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린경제/얼레빗 = 최우성 기자] 충남 서산군 부석면 간월도리에 있는 간월암! 조선왕조를 세운 이성계(태조)와 깊은 관계가 있는 유서깊은 암자였다. 하지만조선왕조가 배불정책을 펴는 통에 언제인지도 모르게 사라져 그 이름만 전해오던 시절도 길었다. 그러다가 조선왕조가 쇠망한 뒤 일제 식민지 후반기에야 수덕사의 만공스님이 다시금 중창하였다고 한다. 간월암은 무학대사가파도를 벗삼아 수도정진하다가 두둥실 떠오른 달을 보고 불도를 얻었다고 하여 그 이름도 간월암이다. 간월암은 바닷가에 위치하여 밀물과 썰물에 섬이 되었다가 육지가 되었다가를무한 세월 반복하며, 바다를 숙명처럼 이고 사는 사람들의 해원의 암자이기도 하다. 그래서 바다를주관하는 용왕을 모신 작은전각이 바다를 향하여 건립되었다. 인간사 생명보다 더 중한 것이 어디 있을 것인가? 하지만 먹고 살기 위해 바다를 외면할 수 없으니 배의 안녕을 기원하는 행사도 빠질 수 없는 것이다. 용왕이시어 부디 무사귀환과 풍어를 기원합니다. 또 불의의 객이된 이들의 영혼은 극락왕생하게 살피소서. 나무아미타불 관세음보살 * 최우성 (건축사.문화재수리기술자. 한겨레건축사사무소 대표) 문화재수리기술자로
▲ 밀물이 들기전에 왕래가 자유로운 간월암 ▲ 밀불이 들어오자 부지런히 섬을 빠져나오는 사람들 ▲ 신발대신 장화를 신고 섬을 나오는 스님. ▲ 완전히 섬이 된 간월암 간월도 간월암을 담는 사진가 [그린경제/얼레빗 = 최우성 기자] 충남 서산군 부석면 간월도리에 있는 간월암은 조선 태조의 왕사였던 무학대사가 태어났던 곳이면서 또한깨침을 얻은 곳으로 유명하다.무학대사의 어머니는 무학대사를 낳기 전에 이 곳을 지나다가 갑자기 산기를 느껴 간월암의 양지바른 곳에 그를 낳았지만 어찌할 바를몰라 옷가지만 덮어둔채 고을로 들어가 원님을 뵈었는데 고을원님이 너무도 수척한 여인에게 그 연유를 묻고 답을 얻어 그녀가 아이를 낳은 곳에 이르러 보니 학이 날개를 펴서 아이를 보호하고 있었다고 한다. 그리하여 아이는 무학이란 이름을 얻게 되었고, 차후 출가하여 나옹화상으로부터 법을 전수받고 이곳 간월암에서 달을 보고 깨침을 얻었다고 하여 간월암이라 명하였다. 하지만 간월암도 조선조의 배불정책에 폐사가 되어 섬으로만 되었던 것을 1941년 한국 근세의 선승인 만공스님이 간월암을 다시 중창하고 1000일 기도를 드리면서 조국의 광복을 빌었다고 한다. 하루 2차례
[그린경제/얼레빗=최우성 기자] . 꽃지해변의 할아버지와 할머니섬 !! 밀물에는 섬이었다가 썰물이면 육지가 되는 곳, 섬과 육지를 매일 2 차례 무한정 반복합니다! 언제부터인지 사람의 흔적보다 더 오랫적 존재였을것 같은 섬아닌 섬. 변함없이 늘 저리도 아름답게 서있네요!! 일몰이 더욱 아름다와 연인들의 데이트 명소이기도 하지만 한국에서 꼭 가보아야할 명소 중 열 손까락 안에 드는 명승입니다!! 안면도 꽃지해수욕장에서 해삼 한 접시에 소주도 한 잔!!! 캬!!!!
▲ 푸른 잎과 봉우리만 있는 코끼리 국화꽃 ▲ 활짝 핀 국화꽃 코끼리 ▲ 국화 코끼리 가족 [그린경제/얼레빗 = 최우성 기자] 코끼리 모양으로 단장한 조계사 경내 국화꽃 전시회 처음에는 푸른 잎만 보이다가 하얀 코끼리로 활짝 피어났습니다. 코끼리는 한 번 세운 원력은 그 원력을 이룰때까지 묵묵히 수행한다하여 행원의 상징으로 여깁니다. 코끼리와 함께 있는 보살은 보현보살로 믿음도 중요하지만 행하지 못한다면 그 의미가 퇴색된다는 것을 상징합니다. * 최우성 (건축사.문화재수리기술자. 한겨레건축사사무소 대표) 문화재수리기술사로 한국인의 삶을 담아온 전통건축의 소중한 가치를 찾아 기록하고 보존하는 일을 하고 있다. 파주 화석정, 파산서원 등과 영주 소수서원의 정밀실측설계, 불국사 일주문, 안동하회마을, 제주성읍마을, 영주 무섬마을 등 문화재보수설계 일을 맡아했다. 포천시민의 종 종각설계, 용마산 고구려정, 도피안사 대웅전, 봉선사 종각 등을 설계하였다. 현재 사진활동은 한국불교사진협회 회원, 해리티지채널사진기자, 포토클럽 회원으로 활동 중
[그린경제/얼레빗=최우성 기자] 조선중기 권문해가 관직을 사직한 뒤 고향땅에 내려와 당쟁과 권력의 싸움에서 떠나 자연을 벗삼아 살고자 지은 원림으로 권문해가 세상을 떠난 뒤 임진란때 불탔던 것을 그의 후손이 중건하였다. 권문해는 예천이 본관으로 학문적으로는 퇴계이황의 문하이며 선조시절 젊은 유학자였던 유성룡, 김성일과도 친분이 깊었다. 관직에서 물러나 낙향한 뒤 조선의 설화를 집대성한 《대동운부군옥》이라는 책을써서 우리나라 설화를 집대성하였다고 한다. 초간정은 그의 호에서 유래한 정자의 이름이며 심산계곡과 소나무가 우거진 풍광이 아름다워 많은 시인묵객들이 즐겨 찾는 곳이 었다. 초간정은 예천군 용문면 용문사 근처에 있다. * 최우성 (건축사.문화재수리기술자. 한겨레건축사사무소 대표) 문화재수리기술사로 한국인의 삶을 담아온 전통건축의 소중한 가치를 찾아 기록하고 보존하는 일을 하고 있다. 파주 화석정, 파산서원 등과 영주 소수서원의 정밀실측설계, 불국사 일주문, 안동하회마을, 제주성읍마을, 영주 무섬마을 등 문화재보수설계 일을 맡아했다. 포천시민의 종 종각설계, 용마산 고구려정, 도피안사 대웅전, 봉선사 종각 등을 설계하였다. 현재 사진활동은 한
우이암 바위 꼭대기에 힘겹게 오른 암벽등반가가 올라 있다. [그린경제/얼레빗 = 최우성 기자] 한국의 수도 서울 시민의 정신적 쉼터인 북한산과 도봉산을 끼고 자리한 우이동은 말 그대로 소의 귀와 관련된 그 무엇인가가 있다. 그런데 소의 귀와 관계되는 그 무엇이 있으리라 짐작 되지만, 그 소의 귀가 무엇이며어디에 있는지는 아는 사람이 별로 없다. 버스를 타고 우이동 입구에 내려보면, 장흥으로 넘어가는 긴고개가 있으며 이를우이령이라고 부른다. 그러면 고개가 소귀처럼 생겨서 우이동이라 부르는 것이 아닌가 하는생각이 들기도 한다. 그런데 우리나라는 이름있는 산이 있으면 그 산에 의지하여 많은 절이있듯, 서울의 진산인 도봉산 북한산 주위에도많은 절과 암자들이 있다. 그래서 둘러보니 도선사 석굴암 천축사 회룡사 망월사, 광륜사, 봉국사, 원효사, 호암사등등 많은 절들이 보이고, 그 중에 문득 눈에 드는 우이암이 눈에 들어온다. 올커니 우이동과 우이암이 무슨 관계가 있는 절인가 싶어 도봉산 마루쯤에 있는 우이암을 찾아가 2시간 가량땀을 흘리며 올라가 보았다. 그랬더니 한소끔 땀을 내고 산마루에 쉬는데 천축사가 보인다. 지도상으로 볼 때 천축사 윗쪽에 우이령이라 했으니
[그린경제/얼레빗 = 최우성 기자] 안암동 보타사 관세음보살상 자연적으로 형성된화강암 바위 암벽에 선각으로 보살상을 조각하였다.오른손은 시무외인(중생의 근심과 두려움을 없애준다는 뜻의 손모습)과 왼손은 선정인(보살이나 부처가 선정에 들었을 때를 나타낸 손모습)을 하고 있다. 고려시대 제작된 보살상으로 본래는 채색을 하였을 것으로 보이며, 그 흔적이 입술 주변에 약간 붉은 색으로 나타나 있다. 상호(부처나 보살의 얼굴모습)도 원만하게 보이며 머리에는 관세음보살임을 나타내는 보관을 쓰고 있어서 관세음보살임을 알 수 있다. 보타사에는 근세 승가교육의 중심이었던중앙승가대학이 오랫동안 있었기에 승가교육의 중심이었으나, 중앙승가대학이 김포로 확장이전하여 이제는 무척 한적한 도심속의 암자가 되었다. 보타사 마애관음보살은 오랜세월을 견디면서도 큰 손상이 없이 완전한 모습으로 있어 보물급이나 현재는 서울시유형문화재89호로 지정되었다. 보타사는 고려대학교 근처 개운사 안쪽에 있으며 절 자체가 고려대학교 안쪽으로 깊숙히 들어와 있다. * 최우성 (건축사.문화재수리기술자. 한겨레건축사사무소 대표) 문화재수리기술사로 한국인의 삶을 담아온 전통건축의 소중한 가치
[그린경제/얼레빗 = 최우성 기자] ▲ 말을 탄 사람 가야시대 흙으로 만든 조각상으로 말을 타고 어디론가 가는사람을 묘사하고 있다. 이 조각상은 술주전자로 사용하였을 것으로 보이는데, 술을 담을 때 깔때기로 활용할 수 있는 그릇이 뒷쪽에 있고 말의 앞에는 술이 나오는 주둥이가 있다. 그런데 깔때기 처럼 생긴 것은 유목민들이 이동시 요리할 때 쓰는 동복으로 그 동복의 형태로 보아 가야인들도 유목민의 후예라는 것을 알 수 있다고 한다. 말탄 사람은 고깔처럼 생긴 모자를 쓰고 있으며 갑옷을 입고 있어 완전 무장한 무사의 형상이나 무척 날렵하게 생겼다. 용산 국립중앙박물관에서 촬영 * 최우성 (건축사.문화재수리기술자. 한겨레건축사사무소 대표) 문화재수리기술자로 한국인의 삶을 담아온 전통건축의 소중한 가치를 찾아 기록하고 보존하는 일을 하고 있다. 파주 화석정, 파산서원 등과 영주 소수서원의 정밀실측설계, 불국사 일주문, 안동하회마을, 제주성읍마을, 영주 무섬마을 등 문화재보수설계 일을 맡아했다. 포천시민의 종 종각설계, 용마산 고구려정, 도피안사 대웅전, 봉선사 종각 등을 설계하였다. 현재 사진활동은 한국불교사진협회 회원, 해리티지채널사진기자, 포토클럽
회암사 전경 건물은 다 없어지고 기단과 주춧돌만 남았다 기단으로 당시의 규모를 짐작해본다. 기단으로 오르는 계단 계단 당간지주 널부러진 기둥을 받치던 주춧돌들 기단돌들도 흩어지고 계단 옆 소맷돌 임자가 누구인지 궁금한 스님 사리탑 사리탑의 상륜부 [그린경제/얼레빗 = 최우성 기자] 조선조 배불정책으로 전국의 수 많은 절들이 없어되거나 축소되었지만, 한때 조선의 국찰로 융성하였던 회암사 !! 조선초 인도의 지공화상 그의 제자 나옹화상 그리고 그의 제자이면서 태조 이성계와 막역한 사이였던 자초 무학대사가 주석하여 조선의 국찰로 명성을 얻었던 회암사 ! 다른 큰 절들은 깊은 산속에 있기에 들리기 쉽지 않지만 회암사는 명나라 사신들도 한국 절을 보기 위해 많이 들렸다는 기록이 남아있다. 회암사는 성종의 어머니로 잘 알려진 인수대비가 불교를 중흥시키기 위하여 각고의 노력을 기울였고, 그의 뜻대로 중창불사까지 이루어졌으나, 낙성을 보지 못하고 폐사가 되고 만 비운의 절이었다. 회암사의 중창을 거의 다 마치고 낙성만 남은 상태에서 갑자기 인수대비가 승하하여 모든 행사는 취소되어 버렸으며, 인수대비가 사라지자 유림들의 빗발치는
명당수가 흐르는 금천교에서 본 능역 능역과 정자각 신도에서 본 정자각 정자각의 뒷문으로 본 능역 왕비인 단의왕후의 능이 앞에 있고 경종은 뒤에 있다. 장명등 정면 장명등을 사각으로 본 모습 능을 수호하는 문신 무신 그리고 석마들 무신은 완전무장하고 있다. 문신은 관복과 관모를 쓰고 명령 대기상태 돌로된 양도 수호신에 들어있다. 돌로된 호랑이 석호 석호의 앞모습.. 무섭다기 보다는 인자한 할아버지 같다. 석호의 뒷모습. 호랑이 꼬리가 뒷등에 얹혀 있다. 무신이 타고 다닐 석마 앞모습 석마의 옆모습 [그린경제/얼레빗 = 최우성 기자] 역사 드라마에 자주 등장하는 숙종과 장희빈의 사이에 태어나 파란 만장한 삶을 살고 간 경종. 어머니가 자신을 불구로 만들고, 시기 질투에 결국 사약을 받고 죽은 후에 왕이 되었으나 왕다운 대접도 제대로 못받고, 결국 젊은 나이에 승하하고 말았다. 경종이 왕이 될 당시에는 서인과 남인의 당쟁이 심하여 서인의 대표인 송시열은 경종의 등극을 적극 반대하다 결국 사약을 받고 죽었다. 경종은 등극한 후에도 연잉군(후에 영조)에게도 대리 청정을 시키는 등 자신의 뒤를 이을 수 있도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