2층에 있으니 늘 시끄럽고 북적인다. 더구나 건물 안에는 교회도 같이 있으니 절과 교회가 공존하는 곳이다. 이곳에 열린선원을 개창하여 중생제도를 하는 스님은 한국불교 태고종 법현스님이다. 이 절에서 다가오는 12월 25일 이웃종교의 가장 큰 명절인 크리스마스를 미리 축하하는 행사와 함께 열린선원에 모인 신도들의 조상을 천도하는 법회가 동시에 열렸다. 크
유릉(순종: 대한제국의 2째 황제)에 도열한 석상들과 황제의 침전. 침전 너머에 유릉이 있다. 황제릉의 침전 앞에 도열한 석상들, 문인석 무인석, 기린, 코끼리, 사자, 해태, 낙타 말(2필) 황제릉을 지키는 동물들과 문무인석이 서열대로 서있다. 아래로부터 말(2필), 낙타, 해태, 사자, 키키리, 기린 그리고 무인석 문인석 사람이 타고다니는 말은 맨 아래에 있다. 사막의 배로 불리우는 낙타는 동물 중 5위 서열에 서있다 뿔달린 한국인의 상서로운 해태가 동물 중 서열4위에 있다. 황제릉의 호위하는 수호동물의 3위 서열은 '사자'이다. 현존하는 가장 큰 육상동물인 코끼리. 동물 중에서는 2번째 서열 상서로운 동물 중 가장 높은 서열에는기린이 있다.기린의 머리에는 뿔이 하나있고, 피부는 비늘이 덮고있다. 황제의 침전을 호위하는 문관과 무관 갑옷과 투구를 쓴 무관 금관조복을 입은 비서실장 문관 [우리문화신문=최 우 성 기자] 조선왕조는 26대까지 중국의 제후국을 자처하여, 중국에 대한 예를 다하였다. 그러다가 27대 고종이 등극하고 일본과 청나라의 각축 속에 세계 다른 열강들이 모두 자가나라가 황제국이라고 칭하게 되자
▲ 계곡 너머에서 본 장항리사터 석탑, 옛날의 영화는 사라지고, 일제 강점기땅속에 묻혀있던 석탑을 발굴하여 맞추어 놓았으나, 상륜부는 찾지 못하여 저렇게 남아있다. ▲ 장항리사터로 오르는 계단 ▲ 동탑과 서탑, 서탑은 공사중 ▲ 기단과 탑신 상륜부는 사라지고, 탑의 지붕돌과 탑신하나만이 남았다. ▲ 탑신석에 조각된 인왕상 가운데는 극락세계로 들어가는 문이 있다. ▲ 부처님을 모셨던 법당 안에 있던 연화대좌 ▲ 연화대좌 아래에는 8각면이 있고 그 면에는 신장과 신수가 있다. ▲ 연화대좌 위 연꽃 잎이 엎드리고 위로 활짝 핀 모습 [우리문화신문=최우성 기자] 경주 양북면 바닷가에는 대왕암이 있고, 대왕암에서 멀지 않은 곳에 대왕암의 문무왕의 혼이 신라를 지키는 용이 되어 드나든다고 믿었던 감은사가 있다. 그곳에서 멀지 않은 양북면에 기림사와 장항리사터가 있다. 장항리사터는 본래 이곳에 장항사라는 절이 있었기 때문에 마을이 장항리가 되었는지 확실치 않으나, 석탑만이 남아있던 이곳이 행정구역상장항리에 속해있기 때문에 이곳의 절터 이름이장항리사터라 불리게 된 것이다. 산비탈과 계곡사이에 상당히 급한 산등성이에 자리한 장항리사터에는 그나마
[우리문화신문= 최우성 기자] 감은사는 국보112호인 감은사탑이 있는 곳으로 경주 양북면 에 있었던 절이다. 언뜻 보기에는 그리 높아보이지 않지만 높이가 13.4m에 이르는 거대한 탑이다. 일반 건축물로 치면 5층 높이에 이르니 결코 작은 탑이 아니다. 감은사터 석탑은 본래 목탑을 세우던 양식에서 화재에 약한 목탑보다는 영구적으로 보존할 수 있는 석재로 목탑을 재현한 것이기에 이리도 큰 것이다. 목탑이 전신이었던감은사탑 이전 것으로는 익산 미륵사터 석탑이 무너진채부분적으로 남아있다.황룡사 9층탑이나 익산 미륵사 9층탑은 원래목탑이었다.그 밖에도 삼국시대의 큰 절에는 5층목탑을 많이 건립한 거승로 전해진다. 감은사터 3층석탑은 목탑이 석탑으로 변화하는 과정을 잘 보여주는 탑으로, 이 감은사터 석탑을 거쳐서 경주 불국사 3층석탑(석가탑)이 한국석탑의 완성을 이루었고, 이후로는 불국사 석가탑은 본으로 하여 많은 석탑들이 들어섰다. 겨울의 문턱에 들었으나, 감은사터 주변에는 아직도 푸른 잔디가 한창이었다. 언덕 위에 자리한 감은사터에는 금당 앞뜰에 본 석탑이 동쪽과 서쪽에 자리하고 있는데, 금당이 있던 자리는 주춧돌만 남아있고, 석탑은 보수공
▲ 시청앞 광장에 모인 시민들. 이 힘든 일을 왜 해야만 하는지... ▲ 시청앞 광장을 메운 시민들. 시민들이 하는 말을 막으려고 하지말라고 외치고 있다. ▲ 국민들의 눈에 비친 정부!. 텅빈 백지와 파란딱지가 가득한 청지 ▲ 가면을 쓴 농민들. 쌀포대로 옷을 대신하고 있다. ▲ 하회탈로 가면을 대신하는 참가자들. 농사짓는다고 무시하지 말라고 외친다. ▲ 보고대회의 한장면, 잠시 흥겹고 뜻을 담은 노래도 함께하며. ▲ 국민은 말하고 싶다. 가면인가 복면인가 아니면 변신인가?? ▲ 시청앞에서 출발한 시민들이 서울대병원으로 향하고 있다. 어린 딸을 목마태운 젊은 아빠도 함께하고. 젊은이 어르신 남자 여자 온국민의 대변인을 자처하고 있다. ▲ 시위는 당연히 폭력적이라는 말은 맞는 말이 아닌 것 같다. 전혀 흩어짐없고 누가 특별히 말하지 않아도 질서정연 하였다. ▲ 국민은 하고싶은 말 해야하고, 정부는 그 소리에 귀를 기울여야 한다고 외치며. ▲ 질서정연한 행진 어쩌면 축제같은 분위기. 군데 군데 북과 징과 장고가 흥을 돋우었다. ▲ 가면을 썼으나 전혀 폭력과는 거리가 먼 행진.. 가면무도회로 가는 듯한 평화로운 분위기..
[우리문화신문 = 최우성 기자] ▲ 푸른 동해바다에 흰 포말을 그리며 어선 한 척이 지나고 있다 ▲ 의상대에서 홍련암에 이르는 오솔길에서 바라다 본 푸른 동해바다 ▲ 낙랑장송 사이로 본 홍련암이 비탈에 위태하게 자리하고 있다 겨울 동해는 푸르다. 시리도록 푸르다. 낙산사 홍련암으로 걸어가다 보면 오른쪽으로 시원하게 뚫린 동해 바다가 한눈에 들어온다. 어떤 이는 홍련암으로 이르는 이 길이 좋아 홍련암에 간다는 사람도 있지만 푸르른 동해에 면해 있는 홍련암은 그 자체가 한 폭의 그림이다. 어쩌면 바위 절벽에 대롱대롱 매달린 느낌도 받지만 또 그것은 우리의 위태위태한 우리의 인생사 만큼이나 닮아 있다. 그러면서도 여여하게 늘 그 자리에 서있는 낙산사 홍련암은 언제나 푸른 동해바다를 품고 고단한 중생의 안식처로 자리하고 있다. 그대들 마음이 심란하면 동해바다를 품은 낙산으로 떠나 봄은 어떨는지...
▲ 기림사 일주문 위에 아름다운 구름이 떠 있다 ▲ 일주문의 긴 그림자가 인상적이다. [우리문화신문=최우성 기자] 가을이 깊어가는 11월 마지막 토요일. 경주 양북면에 위치한 함월산 기림사에 갔다. 앙상한 겨울 나무들이 다소 쓸쓸해 보였지만 푸른 하늘에 뜬 구름은 무척이나 한가롭고 아름다웠다. 기림사란 부처님 생존 때에 세워졌던 인도의 기원정사(祈園精舍)를 뜻하는데 643년 (선덕여왕 12) 인도에서 온 광유스님이 창건했으며 신라 통일 무렵 원효스님이 중창한 절로 수 많은 암자를 거느린 큰절이었다. 불국사도 당시에는 기림사 말사였을 정도로 번성했지만 지금 기림사는 대한불교조계종 제11교구 본사인 불국사(佛國寺)의 말사로 입장이 바뀌었다. 신라 신문왕은 대왕암(大王巖)에 다녀오던 길에 이 절의 서쪽 계곡에서 점심을 들었으며, 고려 말의 각유(覺猷)는 이 절의 주지로 있었다. 그 뒤 1578년(선조 11)에 축선(竺禪)이 중건하였고, 정조 때에는 경주부윤 김광묵(金光默)이 사재를 희사하여 크게 중수하였다. 1862년(철종 13)에는 대화재로 113칸의 당우가 재가 되었으나, 이듬해 봄에 사찰의 승려들이 부윤 송우화(宋迂和) 등의 시주를 받아 공사를 시작하여 가을
▲ 미륵사지 안내도 ▲ 석탑앞에서 기도하는 스님.. 저 앞에는 투박하고 정감 넘치는 미륵불이 있다. ▲ 미륵불상과 5층석탑 ▲ 고려시대 석등의 모습이 무척이나 투박스럽고 정답다. ▲ 미륵불 주변에 석축과 감실로 가득하였던 미륵사 ▲ 주불이었던 미륵불상 ▲ 비석이 있었던 자리는 좌대만으로 남고, 대형 거북돌이 있는 미륵사지 ▲ 미륵사지의 석재들 ▲ 미륵사지의 빈 자리.. 저 곳에 많은 전각들이 빼곡하였을 것이다. ▲ 하늘재 오르는 길에 3층석탑 [우리문화신문=최우성 기자] 한반도의 남북을 흘러내리는 백두대간의 중간지점에 이르면 월악산에 하늘재가 있다.하늘재는 충청북도 제천과 단양 충주와 경상북도 문경의 관음리를 이어주는 고갯길이다. 이 고갯길은 신라의 아달라왕이 북진을 위하여 개척한 길로 알려져 있다. 이후 신라는 한강유역으로 진출하기도 하였지만, 신라말 나라를 고려 태조왕건에게 넘겨준 경순왕의 태자인마의 태자와 그의 동생이었던 덕주공주가 쓸쓸히 이길을 돌아서금강산까지 갔다고 전하기도 한다. 전하는 이야기에 따르면 마의태자는 미륵사의 미륵불이 되고 덕주공주는 이곳 근처에 덕주사의 불상이 되었다고도 전한다. 이후 경
▲ 가을빛에 물든 보각국사 승탑과 그의 행적을 기록한 탑비 전경 ▲ 보각국사의 석등 승탑 탑비 ▲ 나무등 사이로 본모각국사 승탑과 석등 ▲ 보각국사 승탑과 특이한 석등 ▲ 보각국사 승탑(탑명을 정혜원륭탑이라 부름) ▲ 보각국사탑비 [우리문화신문= 최우성 기자] 충주시 소태면 오량에 가면 산비탈에 범상치 않은 스님의 탑과 부도와 석등이 자리하고 있다. 그 주인은 고려말 고승이었던 보각국사다. 보각국사는 1320년 원나라 시기에 충숙왕시절에 예천 용궁면에서태어났다. 어머니의 권유로 13세에 대선사 계송의 문하에 들어가 1341년 충목왕때 승과에 급제하였다. 이후 1348년 금강산에 들어가 수행과 공부를 계속하였고, 선원사 식영감 화상에게 능엄경을 계승하였다. 이후 명성을 날리던 스님은 공민왕에 의해 궁궐에서의 설법을요청받아설법하고 공부선장에 단독으로 선발되었으나 궁궐에 머무르는 것으로 알고 도망쳐나와 봉황산에 머물렀다. 1374년 궁궐의 내불당에서 설법하였고, 이후 송광사 서운사를 거쳐 다시 충주 연회암으로 돌아왔다. 1383년 우왕에 의해 국사로 책봉되어 개천사에 머물다 왜구들의 침략으로 충주가 기습당하자 광암사에 머물렸다. 1392년
▲ 충렬사 안내판 ▲ 충렬사 출입문 ▲ 충렬사 사당 정문 ▲ 비문 ▲ 충렬사 전시장 ▲ 전시장에 있는 임경업 장군의 칼 ▲ 추련도 명문 ▲ 장군의 행장 ▲ 장군의 비각 정조의 친필로 쓰여진 비(어제달천충렬사비) ▲ 충렬사 강당, 충렬사에서 행사할 때 사람들이 모이는 곳 ▲ 충민공 임경업장군사당 ▲ 임경업 장군의 초상 [우리문화신문= 최우성 기자] 조선조 중기를 넘어 임진왜란이 끝난 뒤 얼마되지 않아 또 다시 병자호란이 일어났다. 조선은 임진왜란을 겪으면서 국토가 피폐해지고 인구도 급감하였다. 하지만 성리학만을 유일한 학문으로 숭상하던 조선은 왕조를 바꾸는 일만은 하지 못하고 선조가 계속 집권한 조선이 계속되었다. 국토는 피폐하고 민심은 돌아섰으면 왕조를 바꾸는 일을 하는 것이 세계사적으로는 당연한 일이었지만, 조선은 감히그런일을 하지 못하였다. 반면 조선을 침략했던 일본은 수많은 조선의 문화재와 기술자들을 잡아가서 이를 바탕으로 자기들만의 세계적인 도자기산업을 이룩하여 세계에 팔게 되었고, 전쟁에 패한 책임을 물어 풍신수길의 막부정권이 도쿠카와 이에아스의정권으로 바뀌었고, 명나라 임진왜란에 참가한 국력의 소모와 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