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문화신문=최우성 기자] 한국의 남해안은 수많은 섬들로 이루어져 있다. 한국에는 3,000여 개의 섬들이 있지만, 그 가운데 전라남도 신안군에만도 1,000개가 넘는 섬들이 있는데 이를 신안군에서는 많은 섬들로 이루어진 것을 쉽고 친근하게 표현하여 천사(1,004)의 신안군으로 홍보하고 있다. 이렇게 많은 섬들로 이루어져 있어서, 옛날에는 불편한 것이 너무도 많았다. 바로 앞에 보이는 섬이라도 몇시간씩 배를 타고 가야만 하였으니, 군민들을 관리하는 관청에서도 행정업무에 어려움이 크고, 또 섬에 사는 주민들도 작은 일 하나 처리하고자 군청이라도 한 번 가려면 1년에 한 두번도 가기가 어려운 처지였다. 이렇게 불편한 섬살이었던 신안군의 섬들을 최근에 정부 사업으로 섬을 연결하는 대규모 다리공사를 시행하여 머나먼 섬들이 육지로 바로 연결되었다. 이로 인하여 섬들에 사는 주민들도 좋아졌지만, 육지에 사는 사람들도 섬구경을 쉽게 할 수 있게 되어 섬이라는 것이 단점이었던 신안군이 육지인들의 정신적 치유처가 되어가고 있다. 국가적 사업으로 섬을 연결하는 대 토목공사 가운데서도 압해도와 암태도 사이는 거리가 매우 멀어서 가장 어려운 공사였다. 이 대교는 2010년 7
[우리문화신문=최우성 기자] 높고 푸른 가을하늘 아래 양떼들이 한가롭게 풀을 뜯고 있다. 아무런 걱정 없이 풀을 뜯어서일까? 양들이 모두 포동포동 살쪄있다. 대관령의 신선한 공기를 마시며 ‘먹고 자고 먹고 자고.....' 녀석들 팔자도 좋다. 넓은 초원의 울타리 안에 방목한 녀석들이 있는가하면 ‘먹이주기 체험장 안에서 관광객들이 주는 풀’을 받아먹는 녀석들도 있다. 먹이 체험장 안에 있는 녀석들도 연신 관광객이 주는 건초를 받아먹어 토실토실 살이 쪄 있긴 마찬가지다. 사람을 두려워 않고 연신 입을 내밀어 건네주는 건초를 잘도 받아먹는다. 아마도 두 그룹으로 나눠 초지에서 직접 풀을 뜯는 경우와 체험장에서 건초를 받아먹도록 조치한 것이 아닌가 싶다. 어느 경우나 양떼 구경을 하기 힘든 관광객들에게는 신기하기만 하다. ‘대관령 양떼목장’을 만든 이는 37살의 나이에 다니던 직장을 그만두고 대관령으로 내려와 오늘의 커다란 관광 목장을 일구었다고 한다. 주인공 전영대 대표는 말한다. “1988년 여름, 아무도 주목하지 않았던 대관령 산자락에서 대관령양떼목장이 시작되었습니다.숨가쁘게 뛰어오던 길을 잠시 멈추고 뒤를 돌아보니, 정말 많은 시간이 흘렀습니다. 제가 37살
[우리문화신문=최우성 기자] 한국의 절에서 행하는 천도의식으로는 개인별 조상의 혼령을 천도하기 위한 49재가 있고, 해마다 조상들의 천도를 위한 합동천도재로는 백중(음력 7월 15일)이 있으며, 국가를 위하여 전쟁터에서 산화한 영혼들을 위로하고 천도하기 위한 영산재가 있다. 그런데 이러한 생존했던 사람뿐만이 아니라 지상에 존재하는 모든 생명있는 존재들의 천도를 위한 의식이 있는데 그것이 바로 수륙재(水陸齋)다. 수륙재는 모든 살아있는 존재는 나름 생명이 있으며, 태어나고 죽는 생명있는 존재는 모두가 영혼이 있다고 생각하는 생명존중사상에서 비롯한 천도의식이다. 수륙재의 본래 이름은 ‘천지명양수륙무차평등대재(天地冥陽水陸無遮平等大齋)로 줄여서 수륙회 또는 무차대회라고도 한다. 이는 세상에 나와서 길건 짧건 태어났다가, 세상 속에서 생노병사를 거친 뒤, 죽은 존재들이라면 모두가 귀한 존재로서의 값어치를 인정하고, 이들 모든 외로운 혼령을 천도하여, 극락왕생을 염원하며, 더 나아가 극락왕생을 넘어서 궁극적으로는 깨달음을 얻도록 부처님 앞에서 설법과 염불과 각종의식을 통하여 빌어주는 것이다. 불교는 본래 스스로 공부하고 수도하여 깨달음을 얻는 것이나, 깨달음이라는 진리
[우리문화신문=최우성 기자] 신라후기 한국의 불교는 화엄경을 위주로한 교종에서 금강경을 위주로한 선종으로 바뀌어 갔다. 교종(敎宗)이 석가모니 부처님의 설법에 따른 경전화 된 교리를 중심으로 공부하고 수행하여 이땅에 부처님이 이룩하고자 한 화엄불국토를 이루고자 한 것이 목적이라면, 선종(禪宗)은 부처님의 가르침 가운데 궁극적 깨달음을 구하여 스스로 부처님처럼 깨달음을 얻는 것이 목표였다. 다시 말하면 선종은 팔만대장경 경전 속 가르침 보다는 앞서 깨달은 선사들 처럼 스승으로 부터 받은 화두를 추구하여 자신만의 깨달음으로 풀기 위하여 좌선수행을 위주로 하는 선수행 불교다. 이런 선수행 위주의 불교는 일찍이 부처님 당시부터 인도에 있어왔지만, 선종이 화려하게 꽃피운 때는 당나라시절(600년대) 경전을 통한 불교공부를 전혀 하지 못했던 한 나뭇꾼이 시장에 나무를 팔러왔다가 어떤 스님이 읊조린 금강경의 한 구절을 듣고서 바로 부처님의 깨침을 얻은 뒤의 일이다. 그 나뭇꾼은 출가하여 스님이 되었고, 당대 수백명의 제자를 거느린 선종의 대가인 홍인대사의 문하에 들어 갔다. 그런데 행자시절 방앗간에서 허드렛일을 하며 불교공부도 좌선수행도 하지도 못하던, 그는 홍인대사의
[우리문화신문=최우성 기자] 무량사는 백제의 마지막 도읍인 부여에 있는데, 부여 읍내에서는 좀 떨어진 곳 외산면에 있다. 무량사는 말 그대로 무량수불(아미타불의 다른 명칭으로 수명이 한량없이 길다는 의미의 부처로, 서방 극락세계의 부처님)을 주불로 모신 절이다. 사람들은 이승에 살다가 죽어 저세상으로 갈때 극락세계에 다시 태어나기를 원한다. 보통 동쪽에서 뜬 태양이 서쪽으로 가듯, 사람의 생명도 어린시절은 이제 해가 막 떠오르는 동쪽을 의미하고, 살다가 늙게되면 해가 동 → 남 → 서로 가는 것처럼 죽은 뒤에는 서쪽으로 넘어 간다고 생각하였다. 그리고 그 서쪽에는 극락세계가 있으며 그곳의 부처님을 아미타불이라고 생각했다. 부여 무량사의 창건은 신라말 범일국사(810~889)가 세웠다고 전한다. 범일국사는 신라시대 구산선문 중에서 강원도 굴산산문을 일으킨 신라 선종의 대선사다. 범일국사가 창건한 뒤 무량사에는 당대 고승이었던 무염국사도 일시적으로 머물렀다. 그리고 고려시대에 이르러 크게 번창하였다. 무량사는 조선시대 천재시인이면서 또한 의리를 목숨처럼 귀하게 여기던 생육신 매월당 김시습이 생을 마감한 곳이기도 하다. 김시습은 단종의 왕위를 찬탈한 세조의 구데타
[우리문화신문=최우성 기자] 부여는 백제의 도읍지였다. 백제의 시조인 온조는 고조선의 한 부족이었던 부여족으로, 고구려를 세운 동명성왕(고주몽)의 아들이었으나 동명성왕의 큰아들인 유리왕에게 왕위가 계승됨에 따라 새로운 신천지를 찾아 내려와 한강이 흐르는 지금의 서울 풍납동, 몽촌동 주변에 터를 잡고 경기 충청 전라지역을 다스리면서 나라 밖으로도 그 영역을 넓혀 일본과 중국 동부해안 지방을 경영하였다. 그런데 훗날 고구려와 경쟁하는 과정에서 21대 개로왕 대에 이르러 고구려 장수왕에 패하여 도읍을 옮기게 되었다. 그렇게 옮긴 도읍은 금강이 흐르는 요새지인 공주였다. 공주는 곰나루가 있는 도읍이라는 뜻으로, 한문으로는 웅진(熊津)으로 썼다. 이때가 서기 475년이었다. 충남 공주는 방어하기에는 좋은 곳이었으나, 산세로 둘러쌓인 지형상으로 크게 발전할 수 있는 도읍터로는 부족하다고 생각하여 성왕 때에 이르러 다시 도읍을 옮기게 되었는데 그곳이 부여다. 부여는 공주에서 멀지 않은 곳이면서 평야지대와 가깝고, 방어하기에도 좋은 곳이다. 부여는 금강이 흐르는 곳이며, 곡창지대인 호남평야와도 가까운 교통의 요지다. 성왕은 이곳으로 도읍을 옮기면서 나라의 이름도 백제에서
[우리문화신문=최우성 기자] 신라 후기인 9세기 무렵 처음 지어진 뒤 고려시대에 크게 번창하였던 원주 거돈사는 신라시대 완성된 탑인 불국사 석가탑과 거의 같은 규모의 석탑과 석탑의 뒷편에 자리한 정면 5칸의 통층(2층처럼 보이나 내부는 1층인 건물)금당이 화려한 모습의 절이었을 것으로 추측된다. 다. 절의 중심은 탑과 금당이 앞뒤로 축을 이루고 주변으로 부속전각과 승방 요사채들이 들어서있는 구조였다. 발굴조사 결과 금당이 있던 자리에는 건물의 주변에 지면에서 약 70cm 정도 위에 긴 장대석의 기단석이 사방으로 배치되었고, 그 안쪽으로는 건물의 기둥을 받치고 있던 둥근 주춧돌과 맨 중심에는 거대한 부처님을 안치했던 석련대만이 남아있다. 그리고 금당과 탑의 주변에는 많은 전각들이 있었음을 추정할 수 있는 석재파편들과 기와 파편들 그리고 절에서 쓰던 많은 유물들이 출토된바 있다. 거돈사에는 고려초 국사로 추앙되었던 원공국가 지조(930 ~ 1018) 스님의 사리탑이 있고, 그의 행적을 기록한 탑비가 있는데, 원공국사의 탑비는 당대 최고의 문장가로 이름이 높았던 최충이 글을 짓고, 명필 김거웅이 글씨를 썼다. 그런데 안타깝게도 원공국사의 탑비만 이곳에 남아있고 원
[우리문화신문=최우성 기자] 강원도 원주의 명산인 치악산은 본래 적악산이라 하였다고 한다. 그런데 꿩과 구렁이의 설화에 따라 산의 이름이 치악산(雉岳山)으로 바뀌었다. 한국의 곳곳에는 많은 전설과 설화가 있는데, 그 가운데서도 사람이 보기에는 사소한 동물이지만, 생명의 존귀함을 알고 이를 도와준 덕에 큰 보은을 받은 이야기도 많이 있다. 이곳 치악산 상원사에는 죽을 위기에 처한 하찮은 날짐승이지만 자신에게는 그 무엇보다도 소중한 자기 새끼를 구해준 은혜를 갚기 위하여, 결국에는 자신의 몸을 희생한 꿩과 구렁이와 선비의 이야기가 전한다. 상원사에 전하는 이야기에 따르면, 옛날 옛날 먼 옛날에 한 젊은 선비가 과거를 보러 한양으로 올라가던 중 적악산(현 치악산) 험한 고개를 넘게 되었다. 그런데 갑자기 깊은 산중에서 꿩이 울부짖는 소리가 있어 귀를 기울이고 소리나는 곳을 찾아보니, 큰 나무 위에서 꿩 두마리가 뱀을 향하여 울부짖으며 울어대는 것이었다. 선비는 주변을 자세히 살펴보니 구렁이가 오르려는 큰 나무 위에는 꿩의 보금자리가 있었는데, 그 속에는 막 깨어난 꿩새끼들이 노란 부리를 벌리고 먹을 것을 달라고 보채고 있었다. 그런데 꿩 부부는 꿩새끼들을 잡아먹으
[우리문화신문=최우성 기자] 바위에 새긴 마애불((磨崖佛)은 들어봤어도 '마애종(磨崖鐘)'이란 말은 처음 듣는 사람들이 있을 것이다. 경기도 안양시 석수동에는 우리나라 문화재 가운데 유일하게 바위에 새긴 종(鐘)이 있는 데 그것이 '마애종(磨崖鐘)'이다. 이 종의 형상은 역사적으로 한국에 전해 내려오는 전통양식의 종모양으로 이를 바위 절벽에 그대로 새겨놓았다. 본래 근처에는 고려시대부터 있었던 중초사라는 절이 있었으며 현재 마애종이 있는 자리는 중초사의 경내로 추정된다. 하지만 중초사가 폐사되고 이 마애종만 아무런 보호장치 없이 암벽에 남아 있게 되었다. 지금은 안양시내 유치원생들의 역사유적 탐방장소로 많은 어린이들이 찾는 명소가 된 이곳은 안양시 외곽에 자리하고 있다. 그동안 도시확장으로 커진 안양시는 특히 관악산 남쪽 기슭인 이곳까지 개발됨에 따라 현재는 시민공원이 되었고 절의 전각들이 들어서 있었을 것으로 추정되는 '마애종' 앞에는 안양시예술공원의 시민주차장이 되어 버려 이제는 절이 있던 옛 자취는 전혀 느낄 수 없어 아쉬웠다. 하지만 마애종 근처에 있는 안양시립박물관에는 옛 중초사의 석조유물들로 '당간지주', '삼층석탑'이 있으며, 계곡을 가로지르는
[우리문화신문=최우성 기자] 북한강에서 멀지 않은 경기도 양평군 서종면에는 조선 후기 위정척사사상으로 몰아쳐 들어오는 서양의 문명에 대항하여 우리 것을 지켜야 한다는 유교에 근본을 둔 학자들이 따르던 화서(華西) 이항로(李恒老) 선생이 있었다. 그는 1792년(정조 16)에 태어나 1868년(고종 5)에 세상을 떴는데, 학문에 천재적인 소양이 있었는지 3살에 천자문을 떼고, 6살 때에는 중국의 전체역사를 축약한 《19사략》을 읽고 이를 독후감처럼 쓴 천황지황변(天皇地皇辨)을 지었다. 또 12세에는 '신기령'에게서 《서전(書傳)》을 배우는 등 학문과 역사에 남다른 재능이 있었다. 그는 16세인 1806년(순조 8) 한성에서 열린 초시에 합격하여 관직의 길에 들어서려 하기도 하였으나 당시 고관대작들이 과거급제를 구실로 친근을 종용하자 사사로운 정분을 통하여 관리가 되는 것이 학자의 길이 아님을 깨닫고 다시는 과거에 응하지 않았다. 이항로는 이후 한양에서 학문이 높기로 수문난 임로(任魯)와 지평의 이우신(李友信)을 찾아가 학우가 되었고 25~26살 때 부모를 여의고 학문에 더욱 전념하여, 30살이 되어서는 그의 학문과 인격을 흠모한 청년들이 그의 거처로 모여들었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