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문화신문=최우성 기자] 설악산에서 동해안 쪽으로 가파른 설악의 산봉우리와 함께하고 있는 신흥사는 신라 통일기에 세워진 고찰이다. 서기 652년 이곳에 처음 절을 세운 스님은 황룡사 구층탑을 세웠던 자장율사로, 창건 당시에는 향성사(香城寺)하 하였으나, 얼마되지 않아 화재로 소실된 뒤, 의상대사가 향성사의 맥을 잇고자 그 이름을 선정사(禪定寺)라 하였다. 이때 의상대사가 세운 선정사는 본래 향성사터가 아닌 부속암자였던 능인암터에 세운절이었다. 이후 선정사는 900여년간 불교의 맥을 이으며 왔으나, 조선 중기 인조 22년(1644) 또 다시 전체 사찰이 소실되고 말았다. 이후 다시 선정사의 절터에 절을 짓고 신흥사라 부르게 되었다. 현재의 모든 건물들은 오래된 것들이 1700년 대에 지어진 것이며, 다만 극락보전에 모셔진 불상은 선정사 당시에 봉안했던 불상으로 의상대사가 직접 조성한 3불상의 하나라고 있다. 1700년 초기에 지어진 주요 전각으로는 극락보전, 명부전, 보제루, 칠성각등으로 현재 신흥사내 주요 문화재다. 그런데 이후 일제강점기와 한국전쟁을 겪으면서도 주요 건축물들이 소실되지 않음은 매우 다행스러운 일이었으나, 한국전쟁 당시 한국군이 이곳 신흥
[우리문화신문=최우성 기자] 이제 슬슬 가을단풍이 만산을 뒤덮을 계절이다. 하지만 10월 하순인데도 금강산 건봉사의 나무들은 아직 단풍으로 치장할 뜻이 없는 듯하다. 주변에 소나무가 많아서인지 울창한 소나무 숲은 여름같기만 하다. 지구온난화 탓인가? 지난 주말(23일) 찾은 금강산 건봉사는 아직 단풍소식이 감감하다. 10월 말이 다가와 지금이 절정인 것으로 생각하고 먼길을 찾았는데 아쉽기 그지없다. 분단 이후 한국의 맨 북쪽에 있는 건봉사는 백두대간이 남쪽으로 뻗어내리는 가운데 금강산의 남쪽에 있는 절로, 조선시대에는 백두대간의 동쪽에 있는 많은 절들을 거느리던 한국불교의 본산 중에 하나인 큰 절이었으나, 안타깝게 한국전쟁의 포화속에서 사찰이 전소되어 버리고 한동안 빈터로만 남아있었다. 본래 창건의 연원을 찾아 올라가면 신라가 한참 융성하던 법흥왕 7년(520) 고구려의 스님인 아도가 창건하였다고 하나, 지금 그 자취는 찾기 어렵다. 그 당시라면 아직 신라에 정식으로 불교가 공인되지 않은 시기이기에 신라 최초의 절이라 할 수도 있다. 이후 찬란한 역사를 이어오던 건봉사는 조선시대에도 왕실의 원당이 되어 토지와 노비를 하사하였던 절이기도 하였으며, 신심이 깊은
[우리문화신문=최우성 기자] 요즈음 집값 폭등으로 많은 국민들의 마음이 불편하다. 집값이 폭등하자 등장한 것이 신도시를 만드는 것인데, 일산은 1990년대 노태우정부시절 집값폭등을 잠재우기 위하여 200만호를 목표로 서울 근교에 세운 제1기 4개신도시의 대표주자로 세워진 것이 일산신도시이다. 일산은 본래 한강과 맞닿고 있는 고양시 장항 주엽 대화 평야의 넓은 논과 밭에 새로운 도시를 세운 것인데, 다른 3개신도시와 다르게 매우 큰 인공호수를 공원으로 조성한다는 계획이 있었다. 일산호는 한바뀌 걸어서 돌아보는데 1시간이 걸리는 4.27km의 산책로가 있다. 이 산책로를 따라서 돌다보면 광장, 나무숲, 오솔길, 작은 섬, 장미원, 야생초 정원, 메타세콰이어길, 선인장 전시관, 연꽃정원, 인공폭포 등을 만나게 되는데 4.27km의 산책로가 지루하게 느껴지지 않은 아름다운 명소다. 일산호수공원에서는 해마다 봄맞이 꽃박람회를 열고 있는데, 지난해와 올해는 코로나19로 인하여 그 규모는 축소되었다. 또 가을이면 가을국화 야외전시를 하고 있는데, 그 시기가 바로 지금이다. 해마다 봄철 꽃박람회를 여는 장소에 가을이면 오밀조밀 아름다운 국화꽃들을 전시하여 늦가을의 정취를
[우리문화신문=최우성 기자] 10월 17일, 아직 가을 중반도 아닌데 첫서리가 내렸다. 가을장미도 곤드레꽃도 꼼짝없이 서리를 맞았다. 겉보기에는 흰꽃가루를 뒤집어 쓴듯하지만, 어제까지 아름답던 꽃이 하루아침에 풀이 죽었다. 가을 실종이라고 매스컴에서는 아우성이다. 올해 이상기후로 10월부터 겨울?인가 걱정이 앞선다. 강원도 홍천 구성포리에서.
[우리문화신문=최우성 기자] 동해시에 있는 천년고찰 삼화사 입구에는 계곡 옆으로 데크길이 놓여있어 물소리를 들으며 삼화사로 갈 수 있다. 무릉계곡으로 잘 알려진 삼화사 입구의 계곡에는 '무릉계곡 캠핑장'도 있는데 이곳의 데크길을 이용하다보면 특이한 광경을 볼 수 있다. 데크길을 만들며 보호한 소나무들의 모습이다. 소나무가 먼저 있었고 데크길을 나중에 만든 것이므로 공사의 편리성을 고려한다면 그깟(?) 소나무쯤 베어버리고 데크길을 만들었을 법도 한데 이곳은 다르다. 데크길 가운데 그대로 살려둔 소나무 모습을 보면서 데크 작업을 한 사람들의 세심한 마음이 느껴져 훈훈하다. 자연을 사랑하는 사람들이 각종 시설물을 만든다면 삼화사에 이르는 데크길과 같은 모습을 곳곳에서 볼 수 있을 것 같다. 사실 삼화사에서 봉행하기로한 '국가무형문화재 제125호 삼화사 국행수륙대재(國行水陸大齋)' 를 보러 갔는데 (10월 15일~17일 예정) 우천예보로 10월 22일~24일로 연기되었다고 해서 발길을 돌렸지만 내려 오는 길에 만난 데크길의 '소나무 보존' 모습이 아름다워 흐믓했다.
[우리문화신문=최우성 기자] 서울 봉은사에서는 지난 11일 저녁 산사음악회에 이어 13일과 14일 대웅전 앞 특설무대 등에서 전통방식으로 봉행되는 생전예수재(生前豫修齋)를 봉행했다. 서울시 무형문화재 52호인 봉은사 생전예수재는 살아있는 동안 공덕을 미리 닦아 사후 고통의 세계에 떨어지지 않고 극락왕생하길 발원하는 대표적 불교의식의 하나이다. 생로병사(生老病死)! 이 땅에 태어난 모든 존재는 일정기간 머물다 소멸된다. 붓다는 일체존재의 법성은 평등하다고 가르치지만 깨닫지 못한 존재들은 평등한 자성의 본질을 저버리고 각자의 안목과 습관에 따라 살아간다. 이러한 행위를 불교에서는 업(業)이라고 한다. 오늘의 모습은 어제 지은 업이요, 내일의 모습은 오늘 짓는 업의 결과다. 이것을 불교에서는 인과법칙이라하고 이 순환을 윤회라고 한다. 다른 말로는 사바세계, 감인(堪忍)세계, 고해(苦海)라고 한다. 감인(堪忍)세계란 참고 견디며 살아가는 세계요, 고해란 고통이 가득한 세상을 일컫는다. 부처는 이처럼 고통 속에 살아가는 사람들이 고통으로부터 벗어나서 해탈 열반의 세계로 이르도록 가르친다. 하지만 탐욕으로 가득한 인간의 견고한 아집을 깨기 어렵다. 이에 대승불교 시대에
[우리문화신문=최우성 기자] 한국의 전통건축문화는 돌과 나무 그리고 흙으로 이루어져있다. 건축물의 주 재료는 건물의 구조적 형태를 이루는 나무이지만, 이와 더불어 돌과 흙을 보조재로 사용하였다. 돌은 흙과 직접 닿는 부분에 쓰여져 기둥인 나무가 흙과 직접 닿지 않도록 하여 기둥뿌리가 썩지 않게 하는 역할로 사용하였고, 흙은 물을 넣어 비벼서 방바닥을 채워, 바닥을 평평하게 하거나, 기둥의 나무와 나무사이를 칸으로 나누어 막아 외부와 구분하고, 방을 만드는데 사용하였다. 그런데 흙은 토기그릇을 만들 듯 일정한 모양으로 틀에 채워 다져 모양을 만들어 말린 뒤, 가마속에 넣어 고온의 불에 구워서 강도를 높여 기와를 만들었다. 이렇게 만든 기와는 돌처럼 굳어져 빗물이 지붕아래로 스며들지 않게 지붕 위에 겹쳐 이어서, 비바람이 들이쳐도 지붕 위에 떨어진 빗물은 집안으로 들어오지 않게 함으로써 나무로 된 건축물을 보호하였다. 지붕 위에 얹은 기와가 깨지면 그집은 곧 빗물에 나무가 썩어서 주저앉게 된다. 흙을 빚어 만든 기와는 1,100℃가 넘는 고온에 구워서 만든 것을 사용하는데 1,100℃이하의 온도로 기와를 구우면 기와가 물기를 흡수하게 되어 쉽게 깨짐으로 지붕을
[우리문화신문=최우성 기자] 강원도 양양군 현북면 하광정리 바닷가에는 언덕에는 바위와 소나무로 둘러싸인 대한민국 명승지 하조대가 있다.(명승 제68호) 그 바로 앞에는 하얀모래밭이 아름다운 하조대해수욕장이 있다. 하조대는 화강암바위와 바위틈에 자라는 휘어진 소나무를 볼 수 있는 좁은 바위에 지어진 정자를 말한다. 하조대는 조선초 개국공신인 하륜과 조준이 태종 말년에 낙향하여 휴양하던 곳으로, 하륜과 조준의 성씨를 따서 하조대(河趙臺)로 이름을 붙였다. 하륜과 조준은 조선초 국가의 헌법인 <경제육전>을 함께 편찬하기도 하였다. 하조대해수욕장은 하얀모래밭이 길게 깔려있는 바닷가로 여름이면 많은 피석객들이 즐겨찾는 곳이며, 요즈음에는 파도타기를 즐기는 젊은이들이 붐비는 곳이기도 하다. 하조대해수욕장 앞에는 오랜세월 파도와 싸우면서 살아남은 펑퍼짐한 바위가 놓여있는데 해수욕장 풍경치고는 특이한 모습이다. 하조대가 있는 주변은 분단의 현실을 느낄 수있는 군부대와 유격훈련장이 있어 '아름다운 해수욕장' 만을 즐기기에는 어딘가 마음 한구석이 편치 못하다. 언제쯤 남과 북이 통일되어 각 지역에 산재한 아름다운 명승 고적을 아무런 제한없이 두루 탐방할 수 있을런지
[우리문화신문=최우성 기자] 목포 달성사는 목포항과 일제강점기 번성하던 옛시가지 옆에 있는 목포 유일의 산인 유달산의 중턱에 자리한 사찰이다. 목포는 개항과 더불어 서양문물이 들어옴과 동시에 서양의 종교가 많이 전파되어서인지 불교신자들이 많지 않다. 또 목포는 개항과 함께 발달한 도시인 때문에 옛 고찰도 없었다. 이런 목포에 달성사는 격동의 구한말이 지나고 일제강점기 초창기인 1913년 해남의 대흥사에 있던 노대련 스님이 불심있는 목포지역의 시민들의 정신적 안식처가 될 수 있도록 창건한 사찰이다. 유달산은 비록 산이 높거나, 골이 깊은 것은 아니지만, 새롭게 문을 연 항구에 인접한 산으로, 가파른 남쪽의 중턱에 그나마 어렵게 터를 다듬어 자리하였기에, 평지의 사찰과 같이 넓은 경내를 갖지는 못하였다. 하지만, 험한 바위산의 산세를 잘 살핀 뒤 그중에서 적당한 터를 택하여, 바위를 깨내고, 골은 메꾸어 터를 잡고, 이도 모자라 주변의 돌들을 모아 축대를 쌓아 집터와 마당을 마련하였다. 이렇게 어렵게 만든 절이라, 지금처럼 유달산을 돌수 있는 찻길이 새롭게 만들어진 오늘에도, 찻길에서 절마당까지는 108돌계단을 힘들게 올라야만 오를 수 있다. 유달산은 전체가 바
[우리문화신문=최우성 기자] 전라남도 서남부 해안에 위치한 목포는 바다와 육지를 잇는 항구도시다. 육지에서 바다로 나가려면 거쳐야하고, 바다에서 육지로 가기 위해서도 거쳐야 하는 것이 항구이지만 목포는 먼 옛날부터 항구도시였던 것은 아니고, 일제강점기에 일본인들의 필요에 의하여 항구도시로 개발되었다. 옛날 우리선조들이 바다로 나갈 때 타던 배들은 배의 바닥이 평평한 평저선으로 이런 배들은 바닷가나 강가의 평평한 땅위에 내려앉을 수 있는 배였기에, 현재의 배들과는 배의 모양이 달랐다. 평저선이 정박할 수 있는 포구는 항상 물이 차있는 항구가 아니라, 모래나 뻘처럼 땅이 있는 곳으로 배들은 밀물에 들어와 내려앉아 사람과 물건을 내렸다가, 다시 밀물이 들어오면 사람과 물건을 태우고 밀물을 타고 바다로 나가는 것이 한국의 전통배였던 것이다. 그런데 개화기를 거쳐서 일제강점기에 들어선 이래 한국의 평저선이 차츰 사라지고 서양의 배들이 들어오면서 배의 바닥이 뾰족한 배는 늘 물이 차있는 곳에 접안할 수있는 시설을 갖춘 항구를 만들어야 했다. 그런 항구는 해안가라도 배의 바닥이 땅에 닿지 않는 수심이 깊은 곳이어야 했기에 일제강점기 일본인들은 한반도에 새로운 항구들을 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