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문화신문= 오사카 이윤옥 기자] 긴테츠 하지노사토역(土師ノ里)은 작은 시골 역이었다. 역에 내렸을 때는 바람이 부는데다가 빗방울까지 내려 궂은 날씨였다. 2월 14일(화), 오전 11시 오사카에서 여러 번의 열차를 갈아타고 근 2시간이 걸려 고구려 혜관스님이 창건한 것으로 알려진 이노가미데라(井上寺) 터에 도착할 수 있었다. 동행인은 하루 전날 교토 도시샤대학에서 가진 윤동주 추모회 때 만난 우에노 미야코(上野 都, 70살) 시인으로 기꺼이 기자의 '고구려 혜관스님 발자취'를 찾아 나선 길에 동행을 흔쾌히 허락해주었다. 한국인이 일본의 옛 유적지를 답사한다는 일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과거의 문헌이 있다해도 이미 시간적으로 1300여년의 시간이 흘러버려 해당지역에 실제 가보면 주택이나 빌딩이 들어서서 위치를 확인하기 어렵고 설사 위치가 확인되었다 하더라도 아예 땅이름이 과거를 연상할 수 없을 만큼 바뀌어 있는 경우가 허다하기 때문에 애로사항이 하나 둘이 아니다. 이날 우에노 시인과 기자가 의지하고 있는 것은 한국에서 미리 조사한 종이 한 장뿐이었다. 기자는 고구려 혜관스님을 연구하는 사람으로서 이 날 기자의 손에 들고 있던 역사적 기록은 1702년에
[우리문화신문=이한영 기자] 서울시의회는 17일 제272회 임시회 1차 본회의에서 서울시의회 더불어민주당(대표의원 김종욱, 구로3) 소속 의원 73명이 공동으로 발의한 서울특별시의회 '화해・치유재단' 해산 및 '12·28 한・일 위안부 합의' 재협상 촉구 결의안을 통과시켰다. 이번에 통과된 결의안은 더불어민주당 소속 한명희 의원(강서4)이 대표발의를 했다. 결의안은 제안이유를 통해 지난 2015년 12월 28일 대한민국 외교부 장관과 일본 외무대신은 위안부 피해당사자의 의견을 무시한 채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 문제에 관한 합의'를 타결하고 이에 따라 '화해・치유 재단'을 출범시켜 피해자 위로금 명목의 현금을 강제적으로 수령할 것을 강요하는 등 위안부 피해자들의 존엄한 명예와 인권을 심각하게 훼손하였다고 주장했다. 이에 따라 서울특별시의회는 정부가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에 대해 명예와 인권침해를 자행하는 '화해・치유재단'을 즉각 해체 시킬 것을 촉구하고 한·일 양국 정부가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들에 대한 진정한 사죄와 법적 배상 등을 위한 책임 있는 재협상을 추진할 것을 촉구하기 위해 제안됐다. 서울시의회 더불어민주당은 이번 결의안 통과를 바탕으로 정부가
[우리문화신문= 효고현 간자키군 이윤옥 기자]"보인(寶印, 절 순례시 도장 받는 것)을 받거나 용무가 있으신 분들은 오른쪽 종루에 있는 종을 치신 뒤 납경소(納經所)로 오십시오" 2월 16일 오후 1시에 찾아간 효고현 간자키군에 자리한 곤고조지(金剛城寺, 금강성사) 일주문 입구에는 이러한 안내문이 적힌 입간판이 세워져 있었다. 인왕문을 들어서니 사람 그림자 하나 없는 적막강산이었다. 구태여 종까지 칠 필요가 있나 싶어 살며시 경내로 들어가 종무소를 찾아도 눈에 안 띈다. 입간판에 적힌 납경소(納經所, 절 순례자들이 도장을 받는 곳)라도 찾아보려고 기웃거리다 보니 종루 뒤편 건물 안쪽에 납경소가 눈에 띄었다. 굳게 닫힌 문을 두드렸다. "계십니까?" "... ..." 몇 번을 부르고 문을 두드려도 인기척이 없다. 3주전 기자는 이곳 주지스님에게 한 통의 팩스를 보낸 적이 있다. 고구려 혜관스님이 창건한 이 절을 방문하고 싶으니 절에 내려오는 문헌 자료가 있으면 얻고 싶다는 짧은 내용의 팩스였다. 그러나 팩스를 보내고 며칠을 기다려도 답이 없어 직접 전화를 걸었다. 그때 주지스님은 "우리 절에 별로 자료가 없는데..."라면서 바튼 기침소리를 냈다. 목소리만으로도
[우리문화신문=교토 도시샤대학 이윤옥 기자]어제 13일(월) 오후 3시, 스물일곱의 나이로 순국의 길을 걸은 조선 청년 윤동주를 기리는 한국과 일본시인들의 아주 뜻깊은 추모회가 그가 다니던 교토 도시샤대학[同志社大學] ‘윤동주시비’ 앞에서 있었다. 교정에는 아직 찬 겨울바람이 볼을 스치고 있었지만 붉은 매화, 흰 매화꽃이 활짝 피어 봄이 머지않았음을 알리는 가운데 <일본ㆍ한국ㆍ재일코리언 시인 공동 윤동주 탄생 100주년 기념 모임>이 열린 것이다. ‘오오, 푸름이 윤 씨 동주여! 그대가 그렇게 끔찍하게 목숨을 앗기지 않았더라면 다섯 해 뒤, 열해 뒤에는 더 많은 좋고 훌륭한 글 노래들을 지어 냈을 것이어늘...’ - 김리박 ‘바람과 별과 시와 믿나라 -무르익은 시인 윤 씨 동주를 돋구어 본다(風と星と詩と祖国, 青年詩人尹東柱を思い遺って )- 재일본한국문학회 회장인 김리박 시인의 푸름이(청년) 윤동주를 위한 자작시의 낭송을 시작으로 한국과 일본의 시인들이 잇달아 윤동주를 그리는 시 낭송이 이어졌다. 올해 다섯 번째인 이날 행사를 주최한 사람들은 모두 시인들로 자신의 자작시 또는 윤동주 시인의 시를 일본어와 한국어로 낭송하여 도시샤대학 교정을 수놓
[우리문화신문=이한영 기자] 1938년 3월, 일제의 ‘처녀공출’에 걸려 중국으로 끌려간 박영심은 어떻게 임신한 상태로 전쟁터에서 살아남아 고국으로 돌아올 수 있었을까? 1941년, 병원에 가면 돈을 많이 벌 수 있다는 얘기에 속아 언니와 함께 필리핀으로 간 김소란(가명)은 감시와 폭행 속에서 어떻게 살아남아 ‘위안부’ 피해를 증언할 수 있었을까? 서울시는 서울대학교 인권센터와 함께 지난해 12월 31일 발간한 《문서와 사진, 증언으로 보는 ‘위안부’ 이야기(이하 「‘위안부’ 이야기」)》 사례집과 관련해, 시민들을 대상으로 한 첫 강연회를 오는 2월 22일(수) 한다. ‘위안부’ 이야기는 시가 작년부터 추진하고 있는 ‘일본군 위안부 기록물 관리 사업’ 가운데 하나로 ‘위안부’ 피해자 10인의 생생한 증언은 물론 미국, 태국 현지조사를 통해 새롭게 발굴한 역사적 입증자료까지 망라해 교차분석한 첫 사례집이다. 그동안 ‘위안부’ 연구에 있어 일본 정부・군 공문서를 활용하는 경우가 압도적으로 높았던 상황에서 이번에 발견한 미국 및 연합국 생산자료는 ‘위안부’ 실태에 대한 새로운 관점의 역사 사료로서 중요한 의미가 있다. 이번 「‘위안부’ 이야기」 강연회는 그동안
[우리문화신문= 일본 사이타마 김영조 기자] "식민지 시대의 창씨개명, 한글금지, 독립운동가 고문 등 우리 선조들의 만행이 부끄러울 뿐입니다. 사죄의 길을 찾고 싶습니다." "일본 내의 민족학교에서 자원봉사를 하고 있습니다. 조선의 민족학교차별을 하는 일본 정부와 투쟁중입니다. 일제강점기에 민족정신을 키운 민족교육 이야기에 깊은 감명을 받았습니다." "여성독립운동가에 대한 구체적이고도 실감나는 이야기를 처음 들었습니다. 한국의 여성들이 이러한 난관을 극복한 점에 대해 경의를 표합니다." "교과서에서 배우지 못한 이러한 강연을 일본 전역에서 했으면 좋겠습니다" 이는 사이타마 시민들이 이윤옥 시인의 항일여성독립운동가 강의를 듣고 쓴 소감문들이다. 어제(15일) 오후 6시부터 2시간 여 동안진행된 사이타마현 우라와(浦和)커뮤니센터 제7회의실에서 가진 이윤옥 시인의 여성독립운동가 강연은 전날인 14일 고려박물관에서의 강연에 이은 2회째 였다. "조용한 아침의 나라에서 목숨을 건 꽃들의 이야기-조선독립운동에 앞장선 여성독립운동가들-" 이라는 부제로 강연을 한 제7회의실에는 한국의 여성독립운동가에 관심이 있는 각 시민단체 회원들이 모여 이윤옥 시인의 열띤 강연을 들었다
[우리문화신문= 일본 사이타마 이윤옥 기자] "제가 초등학교 다닐 때만 해도 신사(神社) 경영이 어려워 아버지는 교사 직업을 이어가야 했습니다. 그게 1975년 무렵입니다. 이후 아버지는 교직을 사직하고 궁사(司宮, 구우지) 일에만 전념하게 되지요. 여러분이 고마역(高麗驛, 고구려를 고마라고 발음)에 내렸을 때 광장에 빨간 장승이 세워져 있는 것을 보셨을 겁니다. 거기에 천하대장군, 지하여장군이라고 쓴 것은 아버지의 글씨입니다. 그런데 그렇게 잘 쓴 글씨는 아닐 겁니다. 병환 중에 쓰신 글씨였거든요." 고마신사(高麗神社, 고마진자)의 제60대 궁사인 고마 후미야스(高麗文康) 씨는 대담을 위해 찾아간 기자 일행에게 그렇게 말했다. "네? 장승에 새겨진 글씨가 아버님의 글씨라고요? 아이고 그렇다면 좀 더 자세히 보고 올 것을 그랬네요" 일행은 고마역 광장에서 사진을 찍으면서도 그 글씨가 누구의 글씨인지 몰랐다. 15일(일) 오전 11시, 사이타마현 히다카시(埼玉県日高市)에 자리한 고마신사의 접견실에서는 기자를 포함한 한국인 4명과 일본 고려박물관 운영위원인 도다 미쓰코(戶田光子) 씨 등 일본이 3명이 1시간 가까이 궁사(宮司)와 환담 시간을 가졌다. 고마신사를
[우리문화신문= 도쿄 김영조 기자] "강연을 듣고 나서 관람객들이 그림을 대하는 모습이 더욱 진지했습니다. '백문이불여일견' 이라는 말이 실감나듯 강연에 참석한 사람들은 전시된 그림에서 눈을 떼지 못하더라고요. 아쉬운 것은 이번 특별강연 날짜를 전시 막바지에 갖게 된 점입니다. 좀 더 일찍 강연날짜를 잡았더라면 더욱 좋았을 텐데..." 이는 어제(14일) 오후 2시, 도쿄 고려박물관에서 열린 "침략에 저항한 불굴의 조선여성들(侵略に抗う不屈の朝鮮女性たち)"에 관한 이윤옥 시인의 특강이 있은 뒤 주최 측인 고려박물관 회원들과의 뒤풀이 자리에서 나온 말이었다. 정말 통쾌한 강연이었다. 일제강점기 조선여성들의 불굴의 의지를 유창한 일본어로유감없이 낱낱이 밝힌 이날 강연은 고려박물관 7층 전시실을 가득 메운 청중들과 2시부터5시까지 무려 3시간 동안 중간 휴식 없이 진행되었다. 다소 긴 3시간이었지만 한국의 항일여성독립운동가에 대한 거침없는 이윤옥 시인의 열띤 강연에 청중들은 꼼짝도 하지 않고 숨을 죽이며 경청했다. 한국의 여성독립운동가에 대한 이야기를 경청한 청중들은 자연스레 일제침략의 역사를 새삼 상기한 듯 질의응답 시간에는 20여 명이 다투어"일제침략기에 대한"
[우리문화신문= 이바라키현 이윤옥 기자] "아니 이 돌비석에 고구려 혜관스님의 이야기가 써있단 말입니까?" 어렵사리 찾은 이바라키현 근본사의 가미하라(上原) 주지스님 (일본에서는 주직(住職, 쥬쇼쿠))은 멀리 한국에서 온 기자에게 되레 그렇게 물었다. 그리고는 또 한다는 말이, "본당(대웅전)이 원래 이 자리가 아니었는데 본당을 세우면서 이리로 옮긴 것입니다. 그때 이 돌비석의 유래를 몰라 그냥 버리려다 이곳에 옮겨 온 것이지요." 아뿔사란 말은 이럴 때 쓰는 말이던가! 주지스님한테 절의 유래를 들으러 갔다가 되레 기자가 주지스님에게 절의 유래를 설명해주는 꼴이 되고 말았다. 이럴려고 멀고먼 한국에서 이바라키현 가시마시(茨城県 鹿嶋市)까지 낯선 길을 물어물어 찾아왔나 싶어 다소 실망감이 느껴졌다. 어제 10일(화), 기자는 근본사(根本寺, 곤뽄지) 를 찾아가기 위해 이른 아침 도쿄역에서 고속버스를 탔다. 근본사가 자리한 가시마(鹿嶋 또는 鹿島)까지는 고속버스로 두어 시간 걸렸다. 가시마진궁역이 종점인 곳에 내려 사람도 거의 다니지 않는 한적한 시골길을 걸어 간신히 근본사에 도착한 기자는 인기척 없는 경내를 살피다가 본당 앞에 이끼 낀 돌비석 하나를 발견했다.
[우리문화신문=일본 도쿄이윤옥 기자]고려박물관으로 향하는 신오쿠보 거리에 겨울비가 추적거리고 내리고 있었다. 한글 간판이 즐비하게 나있는 좁은 골목길을 지나며 기자는 하라다 이사장을 떠 올렸다. "벌써 10여 년 전일이지만 정년을 하고 무작정 한국으로 달려갔지요. 음성 꽃동네서 2년간 선조들이 저지른 침략의 역사를 반성하는 뜻에서 봉사를 자청했습니다." 고려박물관의 하라다 쿄코(原田京子) 이사장은 오로지 '조선 침략을 반성' 하는 뜻에서 한국말을 배웠고 한국의 역사와 문화를 배웠다고 했다. 그리고 생의 후반부를 일제국주의가 빚은 '침략역사를 알리는 고려박물관'에서 봉사의 길을 걷고 있다. 떡볶이집과 김밥집을 지나 7층 고려박물관에 들어서자 반가운 얼굴들이 비 내리는 일요일 오후에도 자원봉사를 하고 있었다. 100% 자원봉사로 꾸려가고 있는 고려박물관 전시실에는 지난해 11월 2일부터 올해 1월 29일까지 좀 색다른 전시회가 열리고 있다. "침략에 저항한 불굴의 조선여성들(侵略に抗う不屈の朝鮮女性たち) -시와 그림으로 엮는 독립운동의 여성들(2)(詩と畵でづづる獨立運動の女性たち(2)" 이라는 다소 긴 제목의 전시회가 그것이다. 기자가 쓴 항일여성독립운동가를 기리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