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문화신문=이윤옥 기자] 조선신궁 낙성식때 참석한 뒤 “화려했지만 왠지 쓸쓸한 모습” 이라고 낙성식 참석 소감을 촌평한 신도학자(神道学者) 오가사와라 쇼조(小笠原省三, 1892~1970)는 “일본 신사지만 조선신(단군)을 모셔야한다”고 주장한 사람이다. 일본신사에 단군을 모셔야한다는 주장은 언뜻 보면 조선을 위하는 것 같지만 사실 내용면에서는 맞지 않는 이야기다. 조선의 조상인 단군을 모시려면 단군사당을 지어서 모셔야하는 것이지 왜 일본신사를 지어 단군을 모셔야한다고 주장한 것일까? 이러한 사실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먼저 일선동조론(日鮮同祖論)을 이해해야 할 것이다. 이는 한마디로 '일본과 조선의 조상이 같다’라는 이론으로 기다 사다기치(喜田貞吉, 1871~1939) 같은 학자는 〈일선양민족동원론〉이라는 논문을 통해 일본과 조선 두 민족은 유물·언어·신화·풍습 등 다방면에서 같다고 주장하기에 이른다. 그 밑바닥 정서는 일제의 조선식민화를 합리화하기 위한 것임은 삼척동자도 다 아는 사실이다. 그럼에도 일선동조론은 3·1운동 이후 내선일체라는 구호를 통해 정책적으로 한층 심화되었으며, 만주사변 이후 한국인에게 강요된 창씨개명 등의 황국신민화 정책과 민족말살정책
[우리문화신문=이윤옥 기자] 1925년(대정14년) 10월 15일, 하늘은 맑았다. 일제는 경기도 경성부(당시 표기, 지금의 서울) 남산에 천조대신과 명치왕을 제신으로 하는 '관폐대사 조선신궁(官幣大社 朝鮮神宮)'의 진좌제(鎭坐祭)를 봉행했다. 진좌제란 신사(神社)에서 건물을 지어 영령께 고하는 의식을 말한다. 이날 아침 10시 10분, 의장대가 연주하는 국가의 진혼이라는 음악에 맞춰 다카마츠 시로 궁사(宮司) 이하 제원(祭員)들과 참례자 대표인 이왕가의 이강공(李岡 公)을 비롯하여 조선총독 사이토 마코토 부부, 각국 영사, 총독부 고위관료, 사단장 이하 군인, 은행가, 실업가 등이 대례복 또는 정장 차림으로 3,500여명이 모여 신전에 납폐와 공물을 올리며 진좌제를 열었다. 그런데 흥미로운 것은 이날 진좌제에 참석했던 신도학자(神道学者)인 오가사와라 쇼조(小笠原省三, 1892~1970)의 참배 소감이다. 오가사와라는 진좌제 참배 소감을 다음과 같이 말했다. “왠지 그림책을 펼쳐 놓은 듯한 풍경이었으나 어딘가 쓸쓸한 느낌이 들었고 부족함이 느껴졌다” 이에 대해 스가 코우지(菅浩二) 씨는 그의 저서 《일본 통치하의 해외신사》에서, 오가사와라를 다음과 같이 평했
[우리문화신문=이윤옥 기자] “인생에서 88살이 가장 좋은 때다.” 라면서 99수를 누리다가 지난 11일 입적한 일본의 비구니 스님 세토우치 자쿠초(瀬戸内寂聴)! 서점 어딜 가나 세토우치 자쿠초 스님의 책들은 진열대 가장 앞줄에 놓이곤 했다. 심지어는 나리타공항이나 간사이공항 내의 기념품 겸 서점 코너에서도 쉽게 만날 수 있어 나 역시 가끔 세토우치 스님의 책을 사서 읽었다. 그의 책은 읽기 쉽고, 읽는 순간 고개가 끄떡여진다. 자신도 모르게 마음이 편안해지고 입가에 미소가 떠오른다. 그의 웃는 모습은 해맑다. 해맑다고 밖에는 달리 표현할 수 없을 만큼 편안하다. 화나는 일이 있어도 금새 기분이 좋아질 만큼 밝은 기운을 선사한다. “현대 여성의 삶을 그린 소설로 인기를 끌어 반전·평화를 호소하는 사회 활동에도 정력적이었던 작가이자 승려, 문화 훈장 수상자인 세토우치 자쿠초(瀬戸内寂聴)씨가 9일, 심부전으로 사망했다. 99살이었다. 토쿠시마시 태생, 이름은 하루미로 불렸다. 도쿄 여자대학 재학 중에 결혼해, 졸업 후에는 남편의 근무처였던 북경으로 건너갔으며, 패전으로 1946년에 귀국, 이후 남편의 옛 제자와 사랑에 빠져 어린 외동딸을 남겨두고 교토로 옮겨 살
[우리문화신문=이윤옥 기자] 126년 전인 1895년 10월 8일, 조선의 국모인 ‘명성황후 시해사건’과 관련된 편지가 일본에서 발견되었다고 11월 16일치 아사히신문이 크게 보도했다. 이날 공개된 편지는 단순한 시해사건 내용이 아니라, ‘자신들이 궁궐에 들어가 명성황후를 시해했다’는 자백의 편지라 더욱 큰 충격을 주고 있다. ‘자신들이 왕비를 죽였다’고 자백한 사람은 당시 조선의 영사관보였던 호리구치 구마이치(1865~1945)다. 이번에 발견된 편지는 호리구치가 자신의 고향인 니가타현 나카도리무라(현 나가오카시)에 사는 친한 친구이자 한학자인 타케이시 사다마츠에게 1894년 11월 17일자로부터 사건 직후인 1895년 10월 18일자까지 보낸 8통의 편지다. 이 편지 가운데 여섯 번째가 명성황후 시해 다음 날인 1895년 10월 9일자다. 이 편지에는 사건 현장에 대한 자세한 내용이 기록되어 있는데 ‘진입은 내가 맡았다. 궁궐 담장을 넘어 황후침전에서 왕비를 시해했다’ 라고 하면서 '생각보다 시해가 간단해 매우 놀랐다'라는 느낌까지 적고 있다. 편지에서 밝힌 이른바 ‘왕비 시해 그룹’은 일본 외교관, 경찰, 민간인 등이었다고 아사히신문은 전했다. 이 편지
[우리문화신문=이윤옥 기자] 11월, 일본의 전통 행사인 ‘시치고상(七五三)’ 풍습을 볼 수 있는 달이다. 예전에는 11월 15일에 ‘시치고상(七五三)’ 행사를 했으나 요즈음은 ‘10월부터 11월 사이에 형편이 좋은 날’을 잡아 행사를 치르는 이들이 많다. 시치고상이란 무엇인가? 한마디로 일본 어린이들을 위한 신사참배 날이라고 보면 된다. 일본에는 한국 아이들처럼 돌잔치가 없다. 그 대신 시치고상을 신사에 가서 치른다. 말 그대로 3살, 5살,7살을 맞이한 아이들에게 전통 옷을 입혀 신사 참배를 시킨다. 이 무렵이 되면 시치고상을 위해 어린아이들에게 입힐 기모노를 파는 가게, 머리 손질을 해주는 미용실, 가족사진을 찍어주는 사진관 등이 분주해진다. 시치고상은 남자아이의 경우 3살과 5살 때 여자아이는 3살과 7살이 되는 해에 치룬다. 이러한 풍습은 어린아이들의 건강과 무병장수를 비는 일생의 통과의례 행사인 것이다. 유래는 1681년 도쿠가와 집안의 5대 장군인 도쿠가와 츠나요시(川綱吉)의 장남 도쿠가와 도쿠마츠(川松)의 건강을 빌기 위해 비롯되었다고 하는 설이 있다. 신사에서 시치고상 의식을 치른 아이들은 손에 ‘치토세아메(千歲飴)’를 하나씩 받아 드는데 이
[우리문화신문=이윤옥 기자] 울긋불긋 단풍의 계절이 찾아왔다. 단풍이라 하면 일본도 그 어디에 뒤지지 않을 만큼 명소가 많다. 그러다 보니 이맘때면 앞다투어 단풍 명소를 소개하는 인터넷 사이트가 많다. 코요 월커 플러스(koyo.walkerplus)의 경우에는 단풍명소를 다양하게 소개하고 있는데 1)지역 중심으로 찾기 2)전국 단풍 랭킹으로 찾기 3)지금 가장 볼만한 명소로 찾기 4) 가까운 시일내에 볼만한 곳으로 찾기 5) 지난해 11월, 아름다웠던 곳으로 찾기 등으로 나눠 소개하고 있다. 여기서는 ‘전국단풍명소랭킹’을 중심으로 살펴보겠다. 랭킹 1위는 도쿄 다치가와시(立川市)에 자리하고 있는 국영소화기념공원(国営昭和記念公園)이다. 이 공원은 소화(昭和)왕 재위 중인 1983년에 설립한 공원으로 ‘보고, 놀고, 먹고, 체험할 수 있는 공간으로 꾸몄으며 4계절 꽃과 나무를 감상할 수 있다. 공원 안에는 소화천황기념관도 조성되어 있다. 2위는 기후현 다카야마시(岐阜県高山市)에 있는 히다미노개울가도(飛騨美濃せせらぎ街道)이다. 히다미노지역은 64km 길이의 드라이브 코스로 참나무, 너도밤나무, 낙엽송 등 활엽수가 황금색으로 변하는 광경을 보려고 많은 사람들이 몰려
[우리문화신문=이윤옥 기자] 일본과 한국의 문화는 비슷하면서도 다른 것들이 많은데 그 가운데 인상 깊은 것 하나를 들라하면 ‘결혼한 여성이 남성의 성을 따르는 법 제도’이다. 일본은 예컨대 다나카(田中) 성씨의 여성이 나카무라(中村) 성씨의 남성과 결혼을 하면 나카무라(中村)로 바꾸는 제도를 고수하고 있다. 물론 자녀가 태어나면 남편의 성씨를 따른다. 그러니까 남편의 성씨를 부인과 아이들이 고스란히 따르고 있는 것이다. 한국의 경우에는 김(金)씨 성의 여성이 이(李)씨 성의 남성과 결혼하더라도 성씨는 변하지 않는다. 일본인들이 볼 때 이러한 한국 여성들의 ‘고유 성씨 유지’가 어떻게 비쳐질까 하는 궁금증이 일었던 적이 있다. 그 해답은 오래지 않아 풀렸다. 꽤 오래된 일이지만 일본에 있을 때 이름하여 ‘부부별성제도(夫婦別姓制度)’라는 주제의 티브이 토론을 종종 목격한 적이 있다. 부부별성제도를 찬성하는 쪽에서는 “결혼 전까지 사용하던 성씨를 남편 성으로 바꿈으로써 야기되는 불편함이 한두 가지가 아니다. 이웃나라인 한국 여성들은 부부가 각각의 성씨를 쓰지 않는가?” 라는 주장을 하고 있고, 반대하는 쪽에서는 “부부가 각각의 성씨를 쓰면 가족 구성원 간의 결속감
[우리문화신문=이윤옥 기자] 아사히신문에서는 지난 9월 6일부터 10일까지 모두 5회에 걸쳐 한국관련 기사를 연재했다. 그 주제는 '이웃나라의 언어' 였다. 글의 제목은 다음과 같다. 제1회: 조선어인가 한국어인가 요동쳤던 강좌명 (2021.9.6.) 제2회:현장에서, 50년전 결심하고 배운 시민 (2021.9.7.) 제3회:현장에서, 일본과 한국을 연결한 두명의 시인(2021.9.8.) 제4회:현장에서, 괴롭고 씁쓸한 모국어의 추억 (2021.9.9.) 제5회:현장에서, K pop에 빠진 젊은이들 (2021.9.10) '이웃나라의 언어'라는 것은 곧 한국어를 가리킨다. 그럼에도 일본에서는 '한국어'라고 맘대로 부르기가 어렵다. '한국'이라는 이미지는 대한민국만을 가리키는 것으로, '한국어'에는 북한이 포함되지 않는다. 일본에서 북한어는 어디까지나 '조선어'다. 남과북으로 갈리다보니 이런 일이 생긴 것이다. 그럼에도 아사히신문에서는 5회나 걸쳐 지면을 할애하여 '한국어(조선어)'를 다뤘다. 그것은 단순한 언어만이 아닌 것으로 언어를 매개로한 '인물, 문화,역사' 등을 두루 다루고 있다는 점에 의의가 깊다. 오늘은 제5회 연재분을 소개하겠다. 그런데 오늘 소개
[우리문화신문=이윤옥 기자] 교보문고라든지 영풍문고 같은 오프라인 서점엘 가면 외국어 코너가 있어서 다양한 학습 교재를 고를 수 있다. 가장 큰 시장이라고 하면 당연히 영어일 것이다. 그 다음은? 글쎄다. 일본어나 중국어? 아무래도 이웃나라인 이 두 나라 언어가 2,3위 자리를 다툼하지 않을까? 그렇다면 일본의 경우는 어떠할까? 9월 6일치 아사히신문에 따르면 일본 서점에서 1위는 영어이고 그 다음이 ‘한국 · 조선어’ 코너라고 한다. 중국어가 아니라 ‘한국 · 조선어’ 라는 사실이 흥미롭다. 그런데 여기서 잠깐, 한국어면 한국어지 ‘한국 · 조선어’는 뭐야? 라고 의아스럽게 생각할 독자들이 있을 것 같아 부연 설명을 하겠다. 안타깝게도 남과 북이 분단되어 남쪽은 국호가 대한민국이고, 북한은 국호가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이다. 이러한 이름을 각기 갖고 있지만 남한(대한민국) 사람들은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이라고 부르기 보다는 ‘북한’이라고 흔히 부른다. 분단 이전에는 원래 한겨레요, 언어도 같은 언어 공동체였다. 그러나 분단이 길어지면서 언어의 이질화도 생겨 ‘북한말’, ‘남한말’이라는 표현을 할 정도인데 그 보다도 문제가 되는 것은 남한과 북한이 함께 쓰는 말
[우리문화신문=이윤옥 기자] 황족(皇族)으로 산다는 것은 행복한 일일까? 아니면 불행한 일일까? 지금 이웃나라 일본에서는 황족 출신의 마코(眞子, 30) 공주 결혼을 앞두고 연일 뜨거운 관심을 보이고 있다. 결혼 상대자는 고무로 케이(小室圭. 30) 씨로 이들은 10월 26일 결혼을 앞두고 있다. 마코 공주는 나루히토 일왕의 조카로 이들의 결혼에 대해 일본 국민은 매우 부정적인 반응이다. 마코 공주는 지난 2017년 9월, 대학 동창인 고무로 케이 씨와 약혼을 발표한 바 있다. 그러나 약혼 발표 이후 주간지 등에서 약혼자인 고무로 케이 씨의 어머니가 돈 문제로 시끄럽다고 보도되면서 두 사람의 관계를 부정적인 시각으로 몰아갔다. 일부 언론에서는 약혼자인 고무로 케이 씨가 마코 공주의 일시금(여성 황족에게 주는 왕실 세금)을 노리고 접근했다는 의혹을 제기하기도 했다. 이에 마코 공주는 일시금을 받지 않겠다는 뜻을 밝히기도 했다. 그리고 4년이 지난 9월 27일, 약혼자 고무로 케이 씨가 미국에서 귀국했다. 그는 올해 7월, 미국 뉴욕주에서 사법시험을 치렀고 합격이 예상되어 뉴욕주의 법률 사무소에서 취직이 정해졌다고 한다. 이제 마코 공주와 결혼하여 미국으로 가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