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문화신문=김영조 푸른솔겨레문화연구소장] 김광균 시인은 “설야(雪夜)”라는 시에서 눈이 오는 정경을 “이는 어느 잃어진 추억의 조각이기에 싸늘한 추회(追悔) 이리 가쁘게 설레이느뇨.”라고 읊조립니다. 하지만 겨울이라는 12월 그것도 대설도 지났지만, 눈이 올 기미는 없고 오히려 어제는 곳곳에 비가 추적추적 내렸습니다. 심지어 스키장에는 호우특보가 내리기도 해 편의점 앞에 비옷이 깔렸고, 스키장 운영자와 스키를 타러 갔던 사람들이 울상을 지었다고 합니다. “조강에 나아갔다. 임금이 이르기를, ‘요사이 보건대, 일기가 점점 온화해지고 또한 눈이 내리지 않는다. 기도하는 것을 꼭 숭상하여 믿을 수는 없지만, 기설제(祈雪祭)를 또한 지내야 하겠다. 겨울철에 비와 눈이 많이 와야 땅이 흠뻑 젖어, 내년 봄농사가 가망이 있는 법이다.’ 하였다.” 중종실록 26권, 중종 11년(1516) 10월 17일 기록으로 중종 임금이 눈이 내리지 않으니, 기설제를 지내야겠다고 합니다. 그런가 하면 헌종 2년(1836) 12월 12일에는 기설제를 지냈다는 기록도 있습니다. 《조선왕조실록》에는 제설제란 말이 모두 41번이나 나오는데 눈이 와야 할 시기에 눈이 오지 않는 것도 천재라
[우리문화신문=서한범 단국대 명예교수] 계면조의 느낌은 어두운 단조(短調) 음계에 비교된다는 이야기와 함께 원래 계면(界面)이란 말은 눈물을 흘려 얼굴에 금이 그어지기에 붙여진 명칭이라고 했다. 특히 슬픈 대목이 많은 <심청가>는 사설의 전개 과정이나 가락의 진행 속에서 계면 소리임이 확인된다. 6~7살 된 심청이가 “내일부터 자신이 밥을 빌어 아버지를 공양하겠다”라는 대목이나 ”고맙기는 하나 그런 말은 당초에 말라.”라고 제지하는 부녀 사이 대화가 우리의 가슴을 뭉클하게 하고, 감동을 주고 있다는 내용을 소개하였다. 그 뒤로 슬픔을 느끼게 하는 계면의 소리는 지속해서 이어지고 있다. 심봉사가 “그런 말은 당초에 말라”고 해서 주저앉을 심청이는 애초에 아니었다. 아버지 앞에“말 못 하는 가마귀도 공림(空林)의 저물어진 날에 반포지은(反哺之恩)을 허옵난 듸, 하물며 사람이야 일러 무엇 허오리까?”라는 대목이 또한 감동적이다. 까마귀가 새끼를 위해 열심히 먹이를 물어다 주어 성장을 돕지만, 이제 새끼가 자라나면 먹을 것을 구하다가 늙은 어미에게 되돌려 보답한다는 말이다. 부모에게 불효하는 못된 인간들에게 회초리를 들고 가르치는 것과 무엇이 다르겠는가!
[우리문화신문=서한범 단국대 명예교수] 박유전의 강산제 <심청가>는 이날치를 통해 김채만-박동실-한애순에게 전승된 계보와 정재근을 통해 정응민이 이어받았고 정권진, 성우향, 성창순, 조상현 등에게 전승시킨 2종의 유파가 비교적 널리 확산하였다. 그 밖에 주상환, 전해종, 고종 때의 정창업, 최승학, 김창록, 황호통, 송만갑, 이동백 등도 심청가를 잘 불러 이름을 남기고 있다. 지난주에 이어 이번 주에도 판소리 <심청가> 가운데서 눈 대목을 골라 소개해 보도록 한다. 이미 말한 바와 같이 <심청가>는 심청 어머니의 유언 대목이나 심봉사의 통곡 대목, 또는 심청 어머니의 출상 대목들이 이어져 슬픈 분위기, 곧 계면조로 이어가는 가락이 많은 편이다. 계면조(界面調) 음악은 슬픔을 의미하고 있지만, 그 가락이 슬프다는 느낌만으로는 계면조를 설명하기 어렵다. 잠시, 계면조 음계의 이해를 돕기 위해서 어두운 단조(短調)의 음계, 곧 마이너 스케일(minor scale)의 개념을 이해할 필요가 있다. 한국의 궁중음악으로 조선조 세종임금 때, 작곡된 《종묘제례악》은 황(黃, sol)-태(太, la)-중(仲, Do)-임(林, Re)-남(南,
[우리문화신문=서한범 단국대 명예교수] 지난주 이야기는 성창순 명창이 숨을 거두기 전, 마지막 유언으로 “신의(信義)있게 살거라”라는 말이었다는 이야기, 2016년 말, 폐암이라는 진단을 받고 응급적인 조치로 폐에 구멍을 뚫고, 호스를 연결하는 조치를 했는데, 그 상황에서 소리를 한다는 말을 들으며 성창순 명창이야말로 진정으로 판소리를 사랑했고, 제자들 가르치는 일을 중요하게 생각한 사람이었다는 이야기도 하였다. 이러한 일련의 과정을 전해준 어연경은 현재 단국대 국악과와 이화여대에서 후진들을 지도해 오고 있는 한편, 박사학위 논문을 준비 중인데, 논문의 방향은 성창순 명창의 소리세계, 다시 말해 선생의 소리에 나타나 있는 특징적인 창법이라는 점에서 기대를 모으고 있다는 이야기를 하였다. 이번 주에는 판소리 <심청가> 중에서 들을 만한 대목, 곧 눈 대목들을 소개해 보기로 한다. 앞에서도 언급한 바 있거니와 현재 전해오는 소리 가운데 판소리 <심청가>는 순조 때의 김제철이나, 철종 때의 박유전이 잘 불렀다고 하는데, 그 박유전의 소리는 이날치와 정재근 등을 거쳐 오늘에 이어오고 있다. 그 한 축은 이날치를 통해 김채만-박동실-한애순에게 전
[우리문화신문=김광옥 수원대 명예교수] “백성은 나라의 근본이요 (세종 즉위년 10/3)” ‘민본(民本)’의 뜻을 지닌 원문 모두 37건 가운데 세종 8건이다. (‘민위방본(民爲邦本)’은 원문 모두 16건 가운데 세종 3건으로 가장 많다) 세종이 조선 임금 가운데 가장 많다. 성종 1건, 중종 2건, 영조, 정조 각 1건이다. 민본과 관련한 ‘민유방본(民惟邦本)’은 《세종실록》에만 14회 나오고 그 밖에 민(民)이라는 연관어도 백성을 위한 것으로 수십 건이 더 보인다. “백성은 나라의 근본이요.” (세종 즉위년 10/3) “백성이란 것은 나라의 근본이요, 백성은 먹는 것을 하늘과 같이 우러러보는 것이다.” (세종 1/2/12) ‘민본’은 조선 초기에는 많이 등장하지만 ‘민본’ 모두 37건 가운데 세종 8건, 성종 7건으로 다른 임금의 경우 미약한데 이는 민본(民本)이 중시되지 않았다기보다 다른 대체되거나 일반화했다고 보인다. 민(民)을 일컫는 ‘백성(百姓)’의 경우 세종은 166건, 성종 220건으로 조선 초에 높고 이후 후기인 영조 때 74건으로 차츰 낮아진다. 반면에 ‘서민(庶民)’은 세종 26건인데 후기 영조 때는 72건으로 많아진다. 시대가 지나며 신
[우리문화신문=서한범 단국대 명예교수] 지난주에는 34살이 된 제자, 어연경이 단국대학교 국악과에 편입학하였다는 소식을 접한 성창순 명창이 본인보다도 더 기뻐했다는 소식을 접하면서 그가 얼마나 제자들의 교육문제에도 관심이 깊었는가 하는 점을 알게 한다는 이야기, 성창순은 <국립국악고등학교> 개교 초기에도 판소리 강사로 출강하였는데, 학생들이나 교사들 대부분이 그를 환영하였으며, 글쓴이가 1983년, 단국대 국악과의 창설 학과장으로 부임할 당시에도 그를 강사로 초빙했다는 이야기 등을 하였다. 어연경은 생애 첫 판소리 완창발표회로 성창순 명창에게 배운 <심청가>를 2015년 12월, 무형문화재 전수회관에서 가진 바 있다. 스승에게 배운 소리를 다듬고 암기하여 스승 앞에서 처음부터 끝까지 불러나간 경험은 선생이 세상을 뜬 지금에 와서는 너무도 그립고 가슴 벅찼던 시간이었다고 감격의 눈물을 흘리고 있다. 그는 이 무렵부터 성창순 명창의 구음(口音)을 꾸준히 갈고 닦아 왔다고 하는데, 그러한 과정이 있었기에 악기 반주자들과 함께 무용 반주음악도 담당할 수 있었다고 한다. 스승에게 배운 소리요, 구음이어서 구음에 관한 평가도 수준 이상이다. 훗날
[우리문화신문=이윤옥 기자] “나의 아버지는 일제강점기 조선에서 일하였습니다. 화학공업 회사였는데, 회사가 사용하는 전력을 만들기 위해 중국과 조선의 국경에 있는 압록강에, 당시 제일이라고 알려진 커다란 댐(수풍댐)을 건설하고 있었습니다. 가족은 모두 일본 효고현 아시야(芦屋)에서 살았고, 아버지 혼자 현지에 파견을 나가 일하셨던 것 같습니다. 그 덕분에 우리 집은 윤택하게 살았습니다. 1945년 한국이 광복을 맞자, 아버지는 실직했고, 9인 가족의 생활은 밑바닥으로 떨어졌습니다. 1941년 태어나 일곱 형제의 막내였던 나는 철이 들면서부터 가난을 겪게 된 것입니다. 그런데 어린 마음에도 한국 사람을 지배하고 그 덕분에 집이 부유하다는 게 왠지 떳떳하지 못하다는 기분이 들었습니다.” 이 글을 쓴 사람은 일본인 하라다 교코(原田京子) 씨다. 나는 지난해(2022) 10월 하라다 교코 씨로부터 일본어로 쓴 책 《私と韓国、感謝と謝罪の旅》을 한 권 받았는데 한국어로 번역하면 <나와 한국, 감사와 사죄를 위한 여행>이라는 책이다. 하라다 교코 씨는 '조선 침략 역사를 반성하는 대표적인 일본인들의 모임'인 고려박물관(高麗博物館)의 이사장을 지냈던 분(재임기간
[우리문화신문=김영조 기자] 사리는 ‘몸’을 의미하는 산스크리트어 ‘사리라(sarira)’를 음역한 말입니다. 인도에서는 사리를 모신 탑을 예배 대상으로 여겨왔습니다. 불교가 한반도에 들어온 이래로 다양한 전각과 탑을 지어 부처를 모셨으며, 사리장엄구를 만들어 부처께 올리고 탑에 봉안했습니다. 한국은 ‘석탑의 나라’라 일컬을 만큼 석탑을 많이 만들었습니다. 그런데 석탑이 대다수지만, 벽돌을 쌓아 올린 전탑도 일부 확인되는데, 칠곡 송림사 오층전탑이 그 예입니다. 이 탑은 전탑이라는 특징 말고도 독특한 형태의 사리장엄구가 발견되어서 특히 눈길을 끕니다. 전탑에서 발견된 사리장엄구 석탑에 사리장엄구를 봉안하려면 석탑 부재의 한 부분을 파서 공간을 별도로 만들어야 합니다. 그러나 벽돌을 쌓아 만드는 전탑은 석탑과 달리 별도 공간을 파내기가 쉽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칠곡 송림사 오층전탑의 사리장엄구를 어떻게 탑 안에 모셨을까요? 1959년 탑을 해체, 수리하는 과정에서 이 비밀이 밝혀졌습니다. 2층 탑신 부분에서 거북 모양의 석함이 발견되었는데 그 안에 사리장엄구가 모셔져 있었습니다. 사리장엄구는 건물 형태의 금동제 사리기 안에 녹색 유리잔이, 그 안에 다시 녹색
[우리문화신문=이윤옥 기자] 오늘은 일본의 어린이날이다. 한국식 어린이날이 아니라 일곱살, 다섯살, 세살이 되는 어린이를 위한 날이라고 하는게 옳을 일이다. 아기가 태어나서 처음으로 맞는 생일을 한국에서는 ‘첫돌’ 이라고 한다. 처음으로 맞이하는 ‘돌(생일)’이라는 뜻이다. 이듬해부터는 ‘두돌’, ‘세돌’...따위로 말하지만 해를 거듭할수록 ‘돌’ 보다는 ‘네살’, ‘다섯살’...이런 식으로 ‘살’을 쓴다. 돌 이전에는 ‘백일(百日)’이라고 해서 태어난 지 100일을 기념하기도 하지만 ‘돌’이 일반적이다. 이웃나라 일본은 백일과 돌은 없으며, 다만 태어나는지 한 달이 되면 ‘오미야마이리(お宮参り)라고 해서 강보에 싼 아기를 안고 신사참배를 한다. 그 뒤 3살, 5살, 7살이 되는 해에 다시 신사참배를 한다. 이것을 시치고상(七五三)이라고 하는데 7살, 5살,3살 먹은 아이를 데리고 신사에 참배함으로써 무병장수를 기원하는 풍습이다. 그런데 외국인의 눈으로는 3살부터 세어서 상고시치(三五七)라고 하지 않고 거꾸로 7살을 앞세우는 것이 흥미롭다. 일곱 살, 다섯 살, 세 살짜리 어린아이가 있는 집안에서는 해마다 11월에 들어서면 어린이를 위한 ‘시치고상(七五三)’
[우리문화신문=서한범 단국대 명예교수] 지난주에는 성창순 명창이 뇌졸중 초기라는 진단을 받게 되었는데도 제자들과 약속된 수업일시나 공연 일정, 그리고 공부의 시간은 철저하게 지키고자 노력한 사범이었다는 점, 어연경은 선생의 병원 출입이 잦았던 관계로 선생의 주민번호를 아직도 정확하게 암기하고 있다는 점, 병원을 다녀온 스승은 곧 제자들과 소리공부를 한다는 점, 이와 함께 제자들의 대학 진학이나 그들의 성장에 특히 관심이 많았다는 이야기 등을 하였다. 앞에서도 잠시 말한 바 있지만, 어연경은 그의 스승, 성창순 명창의 병원 출입이 잦아지게 되면서 자연스럽게 동행하게 되었고, 이 과정에서 스승의 주민번호를 정확하게 암기하게 되었다고 한다. 우리가 병원에 가게 되면, 환자의 이름, 주소, 전화번호, 주민번호 등을 확인하게 되는데, 어연경은 스승의 주민번호를 확실하게 암기하고 있었기에 각종 서류 작성이 쉬웠다고 한다. 일반적으로 본인의 번호는 기억한다고 해도 가족의 번호를 모르는 사람이 태반이기 마련인데, 어연경이 스승 성창순 명창의 주민번호를 확실하게 기억한다는 사실은 이들의 관계가 보통이 아님을 알게 만든다. 2003년, 그의 스승, 성창순 명창이 뇌졸증 초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