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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한범 교수의 우리음악 이야기

심소(心韶)선생과 <정농악회(正農樂會)>

[서한범 교수의 우리음악 이야기 697]

[우리문화신문=서한범  단국대 명예교수]  지난주에는 심소 선생과 교분을 나누었던 지인 및 제자들의 추억담 가운데서 구희서, 김매자, 김은희 등이 보내온 내용 일부를 소개하였다. 구희서의 글에서는 “무보(舞譜)에 의해 재현된 궁중무용은 순서는 찾을 수 있지만, 춤의 진정한 아름다움이나 멋은 되찾기 어렵다는 점에서 선생의 존재 값어치”를 말했고, 김매자는 「창무회라는 이름을 지어주신 스승님」이 바로 김천흥 선생이었다고 전제하면서 1975년 서울(명동극장)에서 창작공연을 했을 때, 많은 사람이 외면했으나, 선생님만은 격려해 주셨던 점을 기억한다는 이야기를 전해 주었다. 그리고 김은희는 1997년 하와이 주립대 대학원 첫 학기 때, <정농악회(正農樂會)>의 초청공연에서 홍보와 통역을 맡으면서 선생과 인연이 되었다는 점, 당시의 천진난만한 아이와 같은 선생의 미소와 식사 전, 조물주에게 감사의 기도를 드리는 점이 인상적이었다는 이야기를 소개해 주었다.

 

1997년도 하와이 주립대에서 한국 <정농악회(正農樂會)>의 초청 공연이 이루어졌는데, 이 단체는 어떻게 결성이 되었고, 이 과정에서 심소 선생의 역할은 어떠했는가? 하는 이야기로 이어가 본다. 우선, 정농악회가 만들어지는 그 중심에는 글쓴이도 함께했던 기억이 있기에 당시의 정농악회 창립과 관련한 배경 이야기, 그리고 이 과정에서 젊은 연주자들과 심소 선생의 역할 등을 소개해 보기로 한다.

 

 

벌써 50여 년이 지난, 1970년대 중반으로 기억되는 어느 해, 초겨울이었다. 당시 서울음대 국악과의 기말 전공시험을 끝내고, 채점을 함께 한 젊은 선생 몇몇이 교정을 걸어 나오면서 이런저런 당일의 시험과 관련한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그런데 지금은 고인이 된 서울음대 김정자(가야금 전임) 교수가 김선한(거문고 강사)과 글쓴이(서한범, 피리 강사)에게 의논할 일이 있으니, 식사를 함께하며 이야기를 나누자고 제의해 오는 것이었다. 자리에 앉은 김정자 교수가 이렇게 입을 열기 시작하였다.

 

“오늘 학생들의 기말 전공시험 채점을 하면서 우리가 공통으로 느낀 점이지만, 악보로 전하는 대표적인 정악곡 <영산회상(靈山會相)>인데도, 학생마다 주법이 다르고, 표현법이 다르다는 점을 보고 심각하게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다행이 이왕직 아악부 출신의 원로 선생님들이 생존해 계시니까, 우리들 젊은 선생들이 이분들에게 더욱 더 구체적으로 복습을 하고, 가다듬어 가면서 후진들 교육을 담당해야 되지 않겠는가?”라고 말했다.

 

평소 학생들을 지도해 오면서 느껴 온 심경의 일단이겠지만, 그는 매우 심각하게 문제를 제기했다. 지금도 그렇거니와 당시의 상황도 비슷해서 일반 대중들은 물론, 국악 전공자들도 산조와 같은 민속악(民俗樂)에 견줘 정악(正樂)과 같은 음악들은 재미가 없는 음악으로 인식되고 있었던 탓에 좋아하는 사람들이 적었던 것이다. 그의 문제 제기는 당시의 음악 상황을 예리하게 꿰뚫고 있는 내용이었다.

 

특히, 정악의 제 악곡들은 각각의 악기별 악보가 전해 오는 상황이어서 관악, 현악, 관현합주가 각각 가능한 음악들인데도, 이렇게 가르치는 사람, 배우는 사람마다 서로 다르게 해석하거나 연주한다면 어떻게 되는 것인가?

 

무엇보다도 정악곡의 기본이라 할 수 있는 ‘영산회상’과 같은 음악의 경우, 배우고 가르치는 사람마다 서로 다르게 지도하고 배운다면 심각한 문제가 아닐 수 없다. 그러므로 이러한 문제를 슬기롭게 해결하기 위해서는 우리들이 더더욱 정확하게 공부해야 한다는 점이 그의 뜻이었다. 그의 이 같은 주장에 김선한 교수와 내가 무슨 명분을 내세워 반대할 것인가?

 

우리는 즉각 동의하게 되었고, 김 교수는 김선한과 글쓴이(서한범) 외에 양금 담당으로 고(故) 양연섭을 추천하면서 우리 4명이 뜻을 함께하며 노(老) 선생님들께 동의를 구하자고 제의하였다.

 

 

이렇게 김정자 교수의 제의에 따라 김선한, 서한범, 양연섭 등 젊은 연주자들은 의기가 투합하었고, 우리의 뜻은 국립국악원의 원로 선생님들, 곧 김천흥(이왕직 아악부원 양성소 제2기생 -해금)을 위시하여, 봉해룡(동 제3기생 - 단소), 이석재(동 제3기생 -피리), 김성진(동 제4기생 - 대금), 김태섭(동 제5기생 피리ㆍ장단) 등등, 노 선생들께 허락받아 공부 모임을 정례적으로 갖기 시작했다.

 

이 당시, 노 선생들의 대표격인 분이 바로 심소 김천흥 선생이었기에 누구보다도 심소 선생의 동의가 급선무였다. 그런데 김천흥 선생은 마치 기다렸다는 듯이 “아, 젊은 교수들에게 우리가 필요하다는데, 마다할 이유가 어디 있어요. 자연스럽게 우리들도 의견일치를 보았지요.”라고 의사를 분명히 전해 주었다.

 

이렇게 해서 처음에는 이름 없이 공부 모임을 시작하게 되었고, ‘영산회상’부터 주 2회 정도 합주하면서 중간중간에 토론도 한 기억이 새롭다. 이 모임의 이름이 바로 <정농악회>다. 매사 적극적으로 모임을 주도한 김정자 교수가 어느 철학인에게 의뢰하여 받아 온 이름인데, 대략적인 의미로는 “바른 음악, 또는 어진 음악을 지어 세상을 이롭게 한다는 취지”라는 뜻이다. (다음 주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