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문화신문=김영조 기자] 대흥사(大興寺)가는 길 반세기 전 비바람 속 갔던 길 (돌) 일지암 바라며 옛 생각하네 (달) 차 한잔 속 담겨있던 깨달음 (초) 선차보다 초의 차맥 이었네 (심) ... 24.12.31.불한시사 합작시 이 시는 불한시사 시벗 다섯 사람이 남도 여행 중 해남 대흥사로 들어가는 숲길 한 주막에서 점심을 하며 함께 읊은 합작시이다. 오래전 비바람 속에 이 길을 찾았던 기억을 떠올리며 다시 걷는 길 위에서 발구하고 각자가 한 구절씩 보탰다. 남도의 산길과 세월의 기억, 그리고 차향(茶香)이 겹치는 자리에서 자연스럽게 이루어진 즉흥의 시편이다. 승구(둘째 줄)의 '일지암(一枝庵)'은 조선 후기의 선승이자 차인인 초의선사(草衣禪師)가 머물며 차를 달이고 사유를 펼치던 암자다. 대흥사 뒤편 산자락의 작은 암자지만 조선 차문화가 다시 살아난 중요한 공간으로 알려져 있다. 초의는 이곳에서 차의 이치를 정리한 글을 남기고, 다산(茶山)과 추사(秋史)는 물론 당대 한양의 여러 문인과 교유하며 차의 정신을 널리 전하였다. 특히 남도 차문화의 흐름을 말할 때 다산 정약용과의 인연을 빼놓기 어렵다. 강진 유배 시절의 다산은 인근 절의 승려들과 교유하며
[우리문화신문=김영조 기자] 무념무상(無念無想) 말 잊고 생각 없이 바라보네 (달) 염에 이르러 염을 다한 마음 (돌) 이제 아쉬움 다 없어졌느니 (빛) 지금 여기 이미 갖춰진 자리 (초) ... 25.2.10. 불한시사 합작시 옥광 시벗이 산책길에서 보내온 구절에서 합작시의 초구(初句)로 삼았다. 그의 “말을 잊고 생각을 일으키지 않고 바라보네. 이것!”은 단순한 정경 묘사가 아니다. 그는 언어 이전, 사유 이전의 자리에서 세계를 마주한 체험을 건네주었다. ‘말을 잊는다’라는 것은 분별의 언어를 거두는 일이며, ‘생각을 일으키지 않는다’라는 것은 개념의 그림자를 거두는 일이다. 그리하여 남는 것은 대상도 관념도 아닌, 지금 여기에서 스스로 드러나는 ‘이것’의 현전이다. 그가 말한 누구에게나 해당하는 '이것'은 멀리 있는 초월적 대상이 아니라, 각자가 지금 이 자리에서 마주하는 생생한 현존이다. ‘이것’은 주관적 심상도 객관적 사물도 아니다. 마음과 사물이 나뉘기 이전, 곧 심물합일(心物合一)의 장에서 드러나는 일물(一物)이다. 철학자 하이데거(Martin Heidegger)가 말한 “Es spricht(그것이 말한다)”의 ‘그것’ 또한 존재의 드러남을 가리
[우리문화신문=김영조 기자] 눈 길 눈 위에 남긴 까마귀 발자국 (돌) 흰 눈 맞으며 무얼 찾고 있나 (달) 분별없는 바탕 자리 가는 길 (초) 흰 종이에 글 쓰듯 함 없는 함 (심) ... 25.2.6. 불한시사 합작시 눈 위에 남긴 까마귀 발자국은 잠시의 흔적이다. 한 번의 날갯짓, 한 번의 디딤이 남긴 자국은 찰나의 존재 증명처럼 보이지만, 해가 기울고 기온이 오르면 이내 스스로 자취를 지운다. 발자국은 ‘있음’이면서 동시에 ‘사라짐’의 예고이며, 남김이 곧 소멸로 향하는 길임을 드러낸다. 서산대사의 ‘답설(踏雪)’ 선시가 일러주듯, 눈 위를 밟고 간 자는 발자국을 남기되 마음에는 남기지 않는다. 흔적은 생기나 집착은 두지 않는 것, 이것이 ‘설중보행(雪中步行)’의 수행적 태도다. 눈은 더러운 지표를 가리지 않고 덮는다. 얼어붙은 산하와 혼탁한 세상 위에 내리는 흰 눈은 미화가 아니라 ‘일시적 평준화’다. 덮음은 곧 드러냄의 다른 얼굴이다. 잠시 고요를 주지만, 그 고요는 해빙과 함께 본래의 결을 다시 드러낸다. 그러므로 눈은 정화의 상징이면서도 무상(無常)의 표식이다. 씻김은 지속되지 않으며, 맑음은 붙잡을 수 없다. 비행기 창밖으로 보던 설경—발해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