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문화신문=이윤옥 기자] 한탄강 굽이친 물 대대로 철원평야 살찌운 땅 알알이 영글던 겨레의 꿈 조각낸 자들 더는 두고 볼 수 없어 쉰여덟 나이로 피울음 토해내며 기미년 삼월 불꽃처럼 타오른 임의 애국혼 조국은 기억하리 영원히 기억하리 곽진근 (郭鎭根, 1861~1940) 애국지사는 강원도 철원에서 만세운동에 앞장섰다. 철원은 강원지역에서 맨 처음 만세운동이 일어난 곳으로 곽진근 지사는1919년 3월 10일 낮 3시, 농업학교에 모인 철원청년회, 농업학교, 보통학교 등 250여 명의 학생들 앞에서 만세운동을 이끌었다. 서울로부터 전해온 만세운동 소식은 철원지역 학생들의 젊은 피를 끓게 했다. 이들은 읍내 중심인 서문거리로 뛰쳐나가 조선의 독립을 외치며 헌병 분견소 쪽을 향했다. 곽진근 지사는 58살의 고령의 나이임에도 젊은 학생들 앞에서 만세시위를 주도했다. 성결교회 경성성서학원을 졸업한 곽진근 지사는 3·1만세운동이 일어나기 4년 전인 1915년부터 철원장로교회 전도사로 활동하고 있었다. 당시 철원장로교회는 1905년 웰번(E.A.Welbon)선교사가 설립했는데 교회 안에 사립 배영학교를 세워 주민들에게 신문화교육, 육영사업, 군사훈련, 민족정신을 키
[우리문화신문=김영조 기자] “이 한 권의 책을 이 땅의 모든 남성들에게 바칩니다.”라고 책머리에 밝힌 책이 있다. 바로 이윤옥 시인의 《서간도에 들꽃 피다》가 그 책이다. 왜 이 시인은남성들에게 이 책을 바친다고 했을까? 일제강점기에 조국의 독립을 위해 몸을 던졌고, 그 공로를 나라에서 인정받은 남성 독립운동가는 15,000 여명(2017)에 이르지만 여성독립운동가는 296명(2017)에 불과하다. 이는 남성독립운동가의 2% 수준이다. 이러한 현실을 안타깝게 여긴 이윤옥 시인은 여성독립운동가의 발자취를 찾아 그들의 헌신을 시집 《서간도에 들꽃 피다》를 통해 사회에 알리는 작업을 해오고 있다. 그간 우리 사회는 일제강점기에 남성과 어깨를 나란히 견주고 독립을 위해 뛰어들었던 여성독립운동가를 조명하는 일을 소홀히 다뤄왔다. 이에 이윤옥 시인은 2011년부터 여성독립운동가를 기리는 시집 《서간도에 들꽃 피다》를 통해 사회의 관심에서 비껴난 여성독립운동가를 알리는 일에 발 벗고 나섰다. 제1권에는 안중근 어머니 조마리아, 만주 호랑이 남자현, 일본 황거를 폭격하려던 최초 여류비행사 권기옥 등 20 명의 여성독립운동가를 조명했으며 이후 해마다 1권씩 《서간도에 들
[우리문화신문=이윤옥 기자] 【백년편지는 대한민국 임시정부 100년 (2019년)을 맞아 쓰는 편지글 형식의 글입니다. 2019년 4월 13일까지 계속 접수를 받습니다. 대한민국임시정부기념사업회 문의 : 02 -733-5027】 2018년 1월 3일 새벽, 총손(塚孫) 진홍은한없이 사모로운 5대조 면암할아버지께 삼가 글을 올립니다. 저는 지금 막 할아버지 신위를 모시고 할아버지께서 거처하셨던 고향집에서 제사를 올렸습니다. 지금은 바로 할아버지께서 111년 전에 돌아가신 바로 그 시각입니다! 동짓달 보름을 하루 넘긴 오늘 밤, 고향집 하늘에 떠 있는 차디찬 달을 보면서 적의 땅 대마도에서 망국의 한을 온 몸으로 품은 채 순국하신 할아버지를 추모하자니 저미는 가슴을 주체하기 어렵습니다. 순국! 사라져가는 조국의 운명을 보고 하나 밖에 없는 자신의 소중한 목숨을 바치는 지고지순한 행위가 바로 순국이지요! 순국의 의미는 어디서 찾을 수 있을까요? 저는 이제 할아버지의 순국 과정을 찾아가 봅니다. 우리 역사는 1905년 을사늑약으로 국권을 상실하고 말았습니다. 이듬해 할아버지께서는 74세의 노구를 이끌고 의병을 모집하셨지요. 대포로 중무장한 일본을 의병으로 상대
[우리문화신문=이윤옥 기자] 김규면(1880~1969)선생은 함북 경흥 출신으로 서울 배재학당과 한성사범학교 등을 졸업하고, 1907년 신민회(新民會)에 가입하여 신교육운동에 참여하였다. 일제의 한국강점 후 기독교에 입교하여 목사가 되었으며, 1913년 조선총독부의 포교규칙(布敎規則)을 승인하는 영국과 미국 선교사들의 방침에 저항하였다. 1919년 3·1운동 후 북간도에서 독립교회(獨立敎會) 성리교(聖理敎)를 창립하였으며, 성리교의 조직과 자금을 기반으로 중국 왕청현(汪淸縣) 춘화사(春華社)에서 대한신민단(大韓新民團)을 조직하고 단장으로 선임되어 500여 명의 부하를 이끌고 흑정자(黑頂子) 일대 나자구(羅子溝)와 초모정자(草帽頂子) 일대를 중심으로 활동하였다. 그후 러시아 블라디보스토크 신한촌(新韓村)으로 거점을 옮겨 이동휘(李東輝)의 한인사회당(韓人社會黨)과 대한신민단을 합동하여 한인사회당 부의장 겸 군사부위원장으로 사회주의운동을 전개하는 한편, 전쟁 시 고려빨치산군대 군사위원회 위원장으로 프리아무르주 군정의회 전권위원으로 전선 후방의 조직 및 지도를 총괄하였다. 또한 신민단 의사부장(議事部長) 김춘범(金春範)으로 하여금 이동휘(李東輝)와 함께 나자구지방에
[우리문화신문=김영조 기자] 항일의 노래를 부르며 독립을 간절히 꿈꿨을 광복군 오희옥 지사. 민족문제연구소가 진행한 항일음악회에서 오희옥 지사가 들려주었던 ‘독립군가’와 안중근 ‘옥중가’를 여러분께 전합니다.(민족문제연구소 제공)
[우리문화신문=이윤옥 기자] “우리대한 겨레의 형제자매와 온 세계 우방의 동포들이여! 우리 대한은 완전한 자주독립과 신성한 평등복리를 우리 자손 여민(黎民)에게 대대로 물려주기 위하여 타민족 전제(專制)의 학대와 압박에서 벗어나 대한민족의 자립을 선포한다. 우리 대한은 예로부터 우리 대한의 대한이었지 타민족의 대한이 아니다. (가운데 줄임) 한마음 한뜻인 이천만 형제자매들이여! 단군대왕조께서는 상제 가까이에서 우리에게 기운을 명하시고 이 시대의 온 세계가 우리를 돕고 있도다. 정의를 이길 자가 없으니 하늘의 뜻을 거역하고 나라를 도적질한 적들을 한손으로 무찌르라. 이로써 5천년 조상들의 빛난 얼을 받들고, 2천만 동포의 운명을 개척할 것이다. 궐기하라 독립군아! 함께 싸워라 독립군아!(끝줄임)” - 조소앙 선생이 기초한 <대한독립선언서(무오독립선언서)> 일부- 이는 1919년 2월 조소앙 선생이 기초하고 김규식, 김동삼, 김좌진, 이동휘, 박은식, 안창호 등 쟁쟁한 독립운동가 39명이 서명한 <대한독립선언서(무오독립선언서)> 가운데 일부이다. 이 선언서는 <2ㆍ·8독립선언서>와 <3이는 1919년 2월 조소앙 선생이 기초
[우리문화신문=이윤옥 기자] '어서 오십시오. 중국의 미래 광저우에 잘 오셨습니다.' 선생님은 광저우에 도착한 김산을 이렇게 맞으셨지요. 저는 김산 평전을 통해 선생님을 처음으로 알게 되었습니다. 물론 선생님의 저 말은 평전을 써내려간 저자의 상상력이 더해진 말이겠지요. 하지만 선생님을 접할 때마다 저는 저 한마디가 함께 떠오릅니다. 무더웠던 올 여름, 저는 임시정부기념사업회의 독립정신 답사단에 참여할 수 있었습니다. 답사장소 가운데 하나였던 베이징에서는 선생님이 수학하셨던 민국대학 터 극군근왕부를 방문했습니다. 비록 다른 답사지역에 견주어 짧은 시간 방문했지만, 저에게는 남다른 의미로 다가왔습니다. 그리고 답사를 위한 사전 공부에서 ‘조선노동공제회’라는 사회운동 단체를 알게 되었고, 선생님께서 이 운동에 참여하였던 사실도 뒤늦게 알게 되었습니다. 강한 인상을 남긴 저 말 때문일까요? 선생님이 남긴 흔적과 조우할 때마다 따뜻이 맞아주는 푸근함을 느끼곤 했습니다. 세 번의 우연은 운명내지 필연이라고, 어느새 저는 선생님의 이력을 다시금 찾아보고, 공부하게 되었습니다. 그렇게 저는 선생님을 흘려보내지 아니하고, 일대기를 가슴속에 품은 청년이 되었습니다. 선생
[우리문화신문=이윤옥 기자] “차리석 선생은 해외 혁명운동자 가운데서도 특히 강력한 정신력을 소유하기로 유명하시었다. 탁월한 사무처리 기능이나 병중에서도 최후일각까지 맡으신 사명을 완수하신 건강한 책임감은 한국 독립운동에 피와 살이 되었다해도 과언이 아니다.” -백범 김구, 동아일보 1948년9월 22일자- 대한민국임시정부 국무위원(장관)을 지낸 동암 차리석(1881~1945, 1962, 독립장 추서) 선생은 백범이 말했듯이 ‘한국 독립운동사에 피와 살’이 되었을 뿐더러 ‘대한민국임시정부의 든든한 버팀목’으로 독립운동사에 한 획을 그은 분이다. 그런데 차리석 선생에게 차보석(黃寶石, 車寶石, 1892~1932)이라는 여동생이 있었다는 사실을 알게 된 것은 우연한 기회였다. 기자가 집필 중인 여성독립운동가를 기리는 시집 《서간도에 들꽃 피다, 제8권》을 쓰는 과정에서 ‘차보석 선생의 오라버니가 동암 차리석 선생’이라는 사실을 알게 된 것이다. 기자는 차보석 선생의 이야기를 듣고자 지난 1월 16일 화요일 오후, 선생의 조카인 차영조(차리석 선생 아드님, 74살) 씨를 의왕시의 한 음식점에서 만났다. “미국에서 활동하신 고모님(차보석)에 대한 자세한
[우리문화신문=이윤옥 기자] 한미협회의 중국 국민당 정부 접촉을 통한 임정승인 외교 시도도 여의치 않게 흘러갔다. 이를 타개하기 위해 한미협회 후견인으로 활동하던 제랄딘이 나서게 되었다. 제랄딘은 한미협회의 다른 인사들과 달리 이승만 이외에도 김용중 등 미주 한인사회의 다양한 인물들과 관계를 맺으면서, 미국 내 주요인사들과 접촉했다. 게다가 애쉬모어와 제랄딘은 장제스, 장췬, 궈다이치, 쑹메이링 등 중국 국민당 정부 관계자들과 이미 1920년대부터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었다. 결국 한미협회 인사들은 중국 국민당 정부와의 교섭이 어려워지자 제랄딘의 협조를 받기로 했다. 쑹메이링과의 개인적인 친분이 있었던 제랄딘은 다음과 같은 서한을 보내 중국 국민당 정부의 임정 승인을 재촉했다. … 난 당신(쑹메이링)이 내 남편(애쉬모어)과 그의 아버지(필드)가 한국 사람들에 관심이 많았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우리는 이승만과 김구처럼 개인적으로 알고 있는 망명자뿐만 아니라 한국의 독립을 위하여 수십 년 동안 쉬지 않고 헌신하고 자기를 희생하는 사람들을 도와야 합니다. … 중략 … 지금 총통(장제스)이 이끄는 중국 사람들이 중경에서 한국 임시정부에 기꺼이 피난처를 제공
[우리문화신문=이윤옥 기자] 100년 편지에 대하여..... 100년 편지는 대한민국임시정부 100년(2019년)을 맞아 쓰는 편지입니다. 내가 안중근의사에게 편지를 쓰거나 내가 김구가 되어 편지를 쓸 수 있습니다. 100년이라는 시간과 공간을 넘나드는 역사와 상상이 조우하고 회동하는 100년 편지는 편지이자 편지로 쓰는 칼럼입니다. 100년 편지는 2010년 4월 13일에 시작해서 2019년 4월 13일까지 계속됩니다. 독자 여러분도 100년 편지에 동참해보시지 않겠습니까? 앞으로 매주 화요일 100년 편지를 소개합니다. -편집자- 문의: 대한민국임시정부기념사업회 02-3210-0411 이 편지는 선생님의 외손자이신 김동식(사월혁명회 공동의장) 선생의 증언과 민족문제연구소 그리고 사월혁명회가 조사한 사료를 바탕으로 쓰는 편지입니다. 김동식 선생은 집안이 어려워 어릴 때 외가에서 살면서 할아버지의 독립운동에 대해 많은 이야기를 들으며 남다른 자부심을 가지며 자랐다고 합니다. 특히 외할아버지는 양산에서 천석꾼 집안에 태어나 임시정부 재무총장에 임명 될 정도로 독립운동 자금에 깊이 관여하시며 상당한 재산을 독립운동에 헌납한 것을 김동식 선생은 긍지로 여기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