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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한범 교수의 우리음악 이야기

지인과 제자들이 기억하는 심소(心韶) 선생

[서한범 교수의 우리음악 이야기 696]

[우리문화신문=서한범  단국대 명예교수]  지난주에는 “가면 안 쓴 처용(處容)이 바로 심소(心韶)”라는 이야기와 5주기 추모문화제 관련하여 전시회와 세미나, 그리고 처용랑(處容郞)에 관한 이야기를 하였다. 처용은 본래 용왕의 아들이었으나 인간으로 화신(化身)하여 경주에서 왕정을 돕고 있었는데, 부인의 예쁜 미모를 탐하는 역신(疫神)이 인간으로 화신하여 동침(同寢)하고 있는 모습을 목격하고 태연하게 노래를 부르고 춤을 추었다고 한다. 이에, 역신이 감동하여 사과하고 물러갔으며 이후에는 나라 사람들이 처용의 화상을 대문 앞에 붙여 놓았는데, 역신들이 얼씬거리지도 않았다는 것이다. 심소 선생을 일러 <가면 안 쓴 처용>이라는 수식어가 따라다니는 것도, 어찌 보면 항상 만면에 미소를 짓고 있는 처용의 모습과 흡사하기 때문이리라.

 

이번 주에는 생전의 심소 선생과 교분을 나누었던 많은 지인과 제자들이 선생의 삶과 예술을 회고하며 보내온 추억담들이 많은데, 그 가운데 일부를 이 난에 소개해 보기로 한다.

 

먼저 문화예술평론가 구희서의 <소중한 궁중무용의 생명줄>이라는 글의 한 대목이다.

 

“전승계보가 뚜렷하면서도 정작 살아있는 춤의 숫자는 귀한 분야다. 우리의 궁중무용은 국가기관에 예속되어 있던 이왕직아악부원 양성소 출신으로 국악계 현역으로 일하셨던 원로 김천흥, 김기수, 성경린, 장사훈 선생님 등이 궁중무악의 맥을 이어주셨고, 그 중에서도 김천흥 선생님은 처용무의 인간문화재, 국악원 무용단 책임자로서 궁중무용을 지키며 전해 오셨다. 이런 어른들이 계셔서 근세조선의 궁중무악이 곧바로 현대의 무대로 전해질 수가 있었던 셈이다. 선생은 15세 때, 무동(舞童)으로 순종황제 50회 탄신축하에 첫 춤을 추었고, (가운데 줄임)

 

무보(舞譜)에 의해 재현된 궁중무용은 순서를 찾을 수 있지만, 그 춤이 지닌 본체, 진정한 아름다움이나 멋을 되찾기는 쉽지 않다. 우리 춤이나 무술은 문자로는 전해질 수 없는, 몸으로 느껴야 알 수 있는 비전(秘傳)이 있기 때문이다. 다리 힘의 중요성을 알고 그 중요성과 요결(要訣)을 오늘에 전할 수 있는 춤꾼이 가장 아쉬운 분야가 궁중무용 분야인데, 그런 면에서 김천흥 선생님은 소중한 궁중무용의 생명줄이다.”

 

 

다음은 창무예술원 김매자 이사장의 <창무회라는 이름을 지어주신 스승님>이라는 글의 한 부분이다.

 

“김천흥 선생님께 학교 강의를 통해 여러 종류의 춤을 배우면서 개인적으로 춤에 대한 더더욱 깊이 있는 지도를 받고 싶어 청을 드렸고, 선생님은 서슴치 않고 흔쾌히 허락해 주셔서 선생님의 개인교습소를 찾아가 개인지도를 받았다. 그때 배운 춤들이 <춘앵전>을 비롯하여 여러 종류인데, 춤의 실제뿐 아니라, 「정재(呈才)무도 홀기(笏記)」에 적혀있는 춤사위의 명칭도 일일이 풀이해 주셨고, 다른 종류의 정재들도 꼼꼼히 지도해 주셨다. (중간 줄임)

 

선생님께 내가 하고 싶은, 춤의 방향에 대해 논의를 드렸고, 선생님께서는 조언을 아끼지 않으셨다. <창무회>라는 명칭도 이 시대의 한국 창작춤을 만들겠다는 나의 의지를 말씀드려 <창작무용연구회>, 곧 <창무회>라는 이름을 지어주셨고, 아울러 창무회가 가야 할 방향성도 제시해 주신 것이다. (가운데 줄임) 1975년 서울 명동극장에서 창작공연을 했을 때, 많은 사람들이 나를 욕했으나, 선생님께서는‘잘했어, 수고했어, 그렇게도 해 보는 거지’라며 격려를 해 주셨던 기억이 새롭다.”

 

 

김은희 교사의 <하늘을 향해 머리를 조아리고>라는 글의 일부분이다.

 

“제가 심소 선생님을 처음 뵌 것은 1997년 하와이 주립대 대학원 첫 학기 때였다. 당시 하와이 주립대 평생교육원에서 주최한 <정농악회>의 하와이 초청공연과 강습회에서 홍보와 통역을 맡았던 이래 지속적으로 이어져 왔다. 무용 전공자로 우리 음악에 대한 공부가 부족하였기에 김천흥 선생님을 위시하여 여러 예인들의 뜻을 제대로 전달해야 한다는 압박감이 심했다.

당황해하는 나에게 선생님은 그 한없이 온화하면서도 천진난만한 아이와 같은 미소를 지어주셨던 것이 너무도 인상적이다. 지금도 긴장되는 순간이 오면, 그때의 ‘그래 다 괜찮아’라는 말씀을 하시듯, 선생님의 미소를 떠 올리며 용기를 얻고는 한다.”

 

“심소 선생께서는 식사 때마다 기도를 하셨다. 언젠가 선생님께 기독교인이시냐고 여쭈었는데, 교회는 잘 나가지 않지만, 식사 전에는 늘 조물주에게 감사의 기도를 올리신다는 것이었다. 구체적인 기도의 내용이 궁금해서 여쭈었더니 “모두가 평화롭고, 건강하게 살게 해 달라는 기도”라고 말씀 하셨다.

 

교단에 서서 가끔 질문에 당황하는 학생들을 대할 때면, 나도 그때의 선생님처럼 그들에게 온화하게 웃어주고 마음이 안정될 수 있도록 도와주려고 노력하는데, 그것이 그렇게 쉽지 않다는 것을 느끼게 된다. 그럴 때마다 선생님을 떠 올리게 되는 것이다. (다음 주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