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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지원의 우리문화책방

조선 며느리, 염문에 휩싸이다

《조선 왕가 며느리 스캔들》, 이경채, 현문미디어

[우리문화신문=우지원 기자]  

 

(p.11)

내시 이만을 목 베고, 세자의 현빈 유씨를 내쫓았다.

                                                ㅡ태조 2년(1393) 6월 19일

 

명절 연휴가 끝나는 막바지, 가족 사이는 더 멀어지기도, 더 가까워지기도 한다. 오랜만에 만난 가족 사이는 반갑기도 하지만 긴장도 흐른다. 늘 편하지만은 않고, 가까운 만큼 더 큰 파괴력을 가진 사이가 가족관계다.

 

가족 사이에 갈등이 일어나는 모습은 조선 왕실에서도 크게 다르지 않았다. 특히 세자와 사이가 좋지 못한 며느리 문제로 속을 끓일 때가 많았다. 이경채가 쓴 이 책, 《조선왕가 며느리 스캔들》에서는 한 집안의 며느리였던 조선 여성들이 여러 가지 음행으로 구설에 오른 이야기를 다룬다.

 

 

태조 이성계의 세자빈이었던 현빈 유씨의 일탈부터, ‘성군 세종에게 치욕을 안겨준 두 맏며느리’, ‘중의 아이를 낳은 경녕군의 셋째며느리’, ‘효령대군의 손부 어우동 사건의 진실' 등으로 구성되어 엄격한 유교사회에 가려진 솔직한 민낯을 보여준다.

 

이들의 일탈은 조선사회에서 여성에 대한 지나친 억압에 대한 반작용의 측면도 있었다. 그러나 특히 법도가 지엄했던 궁중에서, 차기 국모가 될 세자빈들의 일탈은 오늘날의 기준으로 보아도 묵과하기 어려운 수준이었다.

 

그 가운데 태조 이성계의 며느리 현빈 유씨가 저지른 일은 조선이 아직 개국한 지 얼마 되지 않아 기반이 취약하던 시절, 대규모 민심 이반을 불러올 수 있는 큰 사건이었다. 태조 이성계의 막내아들 방석의 부인이던 그녀는 남편이 세자가 되면서 정1품 현빈으로 책봉되어 궁궐로 들어왔다.

 

차기 국모라는 위상에 걸맞게 한층 격상된 대우를 받았지만, 세자 책봉에 불만을 품은 남편의 형제 부부들과는 왕래가 끊겼고, 종일 왕세자 수업을 받아야 하는 남편 방석도 얼굴 보기가 쉽지 않았다.

 

마음 붙일 곳이 없어진 그녀는 내시 이만과 부적절한 관계에 빠지고 말았다. 당시만 해도 내시는 어렸을 때 성기능을 상실한 뒤로 ‘되살이’라 하여 성기능이 정상으로 복구되는 경우가 있었는데, 이만도 그런 내시 가운데 한 명이었다.

 

둘의 관계가 들통나자, 방석의 어머니인 신덕왕후는 엄청난 충격을 받았다. 권문세족의 딸로 태어나 ‘무결점 인생’을 살았던 그녀에게 며느리의 일탈은 용납할 수 없는 일이었다. 결국 이 사건이 일어난 지 몇 년 지나지 않아 병석에 누워 마흔하나의 젊은 나이에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p.75)

1393년 6월 19일 새벽, 은밀히 내시부사를 시켜 이만을 궁궐 밖에서 참수하고 현빈 유씨도 친정으로 내쫓았다. 그리고 궐내의 모든 내시와 궁녀들에게 세자빈의 사통 사건을 철저히 함구하도록 했다. 태조가 세자빈의 사통 사건을 철저히 숨기려 한 것은 아직 국가체제도 정비되지 않은 데다 고려를 그리워하는 백성들이 많았기 때문이었다. 또 공식들과 대신들 중에도 막내 방석을 세자로 책봉한 것에 대한 불만세력이 존재하는 마당에 세자빈과 내시의 사통 사실이 알려지면 갓 세운 나라를 뒤흔드는 파문으로 이어질 수 있다고 여겼던 것이다.

 

그러나 무조건 숨긴다고 숨겨질 일은 아니어서, 1393년 6월 21일, 관리들이 연합해 세자빈이 폐출된 이유를 알려달라는 상소를 올렸다. 태조는 상소를 주도한 관리들을 모두 옥에 가두며 강경하게 맞섰고, 워낙 태조가 불같이 화를 내며 대응하자 관리들이 물러서며 사건은 일단락되었다.

 

그 뒤로 세자 방석은 다시 심효생의 딸을 세자빈으로 맞았다. 세간에는 여전히 친정으로 갑자기 쫓겨 간 현빈 유씨의 풍문이 파다하게 퍼져있어, 세자빈 심씨는 혼례식도 치르지 못한 채 3년 뒤에야 현빈으로 책봉될 수 있었다.

 

한 나라를 새로 세울 만큼 강건한 군주였던 이성계도 자식 문제는 마음대로 되지 않았다. 1차, 2차 왕자와 난과 세자빈의 일탈까지 겹쳤으니, 권력이 높았던 만큼 그림자도 짙었던 셈이다.

 

조선에서 폐위된 첫 세자빈이 된 현빈 유씨에 이어, 세종 역시 세자빈 두 명을 연달아 폐위하면서 ‘며느리 복’이 없는 인물이 되었다. 물론 세자빈들이 이렇게 부적절한 관계에 빠져든 것에는 배우자에게 무관심했던 세자의 잘못도 있었다.

 

이 책은 굳이 며느리에 방점을 두기보다는, 엄격한 유교 사상이 지배했던 조선 사회에서 반작용처럼 튀어나온 일탈을 재조명하는 쪽에 가깝다. 이 책에서 보는 것처럼, 과부의 재혼을 허용하지 않는 등 자연스러운 인간 정서를 이념으로 과도하게 억압하는 사회 분위기 탓에 생긴 폐단도 상당했다.

 

이 책은 ‘엄격하고, 진지하고, 근엄했을 것’만 같은 조선 사회에 파문을 일으킨 각종 사건을 보여주다 보니 흥미롭고 몰입감이 있다. 지나치게 염문 위주로 서술하기보다, 사료를 바탕으로 일정한 깊이도 갖춘 점도 장점이다. 한 번쯤 솔직한 조선 사회를 보고 싶은 독자에게 일독을 권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