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문화신문=김영조 기자] 항일의 노래를 부르며 독립을 간절히 꿈꿨을 광복군 오희옥 지사. 민족문제연구소가 진행한 항일음악회에서 오희옥 지사가 들려주었던 ‘독립군가’와 안중근 ‘옥중가’를 여러분께 전합니다.(민족문제연구소 제공)
[우리문화신문=이윤옥 기자] “우리대한 겨레의 형제자매와 온 세계 우방의 동포들이여! 우리 대한은 완전한 자주독립과 신성한 평등복리를 우리 자손 여민(黎民)에게 대대로 물려주기 위하여 타민족 전제(專制)의 학대와 압박에서 벗어나 대한민족의 자립을 선포한다. 우리 대한은 예로부터 우리 대한의 대한이었지 타민족의 대한이 아니다. (가운데 줄임) 한마음 한뜻인 이천만 형제자매들이여! 단군대왕조께서는 상제 가까이에서 우리에게 기운을 명하시고 이 시대의 온 세계가 우리를 돕고 있도다. 정의를 이길 자가 없으니 하늘의 뜻을 거역하고 나라를 도적질한 적들을 한손으로 무찌르라. 이로써 5천년 조상들의 빛난 얼을 받들고, 2천만 동포의 운명을 개척할 것이다. 궐기하라 독립군아! 함께 싸워라 독립군아!(끝줄임)” - 조소앙 선생이 기초한 <대한독립선언서(무오독립선언서)> 일부- 이는 1919년 2월 조소앙 선생이 기초하고 김규식, 김동삼, 김좌진, 이동휘, 박은식, 안창호 등 쟁쟁한 독립운동가 39명이 서명한 <대한독립선언서(무오독립선언서)> 가운데 일부이다. 이 선언서는 <2ㆍ·8독립선언서>와 <3이는 1919년 2월 조소앙 선생이 기초
[우리문화신문=이윤옥 기자] '어서 오십시오. 중국의 미래 광저우에 잘 오셨습니다.' 선생님은 광저우에 도착한 김산을 이렇게 맞으셨지요. 저는 김산 평전을 통해 선생님을 처음으로 알게 되었습니다. 물론 선생님의 저 말은 평전을 써내려간 저자의 상상력이 더해진 말이겠지요. 하지만 선생님을 접할 때마다 저는 저 한마디가 함께 떠오릅니다. 무더웠던 올 여름, 저는 임시정부기념사업회의 독립정신 답사단에 참여할 수 있었습니다. 답사장소 가운데 하나였던 베이징에서는 선생님이 수학하셨던 민국대학 터 극군근왕부를 방문했습니다. 비록 다른 답사지역에 견주어 짧은 시간 방문했지만, 저에게는 남다른 의미로 다가왔습니다. 그리고 답사를 위한 사전 공부에서 ‘조선노동공제회’라는 사회운동 단체를 알게 되었고, 선생님께서 이 운동에 참여하였던 사실도 뒤늦게 알게 되었습니다. 강한 인상을 남긴 저 말 때문일까요? 선생님이 남긴 흔적과 조우할 때마다 따뜻이 맞아주는 푸근함을 느끼곤 했습니다. 세 번의 우연은 운명내지 필연이라고, 어느새 저는 선생님의 이력을 다시금 찾아보고, 공부하게 되었습니다. 그렇게 저는 선생님을 흘려보내지 아니하고, 일대기를 가슴속에 품은 청년이 되었습니다. 선생
[우리문화신문=이윤옥 기자] “차리석 선생은 해외 혁명운동자 가운데서도 특히 강력한 정신력을 소유하기로 유명하시었다. 탁월한 사무처리 기능이나 병중에서도 최후일각까지 맡으신 사명을 완수하신 건강한 책임감은 한국 독립운동에 피와 살이 되었다해도 과언이 아니다.” -백범 김구, 동아일보 1948년9월 22일자- 대한민국임시정부 국무위원(장관)을 지낸 동암 차리석(1881~1945, 1962, 독립장 추서) 선생은 백범이 말했듯이 ‘한국 독립운동사에 피와 살’이 되었을 뿐더러 ‘대한민국임시정부의 든든한 버팀목’으로 독립운동사에 한 획을 그은 분이다. 그런데 차리석 선생에게 차보석(黃寶石, 車寶石, 1892~1932)이라는 여동생이 있었다는 사실을 알게 된 것은 우연한 기회였다. 기자가 집필 중인 여성독립운동가를 기리는 시집 《서간도에 들꽃 피다, 제8권》을 쓰는 과정에서 ‘차보석 선생의 오라버니가 동암 차리석 선생’이라는 사실을 알게 된 것이다. 기자는 차보석 선생의 이야기를 듣고자 지난 1월 16일 화요일 오후, 선생의 조카인 차영조(차리석 선생 아드님, 74살) 씨를 의왕시의 한 음식점에서 만났다. “미국에서 활동하신 고모님(차보석)에 대한 자세한
[우리문화신문=이윤옥 기자] 한미협회의 중국 국민당 정부 접촉을 통한 임정승인 외교 시도도 여의치 않게 흘러갔다. 이를 타개하기 위해 한미협회 후견인으로 활동하던 제랄딘이 나서게 되었다. 제랄딘은 한미협회의 다른 인사들과 달리 이승만 이외에도 김용중 등 미주 한인사회의 다양한 인물들과 관계를 맺으면서, 미국 내 주요인사들과 접촉했다. 게다가 애쉬모어와 제랄딘은 장제스, 장췬, 궈다이치, 쑹메이링 등 중국 국민당 정부 관계자들과 이미 1920년대부터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었다. 결국 한미협회 인사들은 중국 국민당 정부와의 교섭이 어려워지자 제랄딘의 협조를 받기로 했다. 쑹메이링과의 개인적인 친분이 있었던 제랄딘은 다음과 같은 서한을 보내 중국 국민당 정부의 임정 승인을 재촉했다. … 난 당신(쑹메이링)이 내 남편(애쉬모어)과 그의 아버지(필드)가 한국 사람들에 관심이 많았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우리는 이승만과 김구처럼 개인적으로 알고 있는 망명자뿐만 아니라 한국의 독립을 위하여 수십 년 동안 쉬지 않고 헌신하고 자기를 희생하는 사람들을 도와야 합니다. … 중략 … 지금 총통(장제스)이 이끄는 중국 사람들이 중경에서 한국 임시정부에 기꺼이 피난처를 제공
[우리문화신문=이윤옥 기자] 100년 편지에 대하여..... 100년 편지는 대한민국임시정부 100년(2019년)을 맞아 쓰는 편지입니다. 내가 안중근의사에게 편지를 쓰거나 내가 김구가 되어 편지를 쓸 수 있습니다. 100년이라는 시간과 공간을 넘나드는 역사와 상상이 조우하고 회동하는 100년 편지는 편지이자 편지로 쓰는 칼럼입니다. 100년 편지는 2010년 4월 13일에 시작해서 2019년 4월 13일까지 계속됩니다. 독자 여러분도 100년 편지에 동참해보시지 않겠습니까? 앞으로 매주 화요일 100년 편지를 소개합니다. -편집자- 문의: 대한민국임시정부기념사업회 02-3210-0411 이 편지는 선생님의 외손자이신 김동식(사월혁명회 공동의장) 선생의 증언과 민족문제연구소 그리고 사월혁명회가 조사한 사료를 바탕으로 쓰는 편지입니다. 김동식 선생은 집안이 어려워 어릴 때 외가에서 살면서 할아버지의 독립운동에 대해 많은 이야기를 들으며 남다른 자부심을 가지며 자랐다고 합니다. 특히 외할아버지는 양산에서 천석꾼 집안에 태어나 임시정부 재무총장에 임명 될 정도로 독립운동 자금에 깊이 관여하시며 상당한 재산을 독립운동에 헌납한 것을 김동식 선생은 긍지로 여기며
[우리문화신문=이윤옥 기자] 일제강점기 대한독립운동은 전 세계를 무대로 진행되었다. 그 중 해외 독립운동은 지지기반이 약하고 언어 등 제약이 있었으므로 현지인의 도움이 반드시 필요하였다. 대한민국정부는 독립운동을 지원한 현지인들의 공적을 기리기 위해 2017년까지 56명의 외국인에게 건국훈장을 수여하였다. 조지 애쉬모어 피치(George Ashomore Fitch, 한자명 費吾生)는 2018년 1월의 독립운동가로 뽑혔다. 이에 <4회>에 걸쳐 그의 독립운동 이야기를 싣는다. 피치 일가의 한국독립운동 지원은 1930년대에 들어서도 계속되었다. 이 시기에는 필드를 대신하여 아들인 애쉬모어와 그의 부인 제랄딘이 주역이었다. 1909년 장로교 목사가 되어 중국 상하이로 돌아온 애쉬모어는 아버지 필드가 한국독립운동에 적극 참여하고 있었던 것을 계기로 한국인 독립운동가들과 친분을 맺을 수 있었다. 애쉬모어는 1923년 2월 아버지 필드가 별세한 이후에는 대체로 중국내 YMCA활동에 전념했다. 그러나 애쉬모어는 1932년 윤봉길 의거 이후 김구 피신을 돕는 등 한국인들을 지원하면서 태평양전쟁기에는 미군을 도와 일본에 맞서는 모습을 보였다. 또한 그의 부인 제
[우리문화신문=전수희 기자] 국가보훈처(처장 피우진)는 서대문형무소역사관에서 ‘2018년도 이달의 독립운동가 기획전시’를 2018년 연중 실시한다고 밝혔다. 국가보훈처는 광복회 및 서대문형무소역사관과 공동으로 일제강점기 독립운동가들이 수감되었던 감방 12개에 올해 이달의 독립운동가로 선정된 인물의 자료를 전시하였다. 자료는 12옥사 오른쪽 6개 감방과 왼쪽 6개 감방에 설치되었으며, 독립운동가의 생애, 독립운동 공적내용 및 사진자료로 구성되어 있다. 이번 기획전시는 조지 애쉬모어 피치 선생 등 총 13명의 2018년도 이달의 독립운동가를 알리고자 기획되었다. 국가보훈처는 1992년 1월의 독립운동가로 종로경찰서에 폭탄을 투척한 김상옥 선생을 선정한 이후 총 327명의 독립운동가를 이달의 독립운동가로 선정하였으며, 그 중에는 여성 22명과 외국인 5명이 포함되어 있다. 국가보훈처는 1997년부터 서대문형무소역사관 공작사에서 매월 이달의 독립운동가를 교체 전시해 왔으나, 올해부터는 장소를 12옥사로 옮기고 1월부터 12월까지 선정된 인물을 동시에 전시하는 것으로 전시 내용을 변경하였다. 서대문형무소역사관에서 열리는 기획전시는 올해 연말까지 계속될 예정이다.
[우리문화신문=이윤옥 기자] 일제강점기 대한독립운동은 전 세계를 무대로 진행되었다. 그 중 해외 독립운동은 지지기반이 약하고 언어 등 제약이 있었으므로 현지인의 도움이 반드시 필요하였다. 대한민국정부는 독립운동을 지원한 현지인들의 공적을 기리기 위해 2017년까지 56명의 외국인에게 건국훈장을 수여하였다. 조지 애쉬모어 피치(George Ashomore Fitch, 한자명 費吾生)는 2018년 1월의 독립운동가로 뽑혔다. 이에 <4회>에 걸쳐 그의 독립운동 이야기를 싣는다. 1870년 11월 5일 중국에 도착한 필드는 상하이와 쑤저우에서 선교활동을 시작했고, 1888년 미국 장로교 선교회 중국지회장이 되었다. 또한 같은 해 당시 동아시아에서 가장 많은 서적을 인쇄했던 미화서관(美華書館, The American Presbyterian Mission Press)의 책임자가 되었다. 더불어 미화서관에서 매달 간행하는 종교지 차이니즈 레코더(The Chinese Recorder) 의 편집장을 맡았다. 차이니즈 레코더 는 자유주의 신학을 기반으로 한 종교지로서 중국에 퍼져가는 민족주의 사조를 반영한 잡지로 명성을 떨쳤다. 필드의 중국 활동은 장로교 선교사로
[우리문화신문=이윤옥 기자] 일제강점기 대한독립운동은 전 세계를 무대로 진행되었다. 그 중 해외 독립운동은 지지기반이 약하고 언어 등 제약이 있었으므로 현지인의 도움이 반드시 필요하였다. 대한민국정부는 독립운동을 지원한 현지인들의 공적을 기리기 위해 2017년까지 56명의 외국인에게 건국훈장을 수여하였다. 조지 애쉬모어 피치(George Ashomore Fitch, 한자명 費吾生)는 2018년 1월의 독립운동가로 뽑혔다. 이에 <4회>에 걸쳐 그의 독립운동 이야기를 싣는다. 조지 애쉬모어 피치(George Ashomore Fitch, 한자명 費吾生)는 미국 장로교 선교사로서 대한독립운동을 물심양면으로 지원하였던 외국인 중 한 명이다.그의 아버지 조지 필드 피치(George Field Fitch, 한자명 費啓鴻)와 그의 부인 제랄딘(Geraldine Townsend Fitch)까지 2대에 걸쳐 부자와 부부가 우리나라 독립을 위해 헌신하였다. 독립운동사에서 ‘피치 목사’는 널리 알려진 인물이었으나 그 일가가 함께 활동했다는 내용은 명확하게 알려지지 않았었다. 따라서 외국인 독립운동가 ‘조지 애쉬모어 피치’를 알기 위해서는 그 일가를 살펴봐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