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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남해 관음포 이순신공원 종합계획 조감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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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충무공 이순신장군의 마지막 유언, 전장이 급하니 나의 죽음을 적에게 말하지 말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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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유허비각에 이르는 소나무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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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대문 앞에서 본 유허비각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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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충무공 유허비각 현판. 大星殞海 (큰별이 떨어진 바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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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충무공 유허비각 내부 천장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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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충무공 유허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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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첨망대로 가는 소나무 숲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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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관음포 해전이 벌어진 바다에 작은 섬이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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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광복후에 세운 첨망대. 관음포 앞바다가 잘 보이는 곳에 해전의 현장을 볼 수 있도록 세운 정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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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698년(음) 11월 19일 마지막 전투가 벌어진 관음포 해전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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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공원 해변에서 본 관음포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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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순신공원 안 거북선을 본따 만든 가로등 |
[우리문화신문=최우성 기자] 남해도와 여수반도가 이루어 생긴 광양만 관음포 인근 남해도에는 정유재란 마지막 혈투가 벌어졌던 곳에 충무공공원이 있다. 이순신공원 옆에는 마지막 전투가 벌어졌던 관음포 바다가 잘 보이는 곳에 첨망대가 지어졌고, 충무공의 공적을 기리는 비석과 비석을 보호하기 위하여 비각도 지어졌다.
비록 다시 볼 수 없는 이충무공이지만 훌륭한 장군을 잊지 않기 위하여 또 후세에 그런 공적을 길이 전하기 위하여 남해군에서 대대적으로 공원화사업을 진행하고 있는 것이다. 지금은 공사가 진행중이지만 얼마 뒤면 보다 잘 단장된 모습으로 충무공공원이 모습을 드러 낼 것 같다.
이순신장군은 순국할 당시에는 지금처럼 크게 전공을 인정하지 않았다. 그가 살아있었더라면 막강한 해군력을 이끌고 한양으로 들어올 화근이 될 지 모른다는 생각에 당시 왕이었던 선조와 대신들은 걱정이 태산이었다. 자신들의 실정에 피폐한 국토와 이루 셀 수도 없이 죽어간 백성들 그리고 구천을 떠도는 원혼들로 이반된 민심이 모두가 충무공 이순신 장군에게만 쏠려있었기 때문에, 만약 이순신이 살았더라면 그는 공적을 크게 인정해서 영웅으로 섬길 장군이 아니라 오히려 크나큰 공적을 등에 업고 군왕과 대신들에게 책임을 물을지도 모른다는 근심과 걱정거리였기 때문이다.
그런 연유로 그 큰 공을 세우고서도 이순신장군은 충무공이라는 시호도 한참 세월이 흐른 뒤에서야 받을 수 있었다. 이순신장군이 충무공으로 시호를 받은 것은 선조와 광해군을 거친 인조에 이르러서였다. 인조는 청나라가 일으킨 병자호란이 끝난 후인 1643년에 이르러 임진왜란의 가장 큰 공이 있었던 이순신장군에게 충무공이란 시호를 내렸던 것이다. 그가 세상을 떠난 뒤 거의 50년이나 지난 뒤의 일이었다.
남해섬 한 모퉁이에 여수반도와 사이에 있는 광양만의 관음포에 세워진 이순신장군의 전몰유적지를 돌아보며 그때 군왕들의 실정을 살펴보며 이후 500년이 더 지난 오늘의 정치를 되돌아본다. 그 때도 붕당으로 나뉘어 갑론을박 하였고, 전쟁중에도 전공이 큰 이순신장군을 잡아다가 고문을 자행하던 정부였고, 전쟁이 끝난 뒤에도 집권세력들은 백성들을 살피기 보다는 자신들의 잇권과 출세를 위하여 끊임없는 논쟁을 하였다. 전쟁이 끝난뒤라 하여 반성하고 정치를 일신 한 것이 아니라는 점이 너무도 안타깝고 한스럽다.
잘못했던 과거를 거울로 새롭게 정치를 했더라면 하는 생각이 간절하지만, 조선은 이후로도 백성을 살피고 새로운 문물을 받아들이려는 노력을 하지 않았고, 그런 연장선상에서 300년 뒤에 결국 일제의 식민지가 되고 말았던 것이다. 국가를 운영하겠다는 위정자들이 꼭 알았으면 하는 것은 더 이상 백성들의 고혈을 자신들의 잇권 챙기기에 이용하지 말고, 제발 국가발전과 백성들의 안녕을 살피길 바랄 뿐이다.
겨울도 끝나가는 온화한 날 남해바닷가 충무공 전몰유적지를 둘러보며 상념에 젖어본다. 지금도 계속되는 정쟁속에 과연 이나라 위정자들이 국가와 민족의 미래를 위하여 제대로 된 정치를 하고 있는지, 감언이설로 선량한 백성들을 속여서 정권연장에 골몰하는 것은 아닌지... 이제라도 자신들의 양심에 반성과 속죄를 바라는 것은 무리한 것인지...
최우성 (건축사.문화재수리기술자. 한겨레건축사사무소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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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재수리기술자로 한국인의 삶을 담아온 전통건축의 소중한 가치를 찾아 기록하고 보존하는 일을 하고 있다. 북촌한옥마을 가옥 보수설계, 혜화동주민센타 개보수설계, 파주 화석정, 파산서원 등과 영주 소수서원의 정밀실측설계, 낙산사칠층석탑 정밀실측설계, 불국사 일주문, 안동하회마을, 제주성읍마을, 영주 무섬마을 등 문화재보수설계 일을 맡아했다. 포천시민의 종 종각설계, 용마산 고구려정, 도피안사 대웅전, 봉선사 종각 등을 설계하였다. 현재 한국불교사진협회 회원, 문화유산사진작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