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문화신문=최우성 기자] 청자 기법을 중국의 도자기에서 받아들여 이를 투각과 삼감기법등으로 발전시키고, 고려인들만의 미적감각을 표현하여 천하의 명품으로 세상을 놀라게 하였던 고려시대 상감청자들이다. 전시품들을 보면서 황홀함을 느꼈으며, 선조들이 이룩하였던 문화유산들이 얼마나 귀하고 자랑스러운 것인지 충분히 느낄 수 있었다. 또 고려시대와 더불어 발전하였지만, 후기에는 전성기와는 다른 변형되거나 쇠퇴해가는 모습도 볼 수 있었다. 어느 것 하나도 허투루 여길만한 것이 없이 고귀한 작품들을 이렇게 한데 모아 볼 수 있기는 쉽지 않을 것으로 생각되는 고쳐청자 모듬전시회였다. 청자전시회는 지금 국립중앙박물관 본관 3층에서 현재 전시중에 있다. 아울러 조선시대 명품이었던 백자전도 함께 본다면 한국의 청자와 백자에 대하여 제대로 볼 수 있는 전시일 것으로 생각된다. 많은 독자님들의 관람을 추천하며 시리즈를 마친다.
[우리문화신문=최우성 기자] 고려청자로는 주전자, 정병, 찻잔, 항아리, 매병, 등 상당히 큰 작품 뿐 아니라, 작지만 귀하게 여기던 귀중품이나 화장품 등을 보관하던 '합' 선비들이 벼루에 먹을 갈기 위한 물물을 담았던 '연적' 등도 다양하게 만들었다. 청자는 전체적으로 비색(비취색)으로 만들고자 하였지만, 고려시대 만들었던 모든 청자가 비색인 것은 아니었다. 또 청자가 유행하던 시대에도 다양한 색깔의 자기들이 만들어졌으며, 때로는 흑색, 적색, 황색 등의 자기들도 있으며, 고려 후기에는 백자와 비슷한 색깔의 자기들도 만들어졌다. 고려시대에도 비색청자를 만들기 위하여는 특별한 기술을 가진 장인들이 특별한 물감을 개발하여 자신들만의 기법으로 매우 비밀스럽게 전수하였다.
[우리문화신문=최우성 기자] 고려시대에는 불교와 유교문화가 함께 경쟁과 조화를 이르는 시대였기에 차문화와 술문화가 같이 발달하였다. 이에 따라 그에 맞게 사용할 그릇들도 다양하게 발달하였다. 고려시대가 지난 뒤에는 차문화는 차츰 기울고 술문화만 남게되어 고려시대 발달하였던 다양한 청자 다기(茶器)도 사라지고 말았다. 고려시대에는 차를 마시면서도 운치를 느낄 수 있도록 향을 피웠다고 한다. 현재 국립중앙박물관 전시 중
[우리문화신문=최우성 기자] 고려시대 청자는 그릇의 색깔이 청색을 띄고 있어서 붙여진 이름인데 그 기법은 매우 다양하다. 첫째, 흙으로 만든 그릇의 표면을 실처럼 파서 새긴 모목새김 곧 음각(陰刻), 둘째, 무늬를 돌출하게 새긴 돋을새감 곧 양각(陽刻), 셋째, 눌러서 돌출하여 입체감을 느낄 수 있게 만든 압출(壓出) 돋을새김. 넷째, 별도로 모양을 만들어 입체감이 나게 붙인 상형(象形), 다섯째, 흑토와 백토를 물에 개어서 그림을 그르듯 무늬를 새기고, 그 위에 유약을 발라서 구운 퇴화(堆畵)기법, 여섯째, 그릇의 꽃무늬에 붉은색을 칠하여 화려하게 한 동화(銅畵) 동채(銅彩)기법. 일곱째, 철사 물감을 그릇의 표면에 새겨넣은 철화기법(鐵畵技法), 여덟째, 청자의 바탕흙에 역상감 기법으로 백토를 넣고, 그 부분을 제외한 전체에 철분이 많은 유약인 철유(鐵釉)를 발라서 구운 철유기법(鐵釉技法) 등으로 다양하게 발전하였다. 이와 같이 다양한 기법으로 다양한 그릇들을 만들어낸 고려청자는 고려에서만 인정받았던 것이 아니라, 당시 중국은 물론이고, 서양으로까지 흘러들어갔으며, 흙으로 구워만든 그릇 가운데 가장 귀한 그릇으로 여겨졌으며, 지금에 이르러서도 그 아름다운
[우리문화신문=최우성 기자] 흑유(검은색) 철유(붉은색)등 여러 유약을 활용하여 도자기의 빛깔을 다양하게 만들고, 그릇의 표면을 긁어내어 무늬를 새기고, 그곳에 다른 색이 나는 흙을 채워서 상감기법으로 발전한 고려청자들 국립중앙박물관 청자전 현재 전시중
[우리문화신문=최우성 기자] 12세기 고려청자는 푸른빛의 비색을 띠게 되었고, 다양한 모양으로 발전하였다. 그런데 많은 그릇 중 향로와 주전자의 모양이 많은데, 향로는 투각기법이 등장하여 연기가 올라오는 모습이 더욱 신비스럽게 하였고, 주전자의 기능은 물이나 차 등 액체를 담아 잔에 따르기 위한 단순한 기능이지만, 이런 단순한 기능에 어떻게 하면 아름답고 귀하게 만들 것인가를 연구한 것이 고려청자였다. 그 결과 주전자이되 물을 담는 몸통의 모양으로 다양한 자연물과 동물의 모양을 본따게 되었고, 그 결과 명품들이 탄생하게 된 것이다. 이렇게 주전자에 활용한 것들로 물고기, 거북이, 오리, 원앙, 석류, 죽순 등이 있으며, 예전에 만들던 항아리를 활용한 경우 등이 있다.
[우리문화신문=최우성 기자] 이전시대에는 청동으로 만들던 것들을 고려시대에는 청자로 만들기 시작하였다. 물건을 쓰는 입장에서 보면 깨지기 쉬운 청자는 다루기도 훨씬 조심스러웠을 것이나, 만들기도 어렵고 다루기도 어려운 물건들을 굳이 청자로 만든 까닭은 귀한 곳에 쓰는 물건을 더욱 귀하게 대접하기 위한 것으로 보인다. 청자의 시작은 중국에서 비롯되었지만, 그 청자의 기법을 더욱 발전시킨 것은 고려였다. 고려청자는 중국에서 더 각광받기 시작하였다. 한국인의 뛰어난 손재주를 마음껏 보여주는 고려청자의 모습을 보면서, 요즈음 세계에 펼쳐지는 한국의 문화상품들이 갑자기 솟아난 것이 아님을 알 수 있게 한다.
[우리문화신문=최우성 기자] 고려왕조는 성종때(981~997) 때부터 각종 의례에 대한 제도를 정비하면서 그에 쓰이는 자기들을 만들었다. 이를 위하여 《상정고금예문》이라는 책을 펴냈다. 각종 의식을 주관하기 위하여 제기도감, 도제고 등의 관청을 설치하고 국가 의례용 그릇들을 체계적으로 만들고 관리하였다. 의례용 그릇에는 왕실의 권위를 상징하는 도철(중국 신화에 등장하는 전설의 동물), 용, 이룡(이무기) 등의 무늬를 장식하였고, 의식을 행할 때에는 향로에 향을 피웠는데, 이 향로도 청자로 만들었다. 연꽃문양을 돋을 새김으로 장식한 향로는 백제금동대향로를 생각하게 하는데, 백제금동대향로에서는 연꽃이 수많은 산으로 표현되었고, 그 산마다 수많은 동물들과 사람들이 표현되었다. 고려시대에는 불교와 관련된 국가적 의례가 많았는데 대표적 행사로는 연등회와 팔관회가 있었다. 이런 행사에는 다양한 그릇들이 사용되었을 것이고, 귀한 음식과 음료와 행사용 물품들은 귀한 청자에 올려졌을 것이다.
[우리문화신문=최우성 기자] 한국의 문화유산 중에 그 아름다움으로 세계에 널리 알려진 고려청자는 이전시대에 토기를 제작하던 기법을 발전시켜 이룩한 그릇으로, 통일신라 말기인 9세기 무렵부터 시작되었다. 청자는 당시 불교의 스님들에서 유행하던 차문화와도 깊은 관련이 있는데, 중국의 청자가 들어오면서 이를 더욱 발전시켜 중국의 청자보다도 더욱 아름다운 청자를 만들었다. 고려청자는 강가를 중심으로 가마가 발달하였는데, 주로 경기도와 전라도를 중심으로 생산되었다. 이는 가마를 유지하기 위하여는 풍부한 땔감이 필요하였고, 또 생산한 뒤에는 이를 배에 싣고 운반해야했기 때문이다. 지금 국립중앙박물관에 전시중인 고려청자는 시대별 다양한 작품들이 전시 중으로 고려청자의 발전사를 잘 알수있는 전시이다. 이에 전시중인 작품들을 몇 차례에 걸처 사진으로 소개하고자 한다.
[우리문화신문=최우성 기자] 오래된 한국의 사찰에 들어서면 절의 중심인 대웅전, 극락전, 대적광전, 보광전이 자리잡고 있고 이러한 건물 앞마당에는 오랜 세월동안 절의 역사와 함께한 석등이 하나쯤은 꼭 있다. 예전에는 밤이 되면 이 석등에 직접 불을 붙여 불전(佛殿)을 밝혔으나 지금은 불을 밝히던 기능은 잃어버리고 부처님이 계시는 전각을 밝힌다는 상징성의 조형물로 자리잡고 있다. 절 앞마당에 있는 석등(石燈)을 부처님의 밝은 가르침을 깨닫게 하기 위한 상징을 갖고 있다고 해서 법등(法燈)이라고도 부른다. 이 법등은 세상의 어두운 무명(어리석음)과 고통(어리석음으로 인하여 윤회하는 인간의 삶)속에서 살아가는 중생들에게 밝고 환한 진리의 등불을 뜻한다. 석등은 언뜻보면 비슷한 듯 서로 다른 모습으로, 때로는 지극히 화려한 모습으로, 때로는 단순 소박한 형태 등 다양한 모습으로 변화해 왔다. 하지만 불교가 탄압을 받게 되는 조선시대를 거치면서 안타깝게도 수많은 절이 폐사되어 감에 따라 절터에 홀로 덩그마니 석등만 남아 옛 영화를 말없이 증언해주는 곳도 많다. 절에 있는 석등의 구성은 맨 아래에는 기둥과 받침역할을 하는 간주석이 있고, 그 위에는 불을 밝히는 화사석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