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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주 서봉총 금관 - 우아한 모습, 이면의 역사

기생에게 금관을 씌운 평양부립박물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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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문화신문=한성훈 기자]  

 

스웨덴 구스타프 아돌프 황태자의 조선 방문

 

1926년 10월 10일, 스웨덴 구스타프 아돌프 황태자(Oscar Fredrik Wilhelm Olaf Gustaf Adolf, 1882~1973, 1950년 구스타프 6세 아돌프 황제로 즉위)가 황태자비 루이즈 마운트배튼(Louise Alexandra Marie Irene Mountbatten, 1889~1965)과 함께 경주 노서리 봉황대 인근의 한 고분(제129호분, ‘서봉총’) 발굴 현장을 찾았습니다. 당시 황태자 내외는 나라 밖 여행 중이었습니다.

 

그들의 경주 방문은 미국 뉴욕과 샌프란시스코 등을 둘러보고 일본으로 들어가 한동안 머문 뒤 조선을 거쳐, 지나 중국ㆍ인도로 향하는 여정에 맞춰 계획된 일정이었습니다. 이때 식민지 조선의 통치를 총괄했던 조선총독부의 외사과(外事課)가 의전을 담당했을 정도로, 스웨덴에서 온 황태자 내외의 조선 경유는 일본 처지에서 제법 중요한 사안이었나 봅니다. 그 배경은 일본이 처한 당대의 국제정치 상황에서 찾아볼 수 있을 듯합니다.

 

제1차 세계대전(1914~1918)의 충격으로, 나라 사이 분쟁을 없애고 국제사회의 협력을 이끌기 위한 움직임이 일어났습니다. 그 결과 1920년에는 평화기구인 국제연맹이 창립되었습니다. 앞선 세계대전에서 연합군 측에 가담하여 정치적으로 유리한 입장을 차지하게 된 일본은 국제연맹이 출범하는 과정에서 창립 회원국이자 상임이사국이 되었습니다. 스웨덴 역시 국제연맹의 창립 회원국이었습니다.

 

따라서 두 나라의 외교적 관계가 밀접하게 유지되었을 것으로 파악됩니다. 당시 스웨덴 구스타프 황태자의 조선 방문과 일본 정부 차원의 황태자 의전은 정치적 입장에서 기획된 공식 행사로 보입니다. 조사 성과가 이미 상당히 노출된 단계에 일본 정부가 황태자를 제129호분 발굴 조사 과정에 참여시킨 일은 스웨덴 정부를 향한 일본 측의 특별한 외교적 손짓으로 생각됩니다.

 

제129호분의 발굴 조사 배경과 구스타프 아돌프 황태자의 조사 참여

 

사실 제129호분의 조사는 애초부터 학술적인 목적으로 시작된 것이 아니었습니다. 이를 포함한 경주 일원의 고분 발굴, 아니 조선 전역의 고적 조사 목적은 일본의 조선 식민 통치와 밀접한 관련이 있습니다.

 

1910년 일본은 조선의 국권을 강점하고 강압적인 통치 방식으로 조선 사회의 존속과 조선인들의 생존을 위협하였습니다. 이 과정에서 고적조사위원회를 설치하고 <고적 및 유물 보존규칙>을 제정하면서(1916), 역사학ㆍ인류학ㆍ고고학 등의 학문을 매개로 여러 정책과 사업을 추진했습니다. 더불어 고대 이래 지속된 한반도와 일본 열도 사이의 역사적ㆍ문화적 증거를 수집하여 상호 관련성을 추적하였습니다. 이렇게 일본은 조선 통치의 당위를 강조하고 민족적 우위를 강변하는 데 정치력을 쏟았습니다. 조선 고적의 조사 정책, 그리고 신라 고도 경주의 고분 조사 사업은 그러한 목적에서 단행된 것입니다.

 

그러나 조사 성과는 애초의 기대에 미치지 못했습니다. 뒤이어 조사 관련 예산 문제가 불거졌고 관련 조직도 조선총독부 안에 신설되었다가 이내 폐지되면서, 조사 활동은 침체하고 말았습니다. ‘서봉총’이라는 이름을 얻게 되는 제129호의 조사는 이렇게 국면이 전환되는 시기에 이루어졌습니다.

 

이즈음 대구에서 경주와 울산을 거쳐 부산을 잇는 철도 노선의 궤도 확장 공사가 시작되었습니다. 공사 과정에서 노선의 주요 지점인 경동철도 경주 정차장의 기관고가 증설되어야 했고, 이에 해당 터를 메울 흙이 필요하게 되었습니다. 이런 사정으로 흙을 파내려고 제129호분을 이루고 있던 봉분의 흙을 걷어낼 계획이 발굴 조사로 이어진 것입니다. 참으로 터무니없는 조사 배경입니다.

 

 

조사는 1926년 7월 24일부터 조선총독부 학무국 고적조사과 촉탁 출신의 고이즈미 아키오[小泉顯夫]가 주도하여 본격적으로 개시되었습니다. 조사가 시작된 지 54일이 지난 9월 15일에는 분구의 대부분이 제거되었습니다. 이후 순차적으로 그 아래층의 목곽, 그다음으로 목곽 속에서 목관이 노출되고, 그 안팎에서 유물이 많이 발견되었습니다.

 

목관 내부 피장자 머리맡에서 거둔 금관은 제129호의 조사 값어치를 대표하는 성과가 되었습니다. 이 금관을 포함하여 제129호분에서 출토된 화려하고 귀한 각종 꾸미개(장신구)ㆍ철기ㆍ청동기ㆍ칠기ㆍ토기ㆍ유리제품ㆍ말갖춤(마구) 따위는 상당히 높았을 무덤 주인공의 살아 있을 때 지위뿐만 아니라, 당대 신라 최상위 지배층을 대상으로 거행됐던 묘ㆍ장제를 여실히 보여주는 증거입니다. 이 중요한 증거들을 수습하는 현장에, 일본은 의전을 목적으로 구스타프 황태자 내외를 초대한 것입니다.

 

 

발굴 담당자 고이즈미 아키오는 황태자의 참관을 돕고자 촬영기사 사와 슌이치[澤俊一]와 조사 형식을 고안했습니다. 특히 이들은 조사 범위의 부분마다 노출된 유물들의 층위와 배치를 도면으로 작성하고 사진을 찍은 뒤 거두는 절차를 무시하면서까지, 목관 내부의 꾸미개들을 착장 상태대로 배치하여 발굴한 뒤에 구스타프 황태자의 도착을 기다렸다고 합니다.

 

고고학ㆍ미술사학을 관심사로 삼았으며 중국 예술품을 두드러지게 수집하는 데다, 그리스ㆍ로마 고분 발굴 경험도 풍부하다는 황태자가 목관 가까이 들어오자 그를 위한 준비를 상징하는 흰 천이 걷혔습니다. 이후 황태자는 도구로 무덤 주인공의 허리띠드리개ㆍ꾸미개ㆍ금관ㆍ청동 초두 등을 거두었습니다.

 

이날의 일화는 당시 신문 기사에서 ‘스웨덴과 일본 사이 정의 상징으로 묘사되었습니다(《조선시보(朝鮮時報)》 1926. 10. 13.). 이때 크게 감격한 일본인 조사 담당자들은 황태자에게 이름 없는 무덤의 이름을 붙여달라고 부탁했다고 합니다. 이에 황태자는 자신을 수행하던 교토대학 교수 하마다 고사쿠[濱田耕作]와 논의하여, 스웨덴를 한자로 표기하는 ‘서전(瑞典)’에서 ‘서(瑞)’자를 따고 금관의 새 모양 장식을 봉황으로 보아 여기서 ‘봉(鳳)’자를 따서 둘을 합쳐 ‘서봉총’이라는 이름을 지었습니다.

 

서봉총 금관이 감당한 수난의 역사

 

 

서봉총에서 나온 금관은 금관총ㆍ금령총ㆍ황남대총ㆍ천마총에서 출토된 신라 금관의 전형적인 형태와 요소를 갖추었습니다. 곧 ‘出’자 모양의 맞가지장식 3개가 관 앞과 양옆에, 사슴뿔로 해석되기도 하는 엇가지 장식 2개가 관 뒤쪽에 달린 전형적인 모습입니다.

 

그런데 다른 금관들에는 유례가 없는 독특한 특징도 갖고 있습니다. 관 안쪽에 좁고 긴 금판 2매가 ‘十’자 형태로 엇갈려 고정되어 있으며, 그곳에 세 줄기로 갈라져 뻗은 장식을 부착하고, 각 장식 끝에 봉황을 닮은 새 장식을 하나씩 단 것은 서봉총 금관만의 특성입니다.

 

중요한 유적임에도 조사 책임자인 고이즈미 아키오는 발굴조사 보고서를 펴내지 않았고 간단히 줄인 내용 보고만 학술지에 실었습니다. 이후 그가 평양부립박물관 초대 관장으로 임용되고 일본의 제2차 세계대전 패전 등의 상황이 벌어지는 과정에서, 조사 관련 기록들은 흩어지고 말았습니다. 훗날 고이즈미 아키오의 회상과 연관 자료를 근거로 서봉총 조사를 다시 기록한 일본인 고고학자 아나자와 와코우[穴擇和光]·마노메 슌이치[馬目順一]는 유물의 사후 정리와 보존과학 처리 등에서 다소 아쉬웠다 평하기도 했습니다.

 

서봉총 금관의 조사가 마무리되던 즈음, 총독부박물관 소속 고이즈미 아키오와 사와 슌이치는 서봉총에서 출토된 유물 가운데 금관 등 특히 귀한 수십 점만을 추려냈습니다. 11월 16일 낮 1시부터 이 유물들을 경복궁박물관에 진열하고 시내 각 학교의 역사 교사, 총독부와 중추원의 역사학 관계자들에게 제한적으로 공개하였습니다. 이처럼 서봉총 금관은 그 의미와 값어치를 차분히 분석ㆍ평가받기도 전에 세상에 나오게 되었습니다.

그 과정에서 어이없는 수난을 겪기도 하였습니다.

 

서봉총 금관(1934년 촬영)

 

출토 당시 서봉총 금관의 관테에는 경옥제 곱은옥 6개가 달려 있었습니다. 이는 1934년에 찍은 사진에서 확인됩니다. 그런데 1939년 12월 19일 자 등록 기록에는 금관이 ‘본관14319’, 곱은옥 4점이 ‘본관14338’로 나뉘어 기재돼 있습니다. 관 안쪽에 달린 좁고 긴 금판 2매도 원래는 관테에 금못으로 고정되어 있었다가 어느 순간 다른 자리로 옮겨지고 금실로 고정되어 버렸습니다. 그러니까 1934년에서 1939년 사이 금관에게 무슨 일이 일어난 것이 분명합니다.

 

1936년 6월 23일 자 『조선일보(朝鮮日報)』에는 ‘무엄패례의 차난거(此亂擧), 기녀두상에 국보 금관, 연구 명목 아래 불근신한 희롱, 평양박물관장의 대실태’라는 제목의 사건 비판 기사가 실렸습니다. 그 내용은 평양부립박물관은 1935년 9월 제1회 고적 애호일을 기념하여 서봉총 특별전을 준비하면서 총독부박물관으로부터 출토 금관을 대여한 적이 있습니다.

 

그즈음 일어난 일로, 전시 개최 직전 박물관장은 기생을 박물관으로 불러 금관을 씌우고 금 허리띠를 두르게 하였습니다. 이 관장이 바로 서봉총 조사 책임자였던 고이즈미 아키오입니다. 해명이 아주 가관입니다. 연구와 보고서의 사진 수록 목적으로 사람에게 씌워놓은 일이라고 답하였습니다. 곱은옥이 금관을 떠나게 된 데는 이 사건이 연관되었을 것으로 보입니다.

 

근래에 들어와 박물관 연구자들의 노력으로 서봉총 금관의 곱은옥은 제자리를 찾았고, 보고서는 조사 이후 88년 만인 2015년 《경주 서봉총Ⅰ(유물편)》으로 펴냈습니다. 또한 일제강점기에 졸속으로 끝났던 조사도 다시 이루어졌습니다. 이렇게 서봉총에서 나온 금관과 출토 유물들의 값어치, 고분에 담긴 신라의 역사는 차근차근 다시 조명되고 있습니다.

 

                                                                             국립중앙박물관(옥재원) 제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