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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나들이

의리와 충절의 상징 포은 정몽주선생 무덤

 

 

 

 

 

 

 

 

 

 

 

 

[우리문화신문=최우성 기자] 겨울이 끝나가는 날 잔설이 남아있는 용인시 한 야산에 고려시대 마지막 충신인 포은 정몽주 선생의 묘를 찾았다.  선생은 1337년 태어나 1392년 정적에 의하여 생을 마친 고려시대 최후의 학자로 자신의 부귀영화 보다는 당대의 의인으로 자신의 하나뿐인 목숨을 구걸하듯 살지 않고 자신이 살았던 나라를 위하여 당당히 죽었다. 나라의 운명이 바람 앞에 촛불처럼 위태로울 때 자신의 목숨을 구하고 또 협조하면 부귀영화가 보장될 수 있는 좋은 기회이기도 했으나 그는 자신이  옳다고 생각한 정의로운 삶을 살다간 것이다. 혼란의 고려말 덕망있는 학자로 조선에 참여하지 않은 3인의 유학자가 있는데 이들은 자신의 호(號)에 은(隱)을 썼기에 고려3은으로 볼리운다. 이들은 포은(圃隱) 정몽주, 목은(牧隱) 이색,  야은(冶隱) 길재가 있다.

 

정몽주선생은 고려후기 몽골간섭기에 태어나 고려 공민왕 9년(1360), 과거시험에 3회에 걸쳐 연속으로 장원급제하여 두루 관직을 역임하며 대사성문호찬성사, 벽상삼한삼중대광수문호시중 등 당시 최고위 관료가 되었으며 그 공이 커 안사공신의 휘호도 받았다. 선생은 후진양성을 위하여 오부학당을 세우고 향교를 세워 유학을 진흥하고 조선시대 꽃핀 성리학의 기초를 세우기도 하였다.

 

정몽주 선생은 조선이 창건되기 1년 전 이성계 세력이 고려왕조를 무터뜨리기 위하여 이방원(후에 조선 3대왕 태종)에게 회유를 받았다. 그러나 자신은 영원히 고려의 신하일 뿐 조선의 신하가 될 수 없다고 말하였고, 그 말 때문에 자신이 죽임을 당할 것을 알았다. 이방원은 더 이상 그를 설득할 수 없음을 알고 집으로 돌아가던 정몽주를 이방원의 수하였던 조영규를 시켜 개성의 선죽교에서 죽였다.

 

선생의 시신은 당시에는 역적으로 몰려 방치되다가 목숨의 위험을 무릅쓴 우현보와 송악산의 스님들에 의하여 수습되어, 한동안 개경의 풍덕에 가매장 되었다가  후일 용인 능원리로 이장되었다.  이후 조선이 건국되었고 조선초기 정몽주 선생은 간신으로  규정되었다. 하지만 선생의 학문은 제자 길재-김숙자-김종직을 거치며 성리학의 사림파로 이어졌고 세월이 흐른뒤에는 선생은 자신이 살아온 왕조를 위하여 죽은 충절의 표상으로 추앙받게 되었다. 역사의 정의에 절대는 없는 것이다. 한때 역적이 충신의 상징이 되었으니...

 

정몽주 선생의 문하생인 권우에게 학문을 배운 세종대왕은 정몽주선생을 성자로 인식하기까지 하였다. 이런 연유로 세종대왕은 삼강행실도의 충신편에 정몽주를 수록하였으며 선생의 무덤을 성역화하였다. 이후 선생의 학문을 따르던 사림파는 성종 이후 정계에 진출하였고 선생은 성균관 문묘에 모시게 되었다.  제자들은 고향인 영천에 임고서원을 창건하였으며 이 밖에도 전국에 13개 서원을 세워 선생을 모셨다.  임고서원이 창건되자 퇴계 이황은 제문과 상향축문을 지어 정몽주 선생의 학문과 충절을 찬양하였다. 후일 임고서원에서는 정몽주 선생의 문집인 《포은집》을 펴냈다. 

 

이방원이 조선창건을 위하여 도와달라는 회유의 하여가를 받고,  정몽주 선생은 그 뜻에 따를 수없음을  단심가로 답하였다.

 

정몽주를 회유하기 위하여 이방원(태종)은 다음과 같이 시조를 읇었다.

 

이런들 어떠하며 저런들 어떠하리
만수산 드렁칡이 얽어진들 어떠하리
우리도 이같이 얽어져 백년까지 누리리라.

                                 -이방원의 하여가-

 

어지러운 세상살이에 우리함께 어울려 벼슬도하면서 잘 살면 좋지않겠느냐며 회유하였다. 

이에 대해 정몽주선생은 “사랑하는 님을 버리고는 도저히 살 수없다”며 단심가로 답하였다.

 

이몸이 죽고 죽어 일 백 번 고쳐죽어         

백골이 진토되어 넋이라도 있건 없건

임향한 일편단심이야 가실줄이 있으랴? 

                           -정몽주의 단심가-

 

정몽주 선생의 무덤은 경기도 용인시 처인구 모현면 능곡로 45번에 있다.

 

 

기자정보

프로필 사진
최우성 기자

최우성 (건축사.문화재수리기술자. 한겨레건축사사무소 대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