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문화신문=최우성 기자] 겨울이 가까워진 11월 덕유산이 품은 산골짜기 죽림정사를 찾았다. 불교에서 죽림정사는 남다른 뜻이 있다. 석가모니 부처님이 인도에서 깨달음을 얻기 위하여 혹독한 동토의 땅에서 설산수도를 거쳐우주의 진리에 대한 깨달음을 얻은 뒤 그를 따르던 수도승단을 이끌고 제자들을 지도할 때에 수행자들은사람들이 사는 마을과 멀지 않은 곳에있는 동굴과 같은 곳에 머물면서 살았다고 한다. 이들은아침에 일어나 마을 집들을 돌아서 커다란 밥그릇(바루)에탁발하여 받아온 음식으로 하루 한끼를 먹으면서 수행하였다고 전한다. 그런데 부처님과 수행자들이 이런 열악한 시설에서 수도하는 것을 너무도 안타깝게 여긴 당시 마가다국의 돈 많은 갑부인수자타 장자는 그가 존경하는 부처님이 쾌적한 곳에머물면서 제자들을 지도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하여 환경이 좋은 곳에 최초의 절을 짓고자 하였다. 그는 전국을 뒤져 그런 곳을 찾아보았다. 그렇게 그가 택한 곳은 당시 왕의 아들이었던 기따태자가 소유하던 대나무가 숲에 사슴이 노니는 아름다운 동산이었다. 수자타는 땅주인인 기따태자를 찾아가 그 숲을 자신에게 팔아줄 것을 요청하였다. 그러면서 그 땅값으로 얼마를 주면 팔겠느냐고 물어보았
[우리문화신문= 이윤옥 기자] 국가보훈처(처장 박승춘)는 광복회, 독립기념관과 공동으로 영국에서 구국외교를 펼친 이한응(李漢應, 1874~1905) 선생을 2016년 11월의 독립운동가로 선정하였다고 밝혔다. 선생은 1874년 경기도 용인에서 군수인 이경호의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우리나라 최초의 관립 근대교육기관인 육영공원에서 근대학문을 익혔으며, 1894년 과거시험인 성균관 진사에 합격한 후 한성부 주사에 임명되었다. 또한, 1899년에는 관립 영어학교 교관으로 후학을 지도하였다. 1901년 3월 민영돈이 주영특명전권공사로 임명될 때 선생도 주영공사관 참서관으로 함께 영국에 파견되었다. 선생은 영국에서 교류 인사들과 두터운 친분을 쌓으면서 한국의 사정을 알리는데 노력하였다. 선생은 러시아와 일본 간 전쟁이 벌어질 것을 예상하고, "한반도 중립화 방안"을 제시하였다. 한반도의 평화가 유럽의 세력균형과 연관된다는 매우 독특하고 창의적인 견해를 제시하며, 전쟁을 예방하기 위해 영국 외무부를 설득하였다. 또한, 당시 국제상황으로 보아 러일전쟁에서 일본이 승리하면 전후에 한국의 독립이 유지되기 더욱 어려울 것으로 예상하고 1905년 3월 영국 외무대신에게 거중조정
[우리문화신문=이윤옥 기자] 선생님 안녕하세요. 저는 한국독립운동사를 이제 막 공부하기 시작한 이지은입니다. 뛰어난 글솜씨를 지니지 못해 제가 드리고 싶은 말씀들을 다 표현할 수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선생님들께 제 마음만은 꾹꾹 눌러 이 편지 속에 담아 글을 써내려가 봅니다. 제가 한국독립운동사를 공부하고자 마음먹은 이후로 항상 스스로에게 던져보곤 했던 질문들이 있었습니다. 나라면 어떤 선택을 했을까. 당시의 선생님들께서는 어떤 마음을 가지고서 독립운동에 뛰어들 수 있으셨을까? 그 마음을 모두 다 헤아려보기엔 저는 한국인이라고 차별을 받아본 적도, 매일매일 폭압 속에서 살아본 적도, 나라를 빼앗겨본 적도 없었기에 쉽사리 짐작조차하기 어려웠습니다. 그러던 저에게 선생님의 일기 속 한 구절은 머리를 울리고 마음을 뭉클하게 하였습니다. 아이의 이름 속에서 선생님들께서 갖은 고생 속에서도 결코 포기할 수 없는 이유이자, 다짐을 엿볼 수 있었습니다. “아기의 이름은 ‘제시’라고 지었다. 집안의 돌림자가 ‘제’자인데 ‘제시’라는 이름이 생각났다. 영어이름이다. 조국을 떠나 중국에서 태어난 아기, 그 아기가 자랐을 때는 우리나라가 세계 속에서 당당하게 제 몫
[우리문화신문=김영조 기자] “의성 김 씨 김진린의 귀한 딸 시집와서 남편 이중업과 두 아들 동흠 중흠 사위마저 왜놈 칼 맞고 비명에 보낸 세월 쉰일곱 늘그막에 기미년 안동 예안 만세운동 나간 것이 무슨 그리 큰 죄런가 갖은 고문으로 두 눈 찔려 봉사 된 몸 두 번이나 끊으려 한 모진 목숨 11년 세월 그 누가 있어 한 맺힌 양가(兩家)의 한을 풀까“ 이 시는 이윤옥 시인이 쓴 김락(金洛, 1863~1929)지사에게 드리는 “독립운동가 3대 지켜 낸 어머니 김락”이라는 시 가운데 일부입니다. 김락 지사님! 저는 몇 해 전 안동에 있는 지사님 무덤을 찾아 간 적이 있습니다. 당시 지사님의 무덤은 안동독립운동기념관(현, 경북독립운동기념관)에서조차 확인할 수 없어 우여곡절 끝에 지사님의 친정집에서 김대락 지사님의 후손 김시중 어르신을 만나 겨우 찾아 갈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무덤을 찾아 가는 길은 변변한 표지판도 없어 풀숲을 헤치고 쓰러진 소나무 등걸을 치우며 간신히 찾을 수 있었지요. 당시 시아버님을 다룬 《향산 이만도》 책에는 김락 지사님 부부 무덤을 향산 이만도 시아버님과 아들의 무덤이 있는 봉화군 바드실 마을로 옮길 예정이라고 나와 다행이라고 생
[우리문화신문=이윤옥 기자] “무덥고 습기 많은 충칭 특유의 찜통더위가 연일 계속되는 가운데 손가화원에서는 난데없이 어른들의 만세소리가 천지를 뒤흔들었습니다. 일제의 패망과 함께 대한민국이 해방된 날이지요. 귀국을 서두르는 우리에게 정든 친구 천진천, 천의, 짱다루, 구팡 등 친구들은 물론 그동안 해코지를 일삼던 애들까지 찾아와 이별을 아쉬워했습니다. 어디서 난 소문인지는 몰라도 차우센미(조선쌀)는 한 알이 달걀만해서 서너 알만 먹어도 배가 부르고, 맛도 좋다며 애들이 부러워했습니다.” 이는 독립운동가이자 1949년 반민특위 위원장을 지낸 김상덕(金尙德, 1891 ~ 1956) 선생의 아드님인 김정륙(대한민국임시정부기념사업회, 이하 임시정부기념사업회) 부회장이 충칭에서 해방을 맞았을 때의 소회를 밝힌 것이다. 그러나 이 말이 참말인줄 알고 귀국했다가 그만 첫날 실망했다고 회고한다. 그도 그럴 것이 김정륙 부회장의 나이 8살 때 일이니 조국의 정보란 것이 얼마나 엉성했을까 싶다. 하지만 푸석푸석하고 바람에 날리는 쓰촨(四川) 쌀에 견주면 우리나라 쌀은 정말 찰지고 맛 좋은 것이라고 강조한다. 식량이 귀하던 시절 그것도 망명땅 중국에서의 쌀밥 한 그릇은 얼마나
[우리문화신문= 이윤옥 기자] 일제강점기 민족적인 성향이 짙은 '아리랑'을 만들어일약 조선영화계를 대표하는 인물로 주목받았던 나운규 선생은 그 누구보다도 투철한 독립운동가지만 이 부분에 대해서는 잘 알려지지 않았다. 나운규 선생은 함북 회령 출신으로 회령보통학교를 졸업한 뒤 간도의 명동중학에서 수학하였다. 1919년 3월 함북 회령에서 만세운동에 참여하다 일경의 수배를 받게 되자 연해주를 거쳐 북간도로 이동하였다. 3.1운동 이후 간도지역의 무장독립운동이 활발할 때 선생은 철도, 통신 등 일제의 기간시설 파괴 임무를 띤 도판부(圖判部)에서 독립군으로 활약하였으며, 청산리 인근에서 독립군 훈련을 받기도 하였다. 그러나 일제는 철도 파괴 계획에 대한 비밀문서를 입수하고 선생을 비롯한 관련자들을 체포했다. 선생은 1921년 3월 보안법위반으로 2년 형을 언도받고 옥고를 치렀다. 출소 후 회령에 머물던 선생은 1924년 1월 극단 예림회에 가입하여 연극배우로 활동하였다. 이후 부산의 조선키네마주식회사 연구생으로 입사하였고, 윤백남의 백남프로덕션에서 '심청전'의 심봉사 역을 맡아 연기하였다. 이후 '흑과백', '장한몽', '농중조' 등에 출연하며 배우로서 주목받게 되
[우리문화신문=이윤옥기자] 여성독립운동가들을 조명하는《서간도에 들꽃 피다》 시집을 6권이나 낸 이윤옥 기자가 항일독립운동가 후손들을찾아 나선다. 항일독립운동가 본인들은 물론 후손 1세대들도 고령으로 살아계신 분이 별로 없는 이때 후손 1세대들을 찾아 항일독립운동에 온 삶을 바친 선조들을 두었던 그들에게이야기를 들어본다. 이제나마 항일독립운동가 후손의 고난에 찬 삶을 되돌아보는 계기를 삼으면 좋을 일이다.(편집자 말) “욕심이 없되 허망하지 않고, 뜻이 있되 결코 나대지 않는 자연의 모습처럼 그렇게 왔다가 그렇게 자연처럼 가는 것이 진정한 영웅과 참된 열사의 길이요 뜻이었거늘, 하물며 나 같은 범부, 졸부가 뭐 남길게 있다고 붓을 들고 나섰는지 나 자신이 생각해도 무척이나 후회스럽고 다시 물렸으면 싶은 마음이 굴뚝같다.” 이는 대한민국임시정부기념사업회 김자동 회장의 어머니 정정화 여사의 자서전인 《장강일기, 학민사》 머리말 가운데 한 부분이다. “어머님의 삶을 한마디로 말씀해주실 수 있는지요?” 라는 기자의 질문에, “어머니는 자신보다 남을 먼저 생각하는 분이셨습니다.”라고 기다렸다는 듯 김 회장은 대답했다. 독립운동가 1세들이 세상을 뜨고 이제 그 후손
[우리문화신문= 이윤옥 기자] 비밀여성단체 송죽회로 투쟁한 ‘김경희’ 찬 서리 내려야 비로소 푸르름 드러나는 소나무 한바탕 비바람 흩뿌린 뒤에야 쑥쑥 크는 대나무 서로 걸어온 길 달라도 오직 조국 광복을 향한 곧은 절개 송죽(松竹) 닮았어라 김경희(金慶喜,1888~1919) 애국지사는 31살의 나이로 숨을 거두며 늙으신 어머니와 동지들에게 “나는 독립을 못 보고 죽으니 후일 독립이 완성되는 날 내 무덤에 독립의 뜻을 전해주시오. 나는 죽어서도 대한독립의 만세를 부르리라.”는 유언을 남겼다. 무엇이 그 짧은 삶을 마감하는 순간에도 독립의 끈을 놓지 않게 한 것일까? 김경희 애국지사는 평양 출신으로 일찍부터 기독교를 받아들인 집안에서 태어났다. 동생 애희가 미국에 유학을 했고 막내 동생이 북경을 거쳐 일본 교토로 유학을 갈 정도로 부모님은 이들 세 자매의 교육에 정성을 쏟았다. 숭의여학교 1회 졸업생인 그는 모교에서 교편을 잡으면서 1913년 25살 무렵 황애덕 등과 함께 비밀결사 단체인 송죽회(松竹會)를 조직하여 항일투쟁을 펼쳤다. 송죽회(松竹會)는 1913년 평양 숭의여학교 교사 김경희와 황애덕, 졸업생 안정석 등이 주도하여 결성한 항일 비밀결사
[우리문화신문= 이윤옥기자] 서일(徐一, 1881. 2. 26~ 1921. 8. 27(음), 9. 28(양)) 선생은 1881년(고종 18년) 2월 26일 함경북도 경원군 안농면 금희동 농가에서 태어났다. 18세까지 향리의 서당에서 한학을 배우다가 신학문에 뜻을 두고 경성에 있던 성일(成一)사범학교를 졸업했다. 이로부터 후학을 기르는데 전념한 것으로 보이나 자세한 기록이 발견되지 않고 있다. 나중 그의 행적을 미루어 보아 식민지 젊은이들의 의(意)와 기(氣)를 살리는데 앞장섰으리라 생각될 뿐이다. 그러나 그의 20대는 날이 갈수록 어두운 색깔로 채색되어갔다. 혈기왕성했던 스물다섯 살에 을사조약 체결을 겪었고 서른 살에는 망국(亡國)의 경술국치를 감수하지 않을 수 없었기 때문이다. 당시 국내와 망명지 만주 등에는 사범학교 설립이 급증했다. 이는 조국광복을 위해서는 교육만이 살길이라고 생각한 선지자들이 많았기 때문인 것으로 여겨진다. 선생 역시 교육의 필요성을 절감했음에 틀림없다. 그러나 한계를 느꼈을 것이다. 망명 후 선생이 교육에 정신(대종교)과 힘(무장투쟁)을 융합시킨 사실이 그 증거이다. 선생은 서른 한 살 때인 1911년 국내에서의 항일투쟁의 어려움과
[우리문화신문=이윤옥 기자] 대동강물 흐르는 비옥한 땅 / 일제 침략 없었다면 / 구김살 없이 살아갈 터전 등지고 빼앗긴 나라 되찾고자 / 갓 태어난 핏덩이 / 남겨두고 뛰어든 / 험난한 가시밭길 어미 품 그리며 / 유치장 밖서 / 숨져간 어린 딸 하늘이여 /어린 영혼 가는 길 / 무궁화 꽃 뿌려주소서. 박 지사님의 일생을 추적하면서 저는 이러한 노래를 읊었습니다. 어린 핏덩이가 유치장 밖에서 울어댈 때 지사님의 찢어지는 마음을 어찌 말로 다 할 수 있었을까 싶었습니다. 왜경이 악랄하다고는 해도 갓 태어나 한 달밖에 안된 핏덩이를 둔 어머니를 잡아다 유치장서 고문한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라는 생각입니다. 그것도 옷을 모두 벗기고 ‘그 나체 좀 구경하자’면서 실신하도록 팼다는 이야기를 들었을 때 끓어오르는 분노를 억누를 수가 없습니다. 어린 핏덩이를 안고 면회소에서 삼일동안 애걸복걸하던 그 친척이 싸늘히 죽어간 주검을 보듬어 돌아가던 그 발걸음은 고스란히 우리 겨레가 겪은 아픔이요, 눈물이요, 고통이었다고 생각합니다. 오죽하면 이때의 내용이 1922년 동아일보에 ‘산모를 나체로 심문, 어미가 정신없이 매 맞는 중에 아기는 경찰서 문 앞에서 죽어’라는